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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Dumont(샤를 뒤몽)

작곡자 샤를 뒤몽(Charles Dumont)은 1929년 카올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피아노를배웠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재즈에 흥미를 느끼게 되어 친구들과 레코드를돌려가며 들었다고 한다.
전쟁 후 파리에 올라가 트럼펫을 배우려고 음악원의문을 두드렸으나 목에 이상이 생겨 피아노로 전향했다. 그리고 여러 샹송 가수의 반주를 하면서 작곡 공부를 했다.

우연히 시인 프랑시스 카르코에게 소개되어「노트르담 사원의 탑 아래서」라는시를 받아 거기에 곡을 붙였는데, 1955년에 코라 보케르가 초연해 주었다. 같은 해 여름, 도빌의 샹송 콩쿠르에서 그가 작곡한 '선물'이라는 노래(작사는 로제 노르망)를 여성 가수 다니엘 뒤프레가 불러 에디트 피아프 상을수상했다. 이로써 샹송계의 신진 작곡가로 조금은 알려지게 되었지만 아직도 생활은 어려웠다.

1958년 올렝피아 극장에서 열린 '코크 돌 들 라 샹송'이라는콘테스트에 출품한 'Envoie La Musique(작사는 미셸 보케르)'이 5위에 입상하고콜레트 르날이 불러 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 59년에도 같은 콘테스트에 'Sophie'(작사는 미셸 보케르)를 출품하고 장 필립이 불러 2위에 입상했다. 이 노래는마르셀 아몽이 불렀고, 다시 '샹송의 벗'이 다루어 상당한 히트가 되었다.
리고 1960년, 역시 보케르 작사의 'Marion'으로 이 콘테스트의 1위를획득했다. 미셸 보케르의 소개로 에디트 피아프를 방문했던 것도 같은 해여름의 일이었다.

그 무렵 뒤몽은 군대 행진곡과 같은 느낌이 나는 곡을 하나 썼으며, 거기에가사를 붙여 달라고 미셸 보케르에게 부탁했다. 완성되었을 때 보케르는 이 노래가 피아프에게 가장 어울린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전화를 걸어만나자고 요청을 했던 것이다. 당시의 피아프는 이미 육신 전체가 형편없이쇠약해져 있었다.

1959년, 지방 순회 공연을 가던 중 다글러스 데이비스가졸면서 운전을 하여 네번째의 자동차 사고가 일어났다.
그래도 그녀는 무대를버리지 않고 갈빗대가 부러진 가슴에 기브스를 하고 모르핀 주사를 맞으며노래했다. 그러다가 스웨덴에서 쓰러졌을 때는 간장도 췌장도 모든 것이 나빠져있었다. 병과 싸우며 걷는 연습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럼에도불구하고 불굴의 투지를 불태우며 피아프는 다음의 올렝피아 극장 공연에 착수했다.

첫 대면한 뒤몽을 데리고 보케르가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피아프는 올렝피아 극장에서 부를 곡을 거의 정하여 연습을 되풀이하고 있던때였다. 어쨌든 피아노를 치며 불러 봐요 라는 말을 듣고 뒤몽은 피아노를치면서 '아뇨, 전 후회하지 않아요'를 불렀다.
그때까지 냉담했던 피아프의태도가 전혀 바뀌었고, 그리고 당장 이 노래를 올렝피아 공연의 곡목으로 추가할 것을 약속했다. 예정되고 있었던 마르그리트 모노의 곡은 차례 차례 뒤몽의작품과 교체되었다.

1960년 12월 29일에 개봉된 네번째의 올렝피아 극장 공연에서 피아프는 '아뇨,전 후회하지 않아요' 에'MonDieu','LesFlonflons Du Bal','La VilleInconnue' 등 뒤몽과 보케르의 콤비에 의한 갖가지 작품을 초연하여 대성공을거두었다.
만신창이의 피아프가 목숨을 걸고 노래한 이 극적인 콘서트는 지금도화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1961년 4월 4일까지 속연되어 소름이 끼치는 두려움이서린 절창으로 청중을 압도했다. 이리하여 뒤몽은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확립했던것이다. 그가 에디트 피아프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된 명곡 '아뇨, 전 후회하지않아요'는 제2의 '사랑의 찬가'라고 할 만큼 내용이 힘차다.

에디트 피아프의 연인으로 남편으로 많은 작업을 같이했던 뒤몽은 1961년에아름다운 사랑 노래. 연인들(Les Amants) 이란 제목의 노래를 두 사람이 이혼한 후 발표해 당시 다시 부부로 합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낳기도 했지만.이 노래를 발표한 후 이 두 사람은 부부가 아닌 연인사이로 다정한 모습을 보여줘화제가 되기도 했고 먼저 생을 마감하는 짧은 부부의 인연과 다정했던 연인피아프의 마지막을 슬픔속에 바라 보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