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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박윤초

우리나라 판소리계의 거목이었던 인간문화재 김소희 국창의 고명딸로 그녀의 특별한 예술적 자질은 부모로 부터 <타고남>에 있다.

아버지 박석기는 전남 담양(창평)의 부호의 자제로서 동경제국대학을 나와 일제의 현실참여를 거부하고 우리 문화 말살정책에 맞서 고향에 은둔하며 사재를 털어 민족혼인 우리 국악을 지키는 일을 실천한 지식인이었다고 한다.

그에 의하여 호남 국악계의 꺼져가는 불씨를 살릴 수 있었고 당신 스스로 거문고를 가까이 하여 <박석기류 거문고 산조>를 창제하게 된 것은 그의 가문과 학식으로 볼 때, 당시는 물론 오늘에도 예가 없는 일이다.

어머니 김소희는 판소리 국창으로 20세기 근대 국악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몇백 년에 한번 날까말까하는 대예술가로, 언론사가 뽑은 한국 근대 50인에 선정된 인물이다.
박윤초는 어머니 뱃속에서 부터 판소리를 들었고, 아버지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자란 나이 여섯 부산피난시절, 인간문화재 한영숙에게 학춤을 배워 아버지 후배 유치진이 만든 <가야금>에서 학춤을 춘것이 그녀의 첫무대, 일곱살이었다고 한다.
이후로 그녀는 정규학교 교육과 병행하여 가야금(성금연, 함동정월), 판소리(어머니), 춤(이매방), 한국화(이당 김은호), 서예, 시문(우전 신호열)을 두루 사사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녀의 삶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에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를 여윈 것이다. 열살배기의 슬픔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녀에게 소중한 정신적 유산을 물려주었다. 그녀의 삶의 방식은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

입신양명을 위하여 그녀가 쌓은 예술세계를 도구로 하지 않도록하는 지식인의 자존심은 그녀를 또한 그렇게 살아가도록 했다고 한다. 그녀는 1970년 후반부터 가정에서 사회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그녀는 그것을 <팔자 도망 못해서...>라고 표현한다.

아버지가 일제 문화정책에 맞섰다면 그녀는 오늘날 서양문화의 무분별한 수용으로 인한 우리 정체성(Identity)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일, 어머니의 뒤를 이어 우리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일, 국악의 장르를 넓혀 국악이 서양 예술과 만나 공생 발전하도록 하는 일에 크게 활동하여왔다.

우리 문화예술계에서는 박윤초를 총체적 예인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가야금, 춤과 소리에다 사군자를 치고, 서예를 즐기며, 시집을 내고 시창(현대시에 국악음율을 작곡하여 창(唱)으로 부르는 음악으로 조선시대 가곡, 시조와 음악성이 다름)을 하는 <끼>와 재능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타고난 재능과 당대 일인자로부터의 배움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활동이 많지 않은게 사실이다. TV활동은 많은 섭외에도 불구하고 담을 쌓고 있다.

앞으로 금란당(琴蘭堂) 박윤초는 시창(詩唱)을 널리 보급하여 하나의 예술 장르로 정착시키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로서 후학을 가르치며, 김소희의 딸이며 제자로서, 국가가 인정한 김소희제 판소리의 이수자로서 김소희 기념관을 건립하여 당신의 예술세계를 잘 지켜나가서 후대에 물려주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