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nryk Wieniawski : Violin Concerto No.2 in d minor, Op.22

작품의 개요 및 배경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은 완숙기의 작품에 속하며 (1873, 나이 38세) 그의 경력과 명성이 최고에 달하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악단에는 바이올린의 명수들이 다수 활동하고 있었던 때였지요. 바이올린의 기교적, 색채적 가능성이 다양한 문화권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폴란드 등등) 의 작곡가들에 의해서 추구되면서 화려함이 극치에 다다르는 때입니다. 사라사태, 파가니니, 요아힘 등의 전설적 명 연주가 겸 작곡가들이 이때 활동하던 사람들입니다.

비에니아프스키는 우아하고 섬세한 연주로 기교적인 프랑스-벨기에 바이올린 악파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명성을 얻었으나 그의 정서적 기반은 폴란드적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 가운데는 기교적이면서도 폴란드 민요의 아름다움을 살린 것들이 많다.

대표작으로 <모스크바의 추억> <전설> 등의 소품과 두 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있으며, 두 곡의 협주곡 가운데서도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 d단조는 아름다운 서정과 영감이 넘치는 작품으로 생상과 랄로의 영향이 엿보인다.
이 곡은 모두 세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2악장 로망스가 매우 유명해서 따로 떼어 연주되기도 한다.

작품의 구성 및 특징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
비교적 긴 오케스트라 Introduction 에 이어서 독주 바이올린이 비로소 모습을 나타낸다.
약간은 침울한 듯한 북구적인 정서가 돋보이는 악장

2악장. Romance. Andante non troppo
2악장. 로망스 안단테 논 트로포 : 독주 바이올린 선율의 아름다움이 특히 돋보이는 부분. 단독으로도 자주 연주되고 주제 선율도 인상적이다.

3악장. Allegro con fuoco-Allegro moderato
3악장. 알레그로 콘 푸오코, 알레그로 모데라토 : 집시 풍으로' 라는 지시가 붙어 있다.
폴란드 출신인 그로서는 집시 계통의 음악도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기회가 있었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교적으로는 완숙함이 상당한 경지를 보인다. 시작부터 끝까지 점진적으로 분방하고 열정적인 음악으로 몰아가는 악장.
Violinist Jascha Heifetz(1901~1987)

하이페츠는 1901 년 2월 2일 제정 러시아의 빌나에서 태어났다.
유태인 계열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 루빔 하이페츠에게 세살때부터 4분의 1 사이즈 바이올린으로 기초를 배웠고, 일곱살에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첫 공개 연주회를 가졌다.

당시 청중들은 "매끈하고 둥근 음색과 완숙한 솜씨로 작은 손가락이 매우 어려운 음표들을 유려하게 짚어나가는 모습에 마법에 걸린 듯 황홀하였다" 고 한다.
1910년, 아홉살의 나이로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러시아 바이올린계의 당대 최고의 스승인 레오폴드 아우어 교수에게 사사하였다. 러시아는 유럽의 음악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는데, 특히 러시아 바이올린의 역사는 19세기말 유태인 혈통의 음악가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그 대부가 바로 아우어 교수였다.

예프렘 짐발리스트, 미샤 엘만, 나탄 밀스타인, 에디 브라운, 막스 로젠 등등 - 이 모두 아우어의 제자들이었다. 하이페츠 또한 아우어 교수의 탁월한 음악교육에 찬사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동으로 대접받는 것은 질병과 같은 것이며 치명적인 것이다. 나는 운좋게도 겨우 살아남은 몇 안되는 신동이라 불리우던 사람이었으며, 이는 전적으로 위대한 음악선생인 아우어 교수와 음악을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 덕분이었다."

아홉살에 아우어의 문하에 들어간 하이페츠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지 2년만에 아르투르 니키쉬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함께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듬해인 1913년에 하이페츠는 라이프찌히에서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였는데, 이 당시 관객석에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크라이슬러와 짐발리스트가 참석하였었다. 12세 소년의 연주를 듣고난 후 크라이슬러는 짐발리스트에게 말하기를 "자네나 나나 이제는 바이올린을 내던져 박살내는 편이 나을 것 같네" 라고 하였다.

하이페츠는 1917년 10월에 시베리아와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카네기 홀에 데뷔했다.
이때 그가 보여준 초인적인 기교와 뛰어난 음악성으로 인해 그는 하룻밤 사이에 미국 음악계의 우상으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미국 데뷔 첫 해에 그는 뉴욕에서만 30여회의 독주 무대를 가질 정도가 되었다.

저명한 비평가 쵸치노프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열여섯살의 이 소년은 홀을 꽉 채운 청중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했다. 태연히 무대에 걸어나와서는 이 유서 깊은 홀에서조차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는 엄청난 기교와 음악성을 보여주었다."

이 당시 제정 러시아는 공산당 혁명으로 붕괴되고 있었기에 하이페츠 일가는 많은 고생 끝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미국에 정착하였으며, 이후부터는 미국을 본거지로 하여 그의 음악활동이 펼쳐지게 되었다.

그는 1925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된다.
40대에 이르러 그는 캘리포니아의 비벌리 힐즈에 편안한 자택을 구하였고 여생을 마칠때까지 거기서 머물렀다.
하이페츠는 솔리스트로서의 활동외에 루빈스타인, 포이어만과 더불어 이른바 '백만불짜리 트리오'를 결성하여 실내악 연주활동도 하였다. 이 트리오는 1942년 포이어만이 사망한 후에도 피아티고르스키를 영입하여 수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명성과는 달리 이 트리오의 연주는 그다지 깊은 조화를 들려주지 못하였는데, 루빈스타인의 말을 인용하면 "순전히 하이페츠의 음색과 고집 때문" 이었다.

그는 1962년부터 남캘리포니아 대학에 교수로 취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점차 연주활동을 줄여나가 1972년 10월 23일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연주계에서 완전히 은퇴하였다.
이후 그는 주로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987년 12월 11일 자택에서 8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작곡가 이야기

Henryk Wieniawski(1835 ~ 1880)

비에니아프스키는 폴란드 루블린 출생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로, 5세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여 8세 때 파리국립음악원에 입학이 허용되어 마사르(Massart)에게서 사사받았으며, 11세 때 바이올린 연주의 1등을 받은 신동이었다.

10세를 전후하여 그는 이미 동생 조제프 비에니아프스키와 함께 연주여행을 다녔는데, 그의 신동으로서의 연주여행은 8년 이상 계속됐다. 이 시기에 비에니아프스키는 비평가 세로프로부터 “이들 형제는 어릴 때 잠시 스쳐가는 신동이며, 비르투오조적인 재주 뿐이다”라는 평을 듣기도 하는데, 그는 자신의 작곡을 통해서 이런 혹평들이 틀렸음을 증명했다.

그 후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연주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1860년 페테르스부르크의 궁정 바이올니스트가 되었으며, 25세 때인 1860년에는 러시아의 궁정 전속 독주가로 초빙되어 12년 동안 페테르스부르크에서 활동하였는데, 1862-67년 페테르스부르크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1872년에는 러시아의 대 피아니스트인 안톤 루빈스타인과 미국으로 연주여행을 떠나 성공을 거두었으며, 1874년부터 77년까지는 비외탕의 후임으로 브뤼셀 왕립음악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스타카토기법 등의 연주법 발전에 기여하였다.

비에냐프스키는 13세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5년 후 자신의 작품번호 14번의 곡들을 출판한다.
이중에서 화려하고 낭만적인 콘체르토 1번은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다. 1862년에는 콘체르토 2번을 초연하게 되는데, 악평을 하기로 유명한 꾸이마저도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1악장 알레그로의 신선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감탄할 정도로 훌륭한 곡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생애의 여러 기간 동안 계속되는 연주여행에 시달렸다. 러시아에서 돌아온 직후인 1872년 또 세계연주여행을 떠났는데, 첫 해에 북미에서만 215회에 다다를 정도의 무리한 연주 스케줄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1875년 유럽으로 다시 돌아와서 비외탕을 대신하여 2년간 브뤼셀 음악원의 교수로 있으면서도 연주활동을 계속했으며, 독일 연주 때는 사라사테와 라이벌이 되기도 했다. 1878년에 건강이 다시 크게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자신의 콘체르토 2번을 연주하다 무대에서 쓰러지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가 무대 뒤로 실려나간 사이 청중석에 있던 절친한 친구 요아힘이 비에니아프스키의 바이올린을 들고 올라와 “내 친구의 콘체르토는 연주할 수 없지만 대신 바흐의 샤콘느를 들려드리겠습니다”하며 연주했다. 연주가 끝난 후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무대로 나온 비에니아프스키와 포옹했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그의 건강은 같은 해 모스크바에서 크로이처 소나타 1악장만을 연주하고 멈추어야만 할 정도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몸 상태가 조금이라도 좋아지기만 하면 그는 변함없이 대단하고도 놀라운 연주를 들려주었다. 무대를 사랑한 비에니아프스키는 결국 이듬해 러시아 오데사에서 연주 도중 병원으로 실려 갔다.

차이코프스키의 후원자였던 폰 메크(von Meck) 부인의 집에서 요양하는 비에니아프스키의 곁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 친구들은 병원과 보험비를 마련하기 위해 음악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몇 안되는 바이올린 명수였던 그는 모주꾼인데다가 룰렛등의 도박광이었기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심장병을 앓게 되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45세라는 한창 나이에 객지인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비에니아프스키는 당시 바이올린 최고 명수의 한 사람이었는데, 특히 현을 눌러 2중음을 만들거나, 피치카토를 위한 왼손의 특수기교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연주는 기교적인 패시지들을 불같이 해치워 버리고는 그다음 순간에는 듣는 이를 울게 만들어 버리는 서정적인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음색에 있어 서정적이면서도 열정적인 특징은 그 특유의 높은 긴장도를 가진 비브라토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는 보잉에 있어서도 특별했다.

그의 보잉은 “굳어 있다”는 평을 듣기도 했는데 그것은 후세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오른 팔꿈치를 높이 들고 두 번째 손가락으로 활을 눌러서 내는 보잉 스타일은 당대에는 전통에 위배되는 특이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이것을 ‘러시안 보잉’(Russian bow grip)이라고 부르지만, 그 보잉의 창시자는 바로 비에니아프스키이다.

작곡에 있어서 그는 파가니니적 초절기교에 낭만적 향기 그리고 슬라브적인 색채를 더했다. 그가 작곡한 조국의 폴란드 춤곡들(마주르카, 폴로네이즈)에도 역시 이러한 색채가 가득 차 있다. 그가 남긴 상당수의 바이올린곡은 그의 독자적인 기교가 많이 도입되어 있어, 그의 작품을 연주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어려운 기교를 요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은, 밝고 화려한 기교를 구사하는 파가니니의 작품과는 대조적으로 슬라브적인 우수가 깃든 중후한 울림소리로 마음속에 깊이 스며드는 정감을 노래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의 제2악장 로망스인데, 이 부분은 단독으로도 자주 연주 될 만큼 인기가 높다.

그는 전아하고 섬세한 연주를 하여 기교적인 프랑스-벨기에파의 바이올니스트로 명성을 얻었으나, 그 가요성, 정서, 기교 등의 기반은 폴란드적으로 폴란드를 대표하는 연주가이다. 작품은 기교적이고 폴란드 민요의 아름다움을 살린 것이 많다.

1935년부터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제1회 <비에니아프스키 국제 콩쿠르>가 개최되었는데, 첫 해에 1위 지네트 느뵈, 2위 다비드 오이스트라흐가 수상하였고, 1952년 제2회때에는 1위 이고르 오이스트라흐(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아들)가 수상하였다. 이후는 5년마다 포즈나니에서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