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mphony No.6 in b minor Op.74 (Pathetique)
작품의 개요 및 배경 차이코프스키의 최대걸작으로 꼽히는 이곡은 자신도 "나의 일생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란 말을 했다. 불과 12일 만에 작곡된 이곡은 1893년 완성하여 자신의 지휘로 초연하였는데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청중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차이코프스키는 초연 9일 만에 콜레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곡 전체에 흐르는 절망, 우울의 감정에 의해 "비창"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곡은 그의 추모 연주회 때 재연주되어 관객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낭만주의 교향곡 중에 작품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다. 작품의 구성 및 특징 1악장 Adagio - Allegro non troppo 콘트라베이스의 공허한 화음을 배경으로 파곳이 신음하는 듯한 어두운 동기를 연주한다. 이것이 다른 악기에 계승되어 전개된 뒤, 제1주제의 주동기로 된다. 그것은 또 변주로 반복되어 나아가서는 종악장에 새로운 주제를 파생케하여 그것이 반복진행하고 또 템포나 음형을 변주하여 이 모티프로서 전 악장을 일관하게 하는 것이다. 이 주동기는 후고 리만도 지적한 바와 같이 베토벤의 "비창"소나타의 서주 주제와 같은 모티프에 의한 것으로 더군다나 "비창적"이라는 표제까지 똑같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러나 이 표제는 작곡자의 동생 모데스트 차이코프스키의 제안에 의해 초고(草稿)의 표지에 적어 넣었다 한다. 특별히 경이적인 콘트라스트를 나타내어 전 악장에 중요성을 주는 것은 제2주제(Andante D장조)로, 폭이 있고 힘차며, 애수가 있고 위무에 차 있으며, 환희에 들뜬 찬가와도 같다. 차이코프스키의 선율 중에서도 가장 애호되고 있는 것의 하나이다. 이 주제는 목관에 의한 리드미컬한 악상을 사이에 두고 반복 고양되다가 파곳의 독주로 쓸쓸하게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듯이 전개부로 들어가는데, 두 개의 주제를 중심으로 폭풍우같은 악상이 전개되고 금관악기의 요란한 포효를 섞어 소나타 형식의 전개부가 가지는 극적인 매력을 충분히 맛보게 한다. 이 격렬한 기분을 지닌 채 재현부로 들어가서 덮어씌우듯이 제1주제가 재현되어 듣는 사람을 비탄의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고 만다. 이윽고 안단테로 바뀌는데 슬프고 체념한 듯한 제2주제가 조심조심 재현되어 멋진 대조를 이룬다. 이후 종결부에서는 고조를 보임이 없이 단순한 현의 피치카토 리듬은 쓸쓸한 관(管)의 주선율을 반주하여 언제인지 모르게 조용한 종지를 한다. 제 2악장 Allegro con grazia D장조 5/4박자 5박자란 2박과 3박을 합친 불안정한 박자로서 러시아 민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악장 전체가 익살스런 왈츠같은 인상을 준다. 3부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제1부와 제3부를 구성하는 기본주제가 선율적, 율동적으로 어디까지나 러시아적인데 주목되지만, 전체적으로는 경쾌한 템포로 진행되면서도 이 익살에서 어두운 애수가 스며나와 야릇한 매력을 풍기고있다. 중간부의 악상은 감미로운 엘레지를 연상시켜 감상(感傷)을 자아낸다. 제3부가 재현한 다음에도 음력적인 고조를 보이지 않고 잠자는 듯하다. 제 3악장 Allegro molto vivace G장조 4/4박자 독특한 창의에 의한 절묘한 중간악장으로서, 제2악장과는 구성이 새롭다는 점에서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음악적으로 골자(骨字)를 이루는 것은 쾌적하기 이를데 없는 4/4박자의 행진곡주제이지만, 질풍처럼 간단없이 유동하는 경쾌한 세잇단음표의 스타카토음형이 여기에 뒤엉켜서 요정의 춤을 생각케하는 스케르쪼의 성격을 동시에 나타낸 것이다. 먼저 스케르쪼 주제는 12/8박자로서 우선 바이올린으로 연주되지만, 이윽고 분명 4/4박자 행진곡 주제의 단편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중간적인 악상을 사이에 두고 스케르쪼와 행진곡의 악상이 번갈아 나타나고 팀파니의 강타와 심벌즈의 울림속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그리고는 행진곡 주제의 단편이 겹쳐지면서 곡상은 강렬한 코다를 향해서 나아간다. 4개의 악장 중 유일하게 찬연한 종지를 하는 악장으로, 차이코프스키의 탁월한 기법이 백열적인 효과를 올리는 악장이라고 보여진다. 제 4악장 Adagio lamentoso b단조 3/4박자 차이코프스키 마지막 탄식의 노래이며 애가(哀歌)이다. "비창"의 이름에 적합할 정도로 비통한 정서를 띤 악장으로 교향곡의 종악장으로서는 드문 것이다. 그는 이 대목에 펜을 달리면서 "진혼곡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고 호소하듯, 울부짖는 아다지오의 주제는 현의 강주로 시작되는데, 제1주제는 비통한 인상을 주면서 반복되고 이윽고 투티의 fortissimo로 고조된 뒤 pianissimo로 떨어진다. 이 부분이 반복되고 음계적으로 하강하는 파곳의 독주를 거쳐 애절하기 이를 데 없는 안단테의 제2주제로 이행하고있다. 현으로 연주되는 제2주제는 큰 아치를 그리며 반복되고 화성의 두께를 나타내어 흐느끼면서 정점을 구축, 또다시 절망적으로 하강하여 사라진다. 제1주제가 엑센트를 강화해서 재현된 후, 강렬하게 고뇌하듯이 발전하고 고조된 뒤 사라지면 탐탐(징)이 공허하게 울리고 금관이 절망적인 소리를 내며 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는 제2주제가 비통하게 울리고 피치카토의 여운을 남기며 쓸쓸하게 사라진다. 작곡자의 갑작스런 최후를 암시하는 듯 비통하고 우울한 수수께끼 같은 악장이다.
지휘자 이야기 : 푸르트벵글러의 생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Wilhelm Furtwangler)는 1886년 1월 25일 베를린에서 베를린 대학 고고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아돌프 푸르트벵글러는 고고학뿐 아니라 그리스의 도자기와 동전등에 조예가 깊었으며 어린 빌헬름을 그리스나 이탈리아 여행에 동반하여 유럽의 여러 예술을 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빌헬름 또한 해외여행때 마다 그 도시의 박물관을 가장 가고 싶어했고 그리스 도자기나 대리석 조각에 많은 애착을 느꼈다한다. 그의 아버지는 빌헬름을 강인한 체력을 가질 수 있도록하는데에도 배려를 아끼지 않아서 알프스 산맥에서의 휴가철에는 수영, 승마, 요트, 테니스등을 아들에게 배우게 했다한다. 부모중 누구도 정식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그의 가족의 음악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그의 아버지 아돌프는 베를린 필의 연주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할 정도였고 어머니 아델라는 피아노에 재능이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자주 오페라나 콘서트에 참석했던 빌헬름은 이때부터 음악가로서의 꿈을 키워나간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뮌헨으로 8살때 이주한후에 그의 음악적인 재능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게된 푸르트벵글러의 부모는 그가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고 싶어하는 열정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 그의 최초의 스승은 유명한 오르가니스트이자 작곡가 조셉 라인베르거 (Josef Rheinberger)였다. 어린시절 작곡가가 되고 싶었던 푸르트벵글러는 라인베르거에게서 작곡의 기초를 배우게된다. 지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5세때 지휘자겸 작곡가 막스 폰 실링스 (Max von Schillings)의 제자가 된 후부터였다. 젊은 빌헬름은 실링스의 제자가 된 후에도 작곡공부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18세때 실링스의 천거로 뮌헨에서의 한 연주회에서 대리 지휘를 맡게된 후부터 지휘에 큰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게된다. 결국 스승의 후원으로 브레슬라우 (Breslau) 시립가극장의 보조지휘자 자리를 얻게되고 본격적인 지휘 경험을 쌓게된다. 20세가 되던 1906년에는 뮌헨의 카임관현악단을 지휘하면서 마침내 정식 지휘자로 데뷔하게 된다. 그가 택한 데뷔곡이 브루크너의 9번 교향곡이라는 점은 젊은 푸르트벵글러의 높은 도전의식을 시사해준다. 젊은 지휘자의 이름은 빠르게 알려지게 되고 뤼벡(Lubeck), 쮜리히(Zurich), 그리고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등지의 오페라 무대에서 객원지휘에 나서게되어 젊은 시절 그는 주로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경험을 많이 쌓게된다. 25세가 되던 1911년에는 아벤트로트 (Hermann Abendroth, 1883-1956)의 천거로 뤼벡 악우협회 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될 수 있었다. 그의 경력의 중요한 시발은 1915년 29세의 나이에 보단스키 (Artur Bodansky)에 이어 만하임 (Mannheim) 오페라와 만하임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차지하고부터다. 만하임에서 있은 9월의 데뷔 공연은 베버의 "마탄의 사수"로 시작되었으며 오케스트라와의 첫 콘서트에선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지휘한다. 만하임에서의 5년동안 푸르트벵글러는 지휘자로서의 주관을 확립해가면서 비로서 확고한 명성을 쌓기 시작한다. 1918년부터 2년간 빈의 톤퀸스틀러 (Tonkunstler) 오케스트라에서 정기적으로 지휘를 하기도 한다. 1919년 만하임을 떠날즈음에는 그의 지휘자로서의 명성은 급속히 높아져서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지휘자 자리를 맡게되고 이듬해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이어 상임 지휘자 자리에 오르게된다. 베를린 필과는 이미 1917년말에 처음 객원지휘한 적이있었는데 5년후인 1922년 1월 23일에 당시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였던 전설적인 니키쉬 (Artur Nikisch)가 죽게되자 푸르트벵글러는 이 거장의 서거를 추모하는 그해 2월 9일의 연주회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과 브람스의 "4개의 엄숙한 노래"를 베를린 필과 연주하게 된다. 이 공연은 너무도 성공적이어서 곧 베를린 필은 만장일치로 후임 지휘자에 푸르트벵글러를 임명하게 된다. 곧 니키쉬의 유언에 따라 니키쉬가 맡고 있던 또하나의 오케스트라인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자리도 푸르트벵글러가 맡게된다. 그의 나이 36세때였다. 독일내의 가장 중요한 두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된 푸르트벵글러는 이후 그의 명성이 전 유럽과 미국에 까지 널리 알려지게된다. 1924년 5월의 결혼이후에 이탈리아에서의 데뷔 콘서트는 그의 신혼여행을 겸하게 되었고 같은해 런던에서도 로얄 필하모닉과의 성공적인 데뷔이후 자주 런던으로 초청받게 된다. 이듬해 1월 3일에는 미국 데뷔 콘서트를 뉴욕 카네기 홀에서 갖게되는데 이날의 마지막 프로그램 브람스 교향곡 1번은 청중들뿐만 아니라 단원들까지 감동시켜 뉴욕 필의 상임이 되어달라는 제안을 받기도 한다. 드디어 1927년에는 빈 필의 상임지휘자가 됨으로써 유럽 최고의 오케스트들의 상임자리에 앉게된다. 1928년에는 바그너의 "라인골드"로 빈 국립가극장에도 데뷔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빈 국립가극장의 상임 지휘자가 되어 줄 것을 제안받은 푸르트벵글러는 정중하게 이를 거절한다. 같은 해에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1930년엔 빈 필의 상임자리도 내놓는다. 이는 그가 비록 베를린과 빈을 오가는 기차여행의 고요한 평화속에서 악보를 볼 수 있었던 것을 즐겼음에도 하나의 오케스트라에 그의 정력과 시간을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데, 물론 그가 선택한 오케스트라는 자신의 이상을 가장 반영해줄 수 있는 베를린 필이었다. 1931년에는 바이로이트 무대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면서 최초로 서게되며 1933년에는 바이로이트 음악축제의 총감독이된다. 그러나 그의 이런 성공가도에는 바로 그해 히틀러의 나찌가 독일을 통치하게 되면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당시 많은 유태계 음악가들이 독일로부터 추방되자 이를 용납할 수 없는 야만적인 행위임을 안 푸르트벵글러는 모든 자리를 사임하고 오직 베를린 필의 연주에만 임한다. 그는 베를린 필내의 유태계 혈통을 지닌 단원들을 보호하는데 최선을 다했으며 그의 이런 노력은 약간의 효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예술가가 정치가를 당할 수는 없었다. 푸르트벵글러는 순수 아리아인이었기에 히틀러는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1933년 7월에 프로이센 추밀원 고문으로 임명해버린다. 그가 카라얀과 달리 나찌 당원이 아니었음에도 종전후 전범으로 몰리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당시 그는 미국등지로 망명하여 안전하면서도 화려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으나 독일민족에 대한 애국심 때문에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로서 정치와 무관하게 음악가로서 독일에 남아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찌하에 있는 독일보다 베토벤의 음악이 더 절실하게 필요한 곳이 어디있는가?"라는 그의 말이 이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1934년에 그의 인생과 예술을 크게 굴절시키게되는 '힌데미트 사건'이 발생한다. 푸르트벵글러는 힌데미트 (Paul Hindemith)의 신작 오페라 "화가 마티스"의 초연을 베를린 국립가극장에 올리겠다고 발표한다. 힌데미트는 유태인은 아니었지만 유태인들과 공연을 많이 했으며 유태인 아내를 두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도 1524년에 있은 교회의 억압과 폭정에 들고 일어나는 농민들의 얘기를 다루고 있는 오페라의 줄거리 때문에 공연을 금지한다고 푸르트벵글러에게 통보해온다. 오페라의 메세지가 당시의 나찌 정부가 보기엔 너무 선동적이었던 것이다. 이에 푸르트벵글러는 음악적인 면에서는 자신만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노라고 강하게 맞선다. 이 와중에 "화가 마티스"의 교향곡 버젼의 초연을 1934년 5월 12일 베를린 필과 함께 초연하게 된다. 이날 관중들은 나찌에 대한 반발감을 표출해내기라도 하듯 지휘자에게 열광적인 환호를 보낸다. 그러나 이 사실은 곧 나찌 정부에 알려지고 어떠한 경우에도 오페라 공연은 불가능하다는 방침이 더욱 확고해진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1934년 11월 25일자 "Deutsche Allgemeine Zeitung"지에 기고한 글에서 정치가 예술을 간섭해서는 안된다며 자신의 심정을 자유롭게 피력하고 힌데미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게 된다. 이 글은 이내 전 베를린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그날 밤 푸르트벵글러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기 위해 베를린 국립가극장에 등장하자 관객들은 열광적으로 그를 환영한다. 이 소식은 곧 히틀러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히틀러의 특별지시로 힌데미트의 오페라는 금지되게 되고 힌데미트는 국립음악학교장의 지위를 버리고 망명해버린다. 푸르트벵글러는 이에 항의하고자 모든 공직에 사임하는 강수를 두는데 그의 예상과는 달리 사임이 받아들여진 것 뿐만 아니라 출국금지조치까지 내려진다. 결국 이듬해 4월에 이르러서는 푸르트벵글러가 나찌에 굴복했다는 기사가 서방세계에 알려진다. 5월달이 되어서는 다시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 자리에 앉게 되고 히틀러와 나찌의 우두머리들의 열광적인 환호앞에서 복귀연주회를 갖는다. 1936년 1월 빈 필과 갖은 부다페스트에서의 공연에서는 나찌에 완벽하게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유태인 작곡가 멘델스죤의 곡을 지휘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집트의 카이로에 휴가를 보내고 있던 중 뉴욕 필은 토스카니니를 이어 푸르트벵글러를 상임으로 초청할 움직임을 보인다. 뉴욕 타임즈는 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 사실을 보도해버린고 이에 질새라 히틀러 정권은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상임으로 다시 임명했노라고 발표한다. 나일강변에서 이 소식들을 전해들은 푸르트벵글러는 정치적 흥정에 말려들고 싶지 않기에 정치와 음악이 분리될 때까지 뉴욕 필의 지휘를 미룰 수 밖에 없노라고 전보를 친다. 결국 1936년에는 베를린 국립가극장과 바이로이트 축제의 음악감독직도 다시 맡게된다. 푸르트벵글러가 나찌에 굴복했다는 소식은 곧 전 세계에 알려진다. 그 자신은 나찌에 협력할 의사가 없었으나 정치는 그를 철저히 이용하여 선전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1937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서 만난 토스카니니에게서 그가 지휘한 베토벤 9번는 마치 나찌의 횡포와 같이 강한 리듬과 힘의 과시에 불과하다는 강한 비판의 말을 들어야만 했다. 1942년 2차 세계대전 와중에는 베를린에서 히틀러 탄생축하 연주를 지휘해야만 했으며 1945년까지 그는 전황속에서도 베를린 필과의 연주를 계속하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해 1월 22일 연주회 도중 연합국의 공습으로 연주는 중단되고 그는 곧 빈으로 갔다가 스위스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패전에 임박한 나찌의 비밀경찰은 그의 목숨까지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해 5월 7일 베를린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의 점령하에 분할통치된다. 이때 전쟁중에 녹음된 그의 귀중한 연주들은 소련군에 의해 소련으로 건너갔다가 1991년에야 다시 정식으로 독일로 반환된다. 종전후 푸르트벵글러는 전범으로 몰리게된다. 그러나 유태인 음악가들의 구명운동에 힘썼던 그의 노력을 증언해주는 사람들 덕에 1947년 1월 무죄판결을 받고 다시 연주해도 좋다는 연합군의 허가를 받는다. 결국 그해 5월 26일-29일 3일간 미군이 후원하는 베를린 필의 복귀연주회는 베를린 필의 필 하모니홀은 폭격으로 파괴되버렸기 때문에 티타니아 궁에서 열린다. 여기서 그는 북받치는 열정을 베토벤의 교향곡 5번에 실어 지휘한다. 몇달 사이에 베를린 필과 함께 다양한 연주 스케줄을 가지고 본격적인 지휘활동에 나선다. 또한 새로 재개된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의 감독을 맡게된다. 재정적자를 메꾸기 위해 스위스, 스웨덴, 오스트리아, 영국 등지를 돌며 해외원정연주를 활발히 가졌는데 이탈리아의 스칼라좌에서까지 오페라를 지휘하기에 이른다. 1948년에는 시카고 심포니가 음악감독으로 그를 초대하지만 미국내에서는 독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시카고 시민들의 반대에 부딧치게 된다. 푸르트벵글러 스스로도 베를린 필에 대한 애정 때문에 정중히 이를 거절한다. 1951년 바이로이트 축제가 다시 재개된다. 푸르트벵글러가 그 개막 공연에서 지휘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의 연주는 아직까지도 불후의 명연으로 기억되고 있다. 푸르트벵글러는 종전후 첼리비다케에 넘겨 주었던 베를린 필의 상임자리에 1952년 베를린 필 창립 70주년 되는 해에 다시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66세의 푸르트벵글러는 점점 몸이 세약해져가고 있었다. 폐렴이 도져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고 항생제의 남용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갈수록 몸이 수척해져만 갔던 것이다. 1953년에는 빈 필과의 연주중 실신상태에 이르러 잠시 연주활동을 중단해야만 하기도 했다. 결국 1954년 9월 19일 베토벤의 교향곡 1번과 자작 교향곡 2번의 연주를 끝으로 더 이상 지휘대에 설 수 없었다. 푸르트벵글러는 요양을 위해 바덴바덴으로 옮겨 갔으나 결국 1954년 11월 30일 68세의 이른 나이에 운명한다.
연주단 이야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꼽히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 Philharmonic Orchestra)는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민주적인 자치제도로 운영되고 있어서 지금도 상임 지휘자, 오케스트라 매니저, 오케스트라 단원을 모두 단원들의 투표에 의해 선정한다. 선정된 단원은 1년간의 수습 기간을 거친 뒤에 정단원이 되며, 10년간 일한 단원은 연금 혜택을 받는다. 베를린 필은 1년에 약 100회의 콘서트를 하는데 외국 연주도 많이 한다. 운영은 콘서트 티켓 판매, 음반 녹음, 방송 등을 통해 얻는 수입으로 충당한다. 현재 총 114명의 멤버로 구성된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 속에 작은 단위로 활동하는 악단이 포함되어 있다. 2002년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에서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연주하여 화제가 된 '12 필하모닉 첼리스트'(Twelve Philharmonic Cellists)를 비롯하여 브란디스 쿼텟(Brandis String Quartet), 웨스트팔리안 쿼텟(Westphalian String Quartet), 필하모닉 옥텟(Philharmonic Octet) 등도 들어있다. 또 몇 멤버들은 빈 필하모닉의 멤버들과 비정기적으로 빈-베를린 앙상블을 만들어 활동한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1862년 벤야민 빌제(Benjamin Bilse)가 만든 빌제의 악단(Bilsesche Kapelle)이 그 시작이다. 처음 50명으로 구성된 이 악단은 대단한 인기 속에서 20년간 약 3천 번의 콘서트를 했으나 재정 문제와 지도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882년 폴란드 공연을 하면서 단원들은 빌제에게 불만이 커졌다. 기차 좌석은 약속했던 3등칸이 아니라 4등칸이었고 보수도 깎였다.이에 대해 단원들은 계약 만기일이던 4월 30일 전까지 보상할 것을 요구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45명의 단원이 빌제에게서 떨어져 나와 5월 1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er Philharmonisches Orchester)라는 새로운 이름의 자치단체를 결성하였고 당시 루빈스타인과 한스 폰 뷜로우를 데리고 흥행하던 에이전트 헤르만 볼프(Hermann Wolff)에게 찾아가서 '몸을 맡기고' 1882년 9월 17일 바그너의 '마이스터징어' 서곡으로 첫 연주를 시작했다. 당시는 음악회에서 가벼운 식사를 주는 것이 관례였고 관객들은 식사하면서 연주를 감상했다. 그러나 베를린 필은 식사를 주지않았다. '음악에 집중하라'는 표어를 내걸었지만 실제는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헤르만 볼프가 재정과 운영을 맡기는 했으나 초기에는 그만큼 어려움이 많았다. 순회공연을 갔던 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악기가 모두 타버리기도 했고 수입도 형편없었다. 그 시기에 지휘를 맡았던 루드비히 폰 브레너(Ludwig von Brenner)는 힘들게 이 단체를 음악적으로 통합하였다. 그러나 베를린 필의 본 모습이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진짜 베를린 필의 시작은 초대 상임 지휘자로 꼽히는 한스 폰 뷜로우(Hans von Bulow) 부터다. 뷜로우는 재능있는 피아니스트로 리스트에게 인정 받았으며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미국에서 초연했다. 그러나 스승이자 대선배인 바그너를 만나면서 피아노를 떠나 지휘자라는 '딴 길'을 걷게 됐다. 결국 그는 바그너 작품의 지휘를 하게 됐지만 그 대신 바그너에게 부인 코지마(Cosima)를 뺏겼다. 그런 상태로 뮌헨을 떠난 뒤의 뷜로우는 마이닝겐 궁정극장의 음악감독을 맡은 채 가끔 유럽과 미국까지 다니면서 오직 음악에만 정열을 쏟았다. 마침 그의 에이전트를 하던 볼프는 손에 들어온 베를린 필의 전권을 뷜로우에게 맡겼고 두 사람은 배짱 좋게 고집스런 음악을 시작했다. 당시 독일에서 가장 혁신적으로 꼽히던 '혁명 지휘자' 뷜로우는 1887년 상임 지휘자가 된 후 5년간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작품을 택하여 음악의 수준을 최고로 올려놓았다. 뷜로우는 협주곡을 포함한 모든 '달콤한 음악'은 과감히 내던지고 모차르트와 베토벤에서 현대에 이르는 교향곡만 연주했다. 보통 하루 저녁에 교향곡 세 편을 연주했는데, 한 번은 베토벤 9번 연주에 대해 관객 반응이 시원치 않다고 '객석의 출입문을 다 잠그고' 다시 한 번 연주한 적도 있었다. 뷜로우는 그는 당시 브람스, 그리그 등과 교류하며 차이코프스키, 말러, 리하르트 쉬트라우스 등을 객원 지휘자로 초대하여 (원래 롤러 스케이트장을 개조하여 만든)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회장을 진정한 예술의 전당으로 바꾸었다. 1892년 뷜로우가 건강이 나빠 은퇴하고 2년 뒤 사망했을 때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의 장례식에서 연주했다. 한스 폰 뷜로우가 떠난 뒤, 헤르만 볼프는 그 후 7년간 한스 리히터(Hans Richter), 리하르트 쉬트라우스(Richard Strauss) 등 여러 유명 지휘자들을 초대하더니 1895년에야 헝가리 출신의 아르투르 니키쉬(Arthur Nikisch)를 상임 지휘자로 선정했다. 성격도 차분하고 지휘봉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 '조용한 지휘자' 니키쉬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낭만주의 작품들을 연주하며 그 서정성을 잘 표현하여 명성을 더욱 높였고 레퍼토리도 넓혔다. 브루크너, 차이코프스키, 베를리오즈, 리스트 등과 교류하면서 당시로는 혁신적이던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와 말러의 작품도 연주했다. 초대한 독주자 중에는 부소니(Ferruccio Busoni), 바카우스(Wilhelm Backhaus), 카잘스(Pablo Casals), 하이페츠(Jascha Heifetz) 등도 있다. 니키쉬는 27년간이나 베를린 필을 이끌다가 1922년 사망했다. 니키쉬가 사망한 1922년 그 뒤를 이어 지휘봉을 받게 된 것은 베를린 출신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 ngler)였다. '불같은 열정의 지휘자' 푸르트벵글러는 니키쉬의 전통을 따라 낭만주의 작품들에 주력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제 1차 세계대전과 바이마르 시대, 음악적으로는 후기낭만파와 아방가르드의 갈등 시대를 넘어갔다. 푸르트벵글러는 주로 베토벤, 브람스, 슈베르트,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의 작품들을 연주했으며 특히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의 독특한 해석은 큰 찬사를 받았다. 그리면서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에프, 쇤베르크의 작품에도 정성을 들였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베를린 필은 많은 순회 연주를 했고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오스카 프리트(Oskar Fried),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 같은 지휘자들을 초대하였다. 뛰어난 솔로이스트 초대도 아주 활발하여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도 협연했고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은 12살에 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하며 음악계에 데뷔하였다. 1929년부터 시작된 경제공황이 세계를 휩쓸던 어려운 시기에 베를린 필하모닉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베를린 시, 독일 정부, 베를린 라디오 방송국의 후원 덕분이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푸르트벵글러는 공개적으로 힌데미트를 두둔하여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Goebbels)와 마찰을 빚었고 그 결과 상임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1935년 다시 지휘대에 서게 된 것은 정치와의 싸움에서 예술이 승리한 사례로 꼽힌다. 베를린 필의 더 어려운 시련은 1944년부터 찾아왔다. 1월의 폭격으로 연주회장이 파괴된 상태에서도 베를린 필하모닉은 다른 장소를 빌려서 연주를 계속했다. 베를린이 함락된 것은 1945년 4월 말이었는데 베를린 필하모닉은 나치 치하의 4월에도 연주회를 했고 연합군 치하의 5월에도 연주회를 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단원들을 모아 두 음악회의 지휘를 맡았던 것은 모스크바에서 출생한 독일인 레오 보샤르트(Leo Borchard)로 알려졌다. 1945년 푸르트벵글러가 나치동조 죄로 억류되자 5월에 보샤르트가 상임지휘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8월 23일 베를린의 한 검문소에서 운전사가 정지 신호를 무시하는 바람에 미군 병사의 총격을 받아 보샤르트는 사망하였다. 푸르트벵글러가 구금되고 보샤르트가 죽자 다음 지휘자로 선정된 것은 루마니아 출신의 33세 청년 세르기우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였다. 이때 첼리비다케와 함께 물망에 올랐던 것이 바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이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을 무척 견제했으며 그 때문에 첼리비다케를 선호했다고 한다. 울름과 아헨의 오페라하우스를 거쳐 빈 필, 암스테르담 콘체르트헤보, 베를린 국립 오케스트라 등을 지휘하며 무섭게 성장한 신예 카라얀이 자신과 동등하게 취급되는 것을 푸르트벵글러는 참을 수 없는 자존심의 상처로 받아들인 것이다. 카라얀을 제치고 지휘봉을 잡은 '괴팍한 지휘자' 첼리비다케는 히틀러 시대에 단절되었던 외국 음악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그동안 금지되었던 현대작품들을 많이 연주하여 찬사를 받았으며 외국 순회연주도 시작했다. 1947년 푸르트벵글러가 석방된 뒤로 두 사람은 함께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했다. 그런데 첼리비다케는 중요한 수입원인 녹음을 못하도록 거부했고 또 폭군적이고 완벽주의 성향으로 단원들에게 복종을 요구했으며 맘에 들지 않는 단원에게 폭언도 서슴치 않아서 단원들로부터 신임을 잃었다고 한다. 1954년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자, 첼리비다케의 놀라운 지휘 능력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은 1955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을 상임지휘자로 선정했다. 빈과 런던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얻은 카라얀의 명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음반 녹음에 대해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폴 로빈슨이 쓴 카라얀 전기를 보면 1955년 베를린 필 단원들은 미국 순회연주를 위한 지휘자로 카라얀을 최우선으로 뽑았다고 한다. 그러자 카라얀은 이를 수락하면서 '그 대신 나를 종신 상임 지휘자로 선발해 달라'고 조건을 달았다는 것이다. 그런 거래(?)에 의해 순회연주를 다녀 온 뒤 카라얀은 정식으로 상임 지휘자가 됐다고 한다. '황제 지휘자' 카라얀의 길고 화려한 재임기간 중 베를린 필하모닉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작품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주요 20세기 작품들을 빠트리지 않았고 매 시즌 중 다섯 번의 콘서트는 20세기 작품으로 연주하며 10여 편의 현대 작품들을 초연하였다. 카라얀과 함께 순회공연과 음반을 녹음하면서 베를린 필하모닉은 세계적 명성과 베를린 필하모니커(Berliner Philharmoniker)라는 애칭도 얻었다. 새 연주회장도 지었다. 1963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에 세워진 켐퍼플라츠의 필하모닉 홀(Philharmonie on Kemperplatz)은 건축가 한스 샤로운(Hans Scharoun)이 디자인한 것으로 좌석 2천 석에 인상적인 슈케(Schuke) 오르간까지 설치되었으며 1987년에는 챔버 뮤직홀이 증축되었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82년 여성 클라리넷 주자 자비네 마이어 사건 때문이다. 카라얀은 최초로 이 여성 주자를 정식 단원으로 뽑자고 했으나 보수성향이 강한 단원들은 이에 반발하였다. 화가 난 카라얀은 '종신 상임 지휘자의 역할을 수행하되 녹음을 비롯한 수익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1년간의 수습으로 자비네 마이어를 활용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지만 카라얀과 단원들 사이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35년 가까이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끈 카라얀이 1989년 지휘대에서 내려와 세상을 떠나자 지휘봉은 그 해에 이탈리아 출신의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로 넘어갔다. 아바도는 전통적인 고전 낭만 작품들과 함께 20세기 작품을 더 많이 연주하였고 '파우스트', '고대 그리스 드라마', '셰익스피어' 등 주제가 있는 콘서트를 시작했으며 처음으로 오페라도 콘서트에 포함시켰다. 아바도 시기에 유럽의 클래식 유행 중 하나는 원전악기와 정격연주였다. 이것은 통상적인 연주에서 벗어나 작곡가의 의도와 작품 자체에 더욱 접근하려는 시도였다. 이런 움직임은 아바도에게 영향을 주었고 베를린 필은 작품에 대해 더 세밀하게 분석하고 그에 맞는 연주법을 찾아내어야 했다. 12년을 이끈 아바도에 이어 2002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봉을 잡도록 선정된 것은 영국 출신의 사이먼 래틀 경(Sir Simon Rattle)이다. 오케스트라를 철저히 통제하여 좀 더 세밀한 음악을 표현한다는 사이먼 래틀이 120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베를린 필하모닉과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떤 음악을 들려줄 지는 세계의 모든 음악 팬들이 궁금하게 기다리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