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1942년~)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

조강지처 버린 ‘주홍글씨’ 폄훼당한 ‘전인적 음악성’

사람들은 그를 미워했다.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조강지처를 버린, 인정머리 없는 이기주의자라고 여겼다.

이 ‘비호감’의 강도는 한국에서 특히 셌다. 그의 연주와 지휘는 실제보다 격하되기 일쑤였고 음반도 도통 팔리지 않았다. 좋아하는 피아니스트가 누구냐는 질문에,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적어도 한 10년 전까지는 그랬다.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 얘기다.
바렌보임과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의 결혼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음악 커플의 탄생이었다. 바렌보임이 26세, 뒤 프레가 22세였던 1968년의 일이었다.

옥스퍼드대학 교수였던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뒤 프레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키 작은 유대인’ 바렌보임과 결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뒤 프레가 결혼을 위해 종교까지 유대교로 바꿨던 것은 유명한 얘기다.
하지만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뒤 프레에게 닥쳐온 불행의 그림자. 그녀는 첼로를 켜다 자주 템포를 놓쳤으며, 나중에는 눈이 침침해지면서 악보마저 보이지 않았다. ‘다발성 근육경화증’이라는 희귀한 병. 그렇게 온몸의 근육과 신경이 점점 굳어가던 그녀는 결국 73년 무대에서 내려왔고 87년 눈을 감았다. 42년의 짧은 생애였다.

빼어난 연주력에 아름다운 외모, 게다가 사랑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알았던 순정한 여인.
이런 ‘훌륭한’ 아내를 돌보지 않은 ‘싸가지 없는’ 남자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뒤 프레가 세상을 떠난 후, 바렌보임을 언제나 따라다녔던 이 주홍글씨는 그의 연주에 대한 폄훼로까지 이어졌다.

사람들은 음악가로 승승장구하던 그를 미워했으며, 그의 음악을 들으며 정서적으로 불편해했다.
게다가 바렌보임은 “나는 하루 2시간 이상 피아노 연습을 하지 않는다. 그 이상은 내게 필요치 않다”고 공공연히 발언함으로써, ‘잘난 척하는 인간’이라는 낙인까지 찍혔다.

그렇게 ‘감정적 공분’을 샀던 바렌보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였다.
그 결정적 계기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사상가 에드워드 사이드와의 만남이었고, 두 사람이 5년간 나눈 대화의 주요 부분을 간추린 <평행과 역설>이야말로 바렌보임의 이미지를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꾼 전환점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바렌보임이 <평행과 역설>에서 보여줬던 모습에 ‘충격’을 받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음악은 아름다워요”라는 단순 어휘를 앵무새처럼 되뇌는 지휘자, “저는 바이올린이 전공이기 때문에 피아노 음악은 몰라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연주자…. 그렇게 자기 분야에만 충실한 ‘전문가’들이 즐비한 땅에서 정치와 사회, 음악과 문화를 종횡무진 오가는 바렌보임의 ‘식견’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 아닐까.

바렌보임은 어떤 음악가인가? 파리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와 시카고심포니의 음악감독을 역임했으며, 2000년에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종신지휘자 자리에 오른 세계적 지휘자. 모차르트, 베토벤, 멘델스존, 쇼팽 등 방대한 레퍼토리를 가진 천재형 피아니스트. 게다가 그는 피아졸라의 탱고를 맛깔스레 연주해내는 크로스오버 연주자이기도 하다.
그뿐일까?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평행과 역설>, <음악 속의 삶> 등을 통해 정치와 문화의 관계를 통찰해온 평론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의무를 전혀 이행하지 않는다”고 항의하면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분쟁지역을 찾아가 베토벤을 연주하는 지식인이다.

그래서 그에게 ‘전인적’(全人的)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본다. 전인적 음악가 바렌보임. ‘전문화’라는 구호 아래 정치와 경제는 갈수록 막강해지고 개인의 능력과 시야는 점점 협소해지는 세상. 그렇게 인간의 삶이 갈수록 왜소해지는 21세기에, 이 얼마나 특별하면서도 빛나는 존재인가.

글 : 문학수 선임기자(경향신문)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참마음 참 이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