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1942년~)

현재 다니엘 바렌보임은 지휘자로서 정상의 위치에 서있다. 그가 피아니스트 시절 녹음 했던 음반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이 '무언가'로 LP 시절부터 명반으로 이름이 드높았다.

연주의 특성은 싱그럽게 물 흐르듯 연주하는 달변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산만하거나 답답하지도 않다. 곡 전체의 조망을 미리 한 후에 다시 세부의 표현에 신경 쓰는 바렌보임의 스타일은 푸르트뱅글러를 본받으려는 고민하는 지휘자의 자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악보만 보고 흉내 내려는 테크니션이었다면 지금의 지휘자 바렌보임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발랄하게 노래하는 오른 손에 신중하게 반주하는 왼손이 결합되어 최적의 연주를 선보이는 것은 바렌보임만의 매력이다. 유명한 '봄의 노래'를 비롯해서 '뱃노래' 등 전곡에 작곡가와의 깊은 공감을 시적 서정성으로 승화시킨 깊은 피아니즘이 서려있다.
세계의 名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

다니엘 바렌보임은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라는 두가지 역할을 극히 성공적으로 수행한 몇 안돼는 인물이다.
그만큼 그는 다재다능한 음악인인 것이다. 지휘자로서 그는 기본적으로 푸르트벵글러를 정신적인 스승으로 삼고 있다. 바렌보임의 음악적 자세는 낭만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비록 초기에는 지휘자로서 약간 산만한 듯한 인상을 주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해결되었다. 자신이 이끌던 파리 관현악단에서 그는 지휘자로서의 자질을 대폭 업그레이드시키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사카고 교향악단과 녹음한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5번’이나 베를리오즈의 ‘로미오와 줄리엣’ 등은 지휘자로서의 바렌보임의 진모를 보여주는 대표 명연들이다.

그는 파리 관현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있으면서 특히 프랑스 작곡가들의 작품에 많은 신경을 썼다. 특히 그 중에서도 베를리오즈와 프랑크, 생상스 등은 여타 대 지휘자들의 그것과 비교할 때 결코 부끄럽지 않은 우수한 지휘솜씨를 보인다.

지휘 뿐 아니라 피아니스트로서 그는 모차르트, 베토벤, 멘델스존, 슈베르트, 슈만 등과 같은 고전과 낭만주의 작품에 특히 솜씨를 보인 바 있다. 어릴때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은 1942년 11월 15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피아니스트인 뿌리있는 음악가정에서 자란 그는 그 때문에 어릴때부터 소위 ‘영재교육’을 받으며 재능을 키워갔다.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계열의 실력있는 피아니스트였는데, 어린 바렌보임은 아버지로부터 피아노 테크닉 전반을 익혀 겨우 7살 무렵에는 베토벤 프로그램으로 독주회를 열어 천재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유대인이었던 바렌보임 일가는 1952년에 이스라엘에 이주하였다. 하지만 바렌보임은 음악공부를 위해 10세 때 이스라엘 재단의 장학금으로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음악원에 입학해 서구 문명 전반과 패턴을 익히며 대 피아니스트에로의 꿈을 하나한 실현시켜갔다.

그는 여기서 저 유명한 명 피아니스트 에드윈 피셔로부터 피아노를 배우는 한편, 당대의 지휘자인 이고르 마르케비치로부턴 지휘법을 배웠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호기심이 너무 왕성했던 나머지 바렌보임은 실내악에까지 손을 대 첼리스트인 엔리코 마이나르디로부터 체임버 뮤직 관련 공부를 하며 전방위적인 연주자이자 아티스트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아갔다. 이즈음 그는 거장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에게 인정 받아 솔리스트로서 기용되어 주변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1954년 파리로 유학해 교수법의 일인자로 정평 높은 나디아 불랑제 휘하에 가 더욱 깊은 음악수업을 받았다. 1년후에는 로마 성 체칠리아 음악원에 입학해 카를로 체키의 밑에서 피아노와 지휘법을 공부하기도 했다.

1957년 1월 드디어 그는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는 ‘심포니 오브 디 에어’와의 협연을 통해 피아니스트로서 정식으로 미국 데뷔를 했다. 이날의 연주는 공연장을 찾은 음악 관계자 및 많은 사람들에게 차세대를 이끌 천재 피아니스트의 출현을 알리는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바렌보임은 막힘이 없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임에도 지휘자에 대한 욕구도 대단해 피아노와는 별개로 지휘봉을 잡는 쪽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처음으로 지휘를 시작한 것은 1962년경부터이다. 그리곤 1965년 오랫동안 친분을 다져온 영국 실내관현악단을 대동하고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지휘하며 지휘자로서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이후 그는 약 10년 동안 객원 형태로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지휘자로서 고전파의 교향곡과 근대, 현대의 작품 등 가리지 않고 폭넓은 레파토리를 소화해 내 주목을 끌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그는 미국과 유럽의 메이저 오케스트라로부터도 종종 객원 지휘를 위촉받기 시작했다.

1967년과 1968년의 이스라엘 필하모닉과 런던 교향악단 그리고 베를린 필하모닉 지휘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1971년 1월에는 뉴욕 필하모닉까지 지휘하며 피아니스트로서 뿐만 아니라 지휘자로서도 확고하게 그 위상을 굳히기에 이른다. 이후에도 그는 시카고 교향악단, LA 필하모니, 런던 필하모닉 등 여러 악단을 객원 지휘하며 지휘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바렌보임은 1975년 6월 파리 관현악단의 4대 음악감독으로 취임해 드디어 자신만의 오케스트라를 이끌 수 있게 되었다. 샤를르 뮌슈,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게오르그 솔티 등 명 지휘자들이 거쳐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이니만큼 바렌보임은 이 악단의 지휘봉을 잡음으로써 드디어 유능한 지휘자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고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성공적으로 잡은 전례없는 음악인 중의 하나로 기록되게 되었다.

바렌보임은 취임하자마자 팔방미인적인 자신의 스타일 만큼이나 파리 관현악단의 활동 범위를 크게 넓히기에 이른다.
그는 이 악단의 단원을 중심으로 한 실내 오케스트라를 조직하고 또 전속 합창단까지 창설하는 등, 그간 이 악단의 일상적인 활동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었다.

1989년에는 프랑스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할 예정이었으나 당국과의 의견 차이로 결국 그것은 성사되지 않아 아쉬움을 주기도 했다.
글 출처 : changg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