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ano Sonata in f# minor No.1 Op. 11
작품의 개요 및 배경 슈만 피아노 소나타 1번의 초판에는 ‘플로레스탄과 오이비제우스로부터 클라라에게 헌정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슈만이 플로레스탄과 오이비제우스라는 두 종류의 필명을 사용하여 발표하였으며, 클라라에게 헌정하였다. 슈만은 클라라에게 쓴 편지에서 이 소나타에 대해 ‘당신에 대한 단 하나의 마음의 외침’이라고 적은 일이 있으며, 에르네스티너 폰 프리켄과의 연애를 정리하고 클라라에게 한결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된 시기에 작곡된 소나타이다. 피아노 소나타 1번은 정신적으로는 물론, 기교상으로도 쉬운 곡은 아니라 생각된다. 슈만곡의 매력은 양면성이라 생각한다. 한편에서는 몰아치는 듯하고 외향적이지만, 다른 쪽에서는 여유로우면 내성적인 부분이 함께한다. 또한 이런 양면성은 이분화 되어 존재한다기 보다는 미묘하게 섞여 있기 때문에 다채로운 감정과 그 감정의 양극단 사이의 스펙트럼을 어떻게 표현하는가가 중요하다. 표현의 다채로움은 흔히 이야기 되는 Schumann곡들의 구조적인 약점 때문에 때때로 산만하고 두서 없는 결과로 귀결되기도 한다. 전악장을 꿰뚫는 구조적 통찰력과 한음 한음을 쌓아가는 구축력과 목표의식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구조적 해석력이 세번째 평가항목으로 특히 4악장의 구조를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가는 성패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슈만의 곡은 때때로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어 낸다. 이를 위해서는 속도와 집중력이 이완되는 순간에 멜로디가 얼마나 노래하는 듯한지, 그리고 한음 한음이 얼마나 정성을 들려 만들어지고 아름답게 울리는지가 평가 항목이 될 수 있다. 작품의 구성 및 특징 1악장 Introduzione : Un poco Adagio - Allegro vivace 이 악장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시작 부분이다. 일단 시작을 얼마나 설득력있게 시작하는가, 그리고 주제의 제시까지 서주에서 미묘한 감정 변화를 통해 이후의 격정을 예고하는가가 중요하다. 이어서 각각의 주제의 제시와 그 방법이 향후 전개되는 내용과 연계되는 타당성이 중요한데, 이때 allegro vivace의 주제가 얼마나 단호하고 자신감 있게 연주되었는가는 이후의 연주를 판가름 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개인적으로 연주의 스타일로는 치열한 구축력의 추구보다는 중간 중간의 이완부에서 여백의 미를 얼마나 발휘하는가에 따라 전반적인 설득력이 좌우된다 생각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유로움 속에 완급을 조절하는 템포설정을 선호한다. 제 2악장 Aria 반주가 얼마나 탄탄한 느낌을 주는지, 반주와 교차되는 멜로디가 얼마나 노래하는 듯한지, 그리고 그 멜로디를 연주하는 피아노의 음색이 떨리는 듯한 느낌을 (바이올린도 아니지만 떨려야 한다!) 갖고 가슴시리게 울리는지가 중요 포인트다. 제 3악장 Scherzo e Intermezzo: Allegrissimo A-B-A 구조로된 스케르쪼에서는 리듬감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A섹션의 스케르쪼 주제를 얼마나 가볍고 쾌활하게 연주했는가, 그리고 트리오 부분에서 거의 폴로네이즈를 연상시키는 주제를 리듬감 있고 맛깔스러운 연주로 표현했는가가 중요하다. 여기에 Ad Libitum 부분을 약간은 고풍스럽게 연주할수록 개인적으로는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제 4악장 Finale. Allegro un poco maestoso 솔직히 연주 스타일에 따라서는 4악장의 멜로디 라인을 따라가는 것 조차도 힘든 경우가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주선율을 부각시켜 전체적인 통일성을 기하는 연주에 호감이 간다. 이런 점에서 감정의 진폭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 보다는 적절한 한계 내에서 중간 중간의 다양한 팔레트를 보여주는 연주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4악장의 전반적 분위기가 어두운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중간에 부드러운 멜로디가 잘 살아날수록 극명한 대비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처리를 했는가가 하나의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
연주자 이야기 : 에밀 길렐스 (Emil Gilels - piano)
1916년, 에밀 길렐스는 우크라이나 지방 오데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모두 음악가였으며 음악적 분위기의 가정에서 6살부터 야콥 트카흐(yakob Tkach)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3세가 되던 1929년에는 최초의 공개 리사이틀을 가졌다. 1930년, 길렐스는 오데사 음악원에 입학하여 베르타 라인크발트(Berta Reingbald)교수에게 사사하였다. 라인크발트 교수와의 수업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길렐스는 우크라이나의 피아노 경연대회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게되는데 특히, 17세가 되던 1933년에는 전 소련 음악콩쿠르에서 우승을 하였다. 1935년, 오데사 음악원 졸업과 함께 모스크바로 거처를 옮겨 전설적인 피아노 교사인 하인리히 노이하우스(Heinrich Neuhaus)의 문하에서 1937년까지 피아노 공부를 하였다. 그 이듬해, 1936년에는 브뤼셀에서 이자이 국제 콩쿠르에서 아르투로 베네디티 미켈란젤리(Arturo Benedetti Michelangeli)와 모라 림파니(Moura Lympany)같은 피아니스트들과 경쟁하여 우승을 하였으며 같은해, 빈 콩쿠르에서 야포크 플리어(Yakov Flier)에 이어 2등을 차지하였다. 1944년 12월, 2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무렵 길렐스는 모스크바 콘서버토리 그레이트 홀에서 프로코피에프(Prokofiev)의 "피아노 소나타 8번"을 초연하는 영광도 안았다. 1945년에는 바인베르트의 피아노 오중주의 초연에 참여했고 1946년에는 유명한 스탈린상의 수상자가 되기도 하였다. 1947년부터는 유럽 콘서트 투어를 시작하였는데, 길렐스는 구소련의 음악을 서방 세계에 알린 최초의 아티스였다. 1954년 파리 데뷔에 이어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등에서 유럽 콘서트 투어를 가졌고 1955년에는 구소련 아티스트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여 필라델피아에서 시카코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하며 데뷔 무대를 가졌다. 그의 말년에는 해외 콘서트 투어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그의 고국 러시아에서 1952년부터 재직한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후진 양성에 정성을 쏟았고. 1961년, 1962년 그리고 1966년에는 레닌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85년 10월 14일에 에밀 길렐스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을 눈앞에 두고 안타갑게 타계하였는데, 1980년대에 녹음한 이 베토벤의 소나타들의 녹음과 1970년대에 오이겐 요훔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녹음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2번 등은 음악계의 귀중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강인한 손가락 힘에서 뿜어나오는 강인한 터치는 "강철 타건"으로 알려질 정도로 그의 힘있는 연주를 설명하고 있으며 여기에 그의 예민한 감각에서 나오는 뛰어난 섬세한 기교와 정연한 질서는 그의 힘있는 연주에 더욱더 완성도를 높혔다. 특히, 에밀 길렐스는 바흐, 스카를라티 등의 바로크 음악에서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의 고전파 음악, 쇼팽, 슈만, 리스트 등 낭만파 음악, 생상스, 드뷔시 등 프랑스 음악, 차이코프스키, 스크리아빈,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등의 러시아 음악과 프로코피에프의 현대음악 까지 광범위한 레퍼토리로 규범이 될만한 많은 명연을 남기기도 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