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s : Cello Concerto in a minor No.1. Op.33

작품의 개요 및 배경

생상이 작곡한 두 곡의 첼로 협주곡 중 널리 애호를 받는 작품으로 라틴적인 세련미와 더불어 게르만적 세계에 가까운 큰 스케일과 웅장함이 그의 다른 협주곡보다도 더욱 잘 결합된 수작입니다. 자유로운 형식으로 끊임없이 연주되는 단 악장 형식이며, 이중 느린 4분의 3박자로 되어 있는 중간부분이 전곡의 긴장을 해소 시켜주는 아름다운 멜로디를 보이고 있습니다.

파리 코뮨과 보불전쟁으로 상처 입은 프랑스 국민들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젊은 음악가들이 모여 1871년에 국민음악협회를 결성했습니다. 당시 생상은 30대 중반이었지만 4세부터 신동이란 소리를 들으며 음악계에 알려졌고 또 냉철하고 해박한 지식으로 명성이 자자해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협회의 목적 중 하나가 젊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널리 알리는 것이었는데, 생상의 첼로 협주곡도 그러한 정신에서 1872년에 작곡되어 그 다음해 체릴스트 톨베크에 의해 초연 되었습니다.

카잘스는 12세 때 생상의 지휘로 이 협주곡을 연주한 바 있었는데 작곡자로부터 이 곡이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에서 영감을 얻었음을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생상의 첼로 협주곡도 슈만과 마찬가지로 빠르고-느리고-빠른 세 부분이 끊이지 않고 단일 악장 형식을 취하는데, 이는 슈만의 영향이라기보다는 베를리오즈나 리스트 같은 프랑스계 작곡가들이 19세기 후반에 시도한 교향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작품의 구성 및 특징

제 1악장 알레그로 논 트로포(Allegro non troppo-Animato-Allegro molto-Tempo)
투티의 선두화음을 받아 첼로의 힘찬 주제가 나오는데, 이를 카잘스는 천둥번개로 설명하고 있다. 주제가 음을 옮겨가며 반복되는 동안 천둥번개는 잦아지고, D장조로 들어서면 그제서야 푸른 하늘을 볼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반음계적인 연결악구를 지나 2주제가 넓은 음역을 오가며 서정적 노래를 부르나 완결되기 전에 전개부로 진입한다. 전개부에서 절정은 오케스트라가 주제를 발전시키고, 그 위를 첼로가 이중분산 화음으로 기교적 카덴차풍의 악절을 연주하는 부분이다.

제 1주제는 율동적이고 리드미칼하며 음 넓이를 바꾸면서 다섯번 되풀이 되어 관현악으로 옮겨 갑니다. 제2 주제는 가장 여린 현의 반주 위에서 아름답게 연주되다가 현과 혼에 의한 화성적 움직임에 이끌려 전개부로 갑니다. 전개부는 제 1주제와 두 개의 동기를 나누어 발전의 재료로 하고 재현부에서는 제2주제만이 재현되며 곧 제 2악장으로 이어갑니다.

제 2악장 알레그레토 콘 모토(Allegretto con moto)
미뉴에트풍의 주제선율을 투티가 노래하고 있는 동안 첼로의 우아한 대선율이 등장한다. 그러다 첼로가 분위기를 바꾸고 왈츠 같은 선율을 단독으로 연주하면 이때 현파트가 피치카토로 첫 음들을 퉁겨준다. 중간부분에서 짧은 첼로의 카덴차가 나온 다음 왈츠 선율이 계속되는데, 이때 투티는 다시 미뉴에트 선율을 부분적으로 시도한다. 끝부분에 도달하면 1악장의 주주제가 재등장하며 순환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짧은 스케르쪼로써 8마디로 이루어진 단 하나가 중심이며 경쾌로움과 우아함이 흐릅니다. 현의 피치카토,목관의 피치카토 음형사이사이를 독주 첼로가 누비면서 그대로 제 3악장으로 나아갑니다.

제 3악장 몰토 알레그로(Molto allegro)
피날레는 ABCBA형식으로 짜여졌는데 A는 서정적 삽입절로, B는 기교적 발전부로, C는 낮은 음역으로 1악장의 전개부에서 보이던 표현적이고 남성적인 선율로 형성되었다. 특히 투티에 의한 주주제와 C의 남성적 삽입절은 A장조로 된 코다에 선행하는데, 1악장의 요소가 협주곡 끝에 다시 나타남으로써 불완전한 재현부를 보강하고 또한 협주곡의 순환적 면모를 확인시키면서 작품의 완성도와 통일감을 높여주는 효과를 가져온다.
제 1악장과 같은 박자,같은 템포로써 B플렛장조의 제1주제를 중심으로 협주곡다운 기교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일 강한 클라이맥스 후에는 독주 첼로가 새로운 F장조의 풍부하고 폭넓은 가락을 한동안 계속합니다. 코다는 A장조로 점점 약동적인 가락으로 부풀어 올라 스트레토의 느낌으로 느낌으로 전 곡을 마칩니다.

연주 : 뒤 프레[Jacqueline Mary Du Pre(1945. 1. 26 - 1987. 10. 19 )

낙천적인 미소 뒤에 가려진 죽음의 그림자

   가 내리는 어느 깊은 밤,
그날 따라 우리는 아주 외로웠는지도 모른다.
나는 친구들을 내 자취방에 불러모으고 뒤 프레첼로협주곡(엘가)을 틀었다. 그리고 친구들과 나는 모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밖으로는 비가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자클린느의 보우잉은 힘차게 현을 긁었다.
연주가 끝나고 친구는 자클린느의 사진이 담긴 CD재킷을 들고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쩐지 이 여자는 일찍 죽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 친구는 뒤 프레의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깃든 그 활달한 미소를 바라보면 어딘지 모르게 요절할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모양이었다.

  뒤 프레, 그의 이름을 들으면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라는 말이 생각난다. 아마도 요절한 천재들에 대한 선입견 탓일 수도 있고, 그녀를 앗아간 병명이 ‘다중 경화증’이라는 희귀한 병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금세기 최고의 여성 첼리스트로 꼽힌 그녀가 너무나 일찍 무대를 떠나야 했던 것에 대한 우리들의 아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연주한 엘가의 첼로 협주곡(바비롤리 경 지휘의 EMI음반)은 아마도 두 번 다시 나오기 힘든 명반 중 하나이다.

순박한 미소와 넘치는 힘의 첼로 연주

  국 옥스퍼드 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클린느는 세 살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악기 소리 가운데, 특히 첼로 음을 지적하며 그 소리를 내고 싶다고 졸랐다고 한다.
네 살 때 자기 키보다 큰 첼로를 선물 받고 다섯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첼로를 공부한 그녀는 카잘스와 토르틀리에, 그리고 로스트로포비치에게 사사해 어린 나이에 금세기 첼로계의 모든 흐름을 두루 섭렵할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16세가 되던 1961년 런던에서 공식 데뷔 무대를 가졌고, 65년엔 뉴욕에 데뷔했다. 이후 그녀는 세계적인 첼리스트로서 널리 각광을 받으며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나이 23세이던 68년에는 가족이 탐탁치않게 여기던 다니엘 바렌보임과 결혼했고, 28세 되던 73년, '다중경화증'이라는 희귀한 병에 걸려 사실상 연주 활동의 막을 내려야 했다.

  개인적으로는 다니엘 바렌보임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지는 못하지만 그와의 결혼이 재키(뒤 프레의 애칭)에게 음악적으로 좀 더 성숙할 수 있었고, 좀 더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시 역시 바렌보임에 의해 뒤 프레가 좀 더 많은 순회 공연과 바렌보임이 지휘자로서 초기의 캐리어를 쌓는 동안 협연자로 혹사당했다는 인상 역시 감추기 어렵다.
어쨌든 뒤 프레다니엘 바렌보임을 사랑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유태인이었던 바렌보임을 따라 중동과 전쟁(6일 전쟁) 중이었던 이스라엘까지 날아가 이스라엘 교향악단과 협연한 사실만 하더라도 뒤 프레의 그에 대한 사랑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에서 유태인으로 개종한 뒤 프레는 이스라엘 수상인 벤구리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고, 영국으로 돌아온 뒤 이들은 행복해 보였다. 그녀의 연주는 너무나 힘에 넘쳐 현을 끊어먹는 실수를 저지를 정도였다.
비평가들은 그녀의 연주에 대해 "그녀는 나를 미치게 만든다"라고 할 만큼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황홀함은 5년을 넘기지 못하고 불행이 그녀를 덮쳤다.
1970년 무렵 그녀는 눈에 띄게 피로해 하기 시작했다. 눈이 침침해질 때가 많았고, 손가락이 저리며 차가워지고 걸음걸이도 점점 더 볼품없어져 갔다. 병에 걸린 뒤 프레는 차츰 병의 증세가 악화되어 가고 있었음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결혼생활과 다중경화증 발병

   프레는 아주 가끔씩 자신의 이런 증상을 남편에게 털아놓았지만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바렌보임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바렌보임은 연주자 뿐만 아니라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그녀의 연주가 필요했다. 재키가 리허설이나 연습 때 자주 템포를 놓치게 되자 바렌보임은 그때마다 뒤 프레를 혹독하게 몰아부쳤다.
이를테면 그녀의 정신력이 해이해진 탓이라는 것이 바렌보임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뒤 프레 역시 자신이 아픈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고 일주일에 5회씩 프로이트 학차의 정신분석가인 월터 조피에게 진찰을 받으러 다녔다.
그러는 중 그녀의 연주에 대한 악평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를 미치게 한다"던 그녀의 연주는 차츰 "일관성도, 논리성도 없는" 연주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서웠다.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의 부인인 라이자 윌슨"그녀 혼자서 외출하는 일이 잦았다. 쇼핑을 하거나 들판을 거닐거나 했다. 그러다가 넘어지면 지나가는 사람이 도와줄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늦게 돌아온 데 대해 남편이 화를 내면 '쇼핑하다 보니 입고 싶은 옷이 많았어요'라고 둘러댔다. 결국엔 아마 도로변이었다고 생각되는데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병원으로 실려가는 지경이 되었다."
드디어 병세가 너무 악화되어 뒤 프레가 연주 중에 활을 놓쳐 버릴 지경이 되어서야 찾아간 병원에서 그녀가 '다중경화증'이란 희귀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뒤 프레는 오히려 안도의 숨을 쉬었다고 한다.

  자신의 정신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바렌보임의 질책이 얼마나 심했으며 그녀 자신이 그로인해 얼마나 큰 상처를 받고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병으로 인해 더 이상 순회공연에 따라나설 수 없게 된 자클린느 뒤 프레는 그 후 음악 교육에 정열을 바쳐 78년에 맨체스터의 솔포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요요마와 린 하렐의 스트라디바리는 그녀의 것이었다. 뒤 프레가 이들에게 물려준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1987년, 남편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랜 투병 생활로 지친 42년간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녀의 연주는 남성에 뒤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힘과 넘치는 표현으로 마치 톱질이라도 하는 듯 힘찬 보우잉과 순진하고 솔직한 동작으로부터 발산하는 순수한 열정이 돋보였다.

그녀는 병에 걸리기 전까지만 해도 항상 웃음을 간직한 낙천주의자였고, 자신감에 넘쳐흘렀으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활달하기까지 했다. 그녀의 그런 낙천적 성격과 자신감이 그녀의 연주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듯 했다.

이런 그녀의 연주를 한편에서는 자신을 활활 태워 만들어 낸 음악’이라고 했고, 다른 한 편에서는 한 인간이 평생을 두고 써야 할 수명과 기를 짧은 기간에 소진했기에 때 이른 죽음을 맞이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그녀의 연주는 스케일이 크고 열정적이었다.

  그녀가 잃어 버린 것은 첼로 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잃어 버릴 것이 없을 만큼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
최후의 비참했던 연주회로부터 시작하여 두 다리, 양팔 그리고 몸 전체의 균형을 잃었고, 사물이 두 개로 보일 지경이어서 책도 읽을 수가 없었다. 전화의 다이얼 돌리는 일도, 돌아눕는 일도 그녀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심지어 1975년 이후로는 눈물을 흘릴 수도 없게 되었다. 남편 바렌보임을 비롯하여 사람들은 바쁘다거나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뒤 프레에게 연락하는 횟수를 줄였고 차츰 아무도 찾지 않게 되었다.
뒤 프레는 아무도 없는 밤에는 혼자 절망에 떨며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에게 와달라고 조르곤 했다. 뒤 프레는 병으로 쓰러져 휠체어에 앉아 보내던 시절 이렇게 고백했다.

 “첼로는 외로운 악기다. 다른 악기나 지휘자가 있는 오케스트라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첼로로 음악을 완성시키기 위해선 음악적으로 강한 유대를 가진 보조자가 필요하다. 나는 운이 좋아 다니엘을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연주하고 싶었던 곡을 거의 다 음반에 담을 수 있었다.”

 그의 음반으로는 엘가의 협주곡(EMI)이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며, 코바셰비치와의 베토벤첼로 소나타(EMI)도 수작이다.
그녀의 미소와 그녀의 연주를 들으면 누구라도 자클린느 뒤 프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뒤 프레의 전기 작가 캐롤 이스턴은 읽기도 말하기도 힘들게 된 말년의 뒤 프레는 자신이 연주한 엘가의 협주곡을 틀어놓고 멍하게 있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들을 때마다 몸이 찟겨나가는 기분이 들어요. 눈물 조각처럼" 그러곤 고개를 떨구고서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언젠가 영국 BBC에서 제작한 그녀의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자신의 어머니 무덤에도 가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녀의 무덤에 단 한 차례도 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순간 다니엘 바렌보임의 연주가 설령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 실제로 그의 연주와 지휘는 훌륭한 것들이 있다. - 그의 음반은 사지 않겠노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한 적이 있다.

자클린느 뒤 프레는 남편이 한 번도 찾아와주지 않는 무덤에 홀로 누워있다.

글, 이미지 출처 : 바람구두 연방의 문화 망명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