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반, 명연주(리히터) 이야기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친근한 서정미로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받는 이런 그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연주를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아쉬케나지(Viadimir Ashkenazy, 1937~, 러시아)의 연주를 떠올리게 된다.

특히 프레빈(Andre Previn, 1929~ , 독일)과의 협연(1971년)에서 보여준 자유로운 서정미가 깊은 인상을 남겨 준 바 있다.

그러나 리히터(Sviatoslav Teofilovich Richter, 1915~1997, 우크라이나)가 보여주는 깊은 비감의 러시아적 분위기는 아쉬케나지의 연주를 능가하는 것이다.

물론 아쉬케나지의 연주가 뛰어난 연주임에는 이론이 없지만, 무게감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리히터의 연주가 한 단계 높은 곳에 위치한다 할 수 있겠다.

리히터의 녹음은 1959년 2월 쿠르트 잔데를링(Kurt Sanderling, 1912~ , 독일)이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과의 연주도 멜로디야 음반으로 남기고 있다. 이 연주는 비스위츠키(Stanisław Wisłocki, 1921~1998, 폴란드)와의 협연에 비해 더욱 진하고 특히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음산한 러시아적 어두움이 단연 빛을 발한다.
다만 음질이 다소 떨어지는 것을 제외한다면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좀 더 보편적인 명반으로 DG 음반을 추천하고자 한다.

리히터는 이 녹음이 있던 해인 1959년 아직도 서방 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前)이었다.
물론 1년 뒤인 1960년 첫 모습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그래서 DG사에서 비스워츠키와의 협연으로 바르샤바에서 모차르트 20번 협주곡, 슈만 협주곡, 라흐마니노프 2번 협주곡을 처음으로 녹음하게 되었던 것이며, 거장이라는 찬사에 걸맞은 리히터의 놀라운 기량이 돋보이는 최고의 연주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1악장 모데라토의 무거움이 엄습하는 관현악이 첫인상을 압도하면서 연이어 터져 나오는 피아노 역시 엄청난 감흥을 단숨에 서늘하게 전해 준다. 마치 괴로움에 몸부림치듯이, 강한 타건을 유지하면서도 그 속에는 섬세한 터치의 아름다운 감성을 겸비하고 있어 과연 거장다운 안목을 보여준다.

다소 무겁고 위압적인 분위기로 곡을 이끌고 있지만, 2악장 아다지오(adagio)에 이르면 경박함을 철저히 배격한 기품과 낭만의 기조가 아주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어 연주의 완성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
마치 깊은 청명함을 전해 주는 진한 색채가 일품으로 펼쳐진다. 더욱이 비스위츠키의 뛰어난 지휘와 동구권 특유의 어두운 무게감을 갖춘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기량도 나무랄 때 없는 최고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강한 추진력과 정열을 바탕으로 뿜어져 나오는 생명력의 연주로, 환상적 서정미가 곡의 내면에 간직된 러시아의 어둡고 서늘한 비감을 위험과 강한 낭만으로 이끌고 있는 잊지 못할 절대적 연주라 하겠다.

라흐마니노프 만년의 자전적 스케치에 따르면 이 곡이 만들어질 무렵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 1828~1910)를 만났고, ‘누구에게나 괴로울 때가 있고, 그것이야말로 머리를 높이 들어 매일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란 톨스토이의 말이 인생에 아주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바로 이런 것이 리히터의 연주에서 느껴진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출처 : 불후의 클래식(허 재, 책과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