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와 피아노 협주곡 3번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의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뒤 러시아를 떠나 잠시 독일의 드레스덴에 머물게 된다. 바로 이 시기인 1907년 피아노 협주곡 3번의 작곡에 착수하게 된다.
그리고 러시아로 돌아와 곡을 완성시켜 1909년 미국 뉴욕에서 자신의피아노와 담로쉬(Walter Damrosch, 1862~1950, 독일)가 지휘하는 뉴욕 교향악 협회 악단(New York Symphony Society, 1926년 뉴욕 필과 통합됨)고 초연을 하게 된다.
물론 당시에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1910년에 다시 말러(Gustav Mahler, 1860~1911)가 상임지휘자로 와 있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연주하여 곡의 진가를 인정받았고, 라흐마니노프는 말러를 대단히 훌륭한 지휘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하였다.
이 곡은 작곡가 자신이
‘특별히 미국을 위해 작곡했다’라고 하였지만 미국적인 것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고, 단지 미국 연주회를 우해 준비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곡의 헌정은 그가 존경하던 피아니스트 요셉 호프만(Josef Hofmann, 1876~1957, 폴란드)에게 이루어졌으나 그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면 한 번도 연주한 적이 없다고 한다.
곡의 분위기는 2번 협주곡에 비해 덜 대중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오히려 작품의 완성도와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어법 면에서는 더욱 진보된 작품이다. 특히 대단히 어려운 고난도의 곡이면 이 곡보다 더 위압적이고 화려한 피아노 협주곡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에 대해 본인도 어리둥절할 정도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한 1악장 카덴차(cadenza)도 두 가지로 하나는 긴 고난도의 것이며, 도 하나는 다소 느린 서정성을 강조한 것이다. 전체를 감도는 감미로운 분위기와 러시아적인 정감 그리고 화려한 피아노이 활약이 인상적인 곡이다. 라흐마니노프 자기만의 멜랑꼴리한 노래에 피아노의 현란한 기교가 곁들여지는데, 특히 마지만 악장의 박진감의 휘몰아침이 일품이다.
1917년 러시아에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귀족 출신인 라흐마니노프는 가족을 데리고 스웨덴, 스위스를 거쳐 1918년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된다. 이후에도 프랑스, 스위스로 건너갔고 다시 미국에 1935년 최종적으로 귀화하게 된다.
이렇게 혁명을 피해 뉴욕에 온 라흐마니노프는 처음에는 매우 막막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의 청중들은 이미 9년 전 방문한 바 있는 그를 잊지 않고 있었다. 1918년 12월에서 다음 해 4월까지 연주회가 무려 36회나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가로서보다 피아니스트로서 더욱 유명해졌다. 특히
하이페츠(Jascha Heifetz, 1901~1987, 러시아)와의 공연이 유명하며 만년에 들어서는 의사가 연주회를 줄이라는 권고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연주는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연주가 시작되면 몸이 아픈 데나 발작 같은 것은 언제 그랬더냐싶게 나아 버린다. 피아노를 못 치게 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났다”
란 말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라흐마니노프가 만년에 화려한 음악 생활을 하게 되는 계기가 바로 1909년에서 1910년 사이에 미국 공연이었고 이 공연 중에 바로 피아노 협주곡 3번 초연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흔히 이 작품이 모든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위압적이라고 하듯이 이런 곡의 연주를 들은 미국 청중들은 그를 잊지 못했고 혁명을 피해 다시 미국을 찾은 라흐마니노프를 열광적으로 맞이했던 것이다.
이렇게 미국에 머물 무렵 스탈린(Joseph Stalin, 1879~1953)은 1급 예술가의 지위를 준다고 하면서 본국행을 회유했지만 라흐마니노프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 땅에서 숨을 거둔다.
출처 : 불후의 클래식(허 재, 책과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