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강력하고 매우 개인적이고 내적인 생활에 의해 내부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으며, 심오한 인간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주요 작품 각각이 작곡가로서 지속적인 성장에 점하는 위치이다. 왜냐하면 악의 어린 신선미 없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머물러 있지 않은 작곡가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는 보통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혁신적이었다.
관현악 작품에는 결코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지만, 그의 피아노 서법의 독창성은 특히 러시아 음악에서 실제적인 선례가 거의 없다. 그는 새로운 건반 음형을 무진장 창조해냈다.

그리고 다른 뛰어난 피아니스트처럼, 그렇지만 그것은 자원이 풍부한 손을 이끄는 상상력 풍부한 귀의 문제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의 연주를 반영하는 것은 건반 텍스추어만이 아니다. 그의 음악의 리듬적 생동성은, 긴 호흡의 선율을 피아노가 노래하도록 하는 그의 놀라운 리듬적 조절력과 관련되어 있다.

이 4개의 협주곡과 파가니니 랩소디의 일부 시작부분이 주는 충격은 라흐마니노프의 독주파트 연주의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수법이다. 그러나 또 다른 요소는 그의 양식이 정확히 러시아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단지 멜랑콜리한 표현의 문제일 뿐 아니라 그것이 정교회의 고도로 감정적인 음악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것과 관련된 문제인 것이다. 동시에 각 작품은 서구의 형식적 선례를 따르며, 협주곡 제 1번은 그가 이것들을 섭렵하여 이룬 통달의 생생한 예를 제공한다.

초판은 1890-91년에 나왔는데, 그 때 그는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에 있는 매우 조숙한 10대였다.
반면에, 여기서 연주된 개정판은 1917년에 나온 것인데, 이 때 그는 성숙하고 매우 경험많은 작곡가 였으며, 이미 두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더 썼을 뿐 아니라, 두개의 교향곡, 세개의 오페라, 세개의 교향시, 주요 합창작품, 많은 독주 피아노 곡집, 그리고 수많은 노래를 썼을 때였다.

라흐마니노프는 후에 "한 음도 그냥 있던 자리에 두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비록 그것은 과장이었지만, 그 결과는 보다 다채롭고, 모험적인 화성, 놀라운 텍스추어의 명료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욱 탄탄해진 구조를 낳았다. 그렇지만 어떻게 중년 작곡가의 현학성에도 불구하고 피날레 시작부분의 집시풍 주제와 유려하게 시작하는 건반의-젊은 열기의 세련된 표현-자연스러움이 그대로 남게 되었는지 놀랍다.

거의 수정이 필요 없는 부분은 제1악장의 화려한 카덴차였는데, 이것은 1890년대 판에서조차 대 기교적 피아노 서법을 결정적으로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비바체의 주요 주제인 시작부분의 팡파레와 피아노 악구의 대답이 모두 사용된다.
그리고 전체 악절은 그 악장의 형식에 본직적인 역할을 하며, 결코 단순한 전시를 명목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이 카덴차는 연주자에게 대단한 요구를 하지만, 외부 악장들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본질적으로 대비를 이루는 것이 내부 악장인 안단테인데, 간단하고 서정적인 녹턴으로 되어있다.

모든 클래식 작품 가운데 가장 익숙한 것 중 하나의 협주곡 제 2번은 교향곡 제 1번 초연의 비참한 실패로 얻은 질병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작곡하도록 도와준 의사, 니콜라이 달에게 헌정되었다.
그것은 1900-01에 작곡되었는데, 두개의 피아노를 위한 조곡 제2번 op.17과 첼로 소나타 op.19와 거의 동시에 작곡되었다.
그리고 예민한 감상자라면 이 세 작품의 상호 보충적인 성격을 반드시 알아차릴 것이다. 그의 전주곡 op.23 제 6번은 여름날의 산들바람처럼 쉽게 변화하는 작품인데, 이 협주곡의 1악장 제 2주제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협주곡은 특히 작곡가의 음악적 개성의 한 일면인 특징적인 선율적 풍부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작품이 매우 폭 넓게 감상되기 때문에, 종종 그는 단지 제시하는 것밖에 없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 비록 여기에 포함된 다른 작품들이 곧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긴 하지만, 피아노만 나오는 시작부분은, 너무나 자주 접할 수 있어 오히려 잘 파악하기 어려운 독창성을 지닌 악절들 중 하나이다.

협주곡에는 매우 드믄 특성으로, 건반 파트가 종종 반주적으로 되고 주제와 주제의 발전이 오케스트라에 놓이는 부분도 있다. 어떤 곳에서는 피아니스트가 거의 실내악 연주자의 성격을 가질 때도 있다.

명백히 음악어휘상의 유사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협주곡 제 3번은 완전히 다른 작품이며, 우울함과 화려함, 달콤한과 찬란함이 불가해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 곡은 1909년 이후 그의 고향이 되었으며, 그해 초연이 있었던 뉴욕을 처음 방문한 기간동안 작곡되었다.

그 형식은 부분적으로는 소위 전통적 진행이란 외압에 의한 것이며, 또한 보다 재미있는 것은 텍스추어와 리듬의 만화경적 변화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독주자도 지휘자도 대규모의 분위기 대조를 과장해서는 않된다. 이 작품은 또한 악장들 사이의 연관성과 더불어 주제적으로 빈틈없다.

이것은 음악이 최상의 흐름과 연속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의심할 바 없이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제2번(1906-1907)을 통해 성취한 것의 결과이다.
그러나 협주곡 제 3번의 시작은 우연한 듯 위장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시작부분의 선율이 작품 전체를 통해 계속 나타나는 몇개의 동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동기들을 추적하는 것은 매력적인 작업이다.

마찬가지로 시작의 관현악 파트의 리듬은 단순히 반주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거의 주제적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협주곡의 많은 부분에 스며들어 있다. 사실상 리듬적 변화의 중요성은 이 작품과 협주곡 제2번을 구별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그런 구별성은 협주곡 제4번도 마찬가지다.
라흐마니노프는 아마도 그것을 1917년에 협주곡 제2번을 개정할 때 쯤 작곡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혹은 구상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대부분은 1926년에 쓰여졌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가 미국에 정착한 이후 쓰여진 첫번째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제4번은 1941년 전반적으로 개정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이 레코딩에 수록된 연주의 판이다.
제 4번은 이 과정에서 삭제되기도 하고 압축되기도 하고, 관현악파트가 사실상 다시 편곡되었으며, 현악파트에 특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정말고 이 협주곡은 어려운 개념, 즉 작곡가가 매우 정확한 것을 얻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했던 그런 것을 구연한다. 다시 말해 낭만적 모호함은 영원히 사라졌다.

협주곡 제2번과 제3번 그리고 심지어 제1번의 개정에는 시간상으로 상당한 거리가 존재한다.
그리고 파가니니 랩소디처럼, 그것은 본질적인 의미로 현대적이다. 이는 단지 더 많은 불협화음이란 문제가 아니라 생략적인 구조, 일부 진술의 간접성, 즉 다른 것들에 대한 강조에 의해 고도화된 회피 등의 문제이다.
그래서 청중들이, 갑작스런 병렬과 때때로 거의 퉁명스러운 제스추어를 갖는 라흐마니노프의 작품 전체를 파악하기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더이상 주제의 본질적인 의미가 아니라 무슨 일이 거기에 발생했는가라는 예측 불가능성이다.

이 작품들 중 마지막 것은 1934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이다.
우리가 24개로 된 이 일련의 변주곡으로부터 라흐마니노프의 예술적 개성의 전체에 대한 분명한 인상을 얻는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주제는 파가니니의 무반주로 된 바이올린 카프리치오 op.1의 마지막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또다른 주제가 6,10,22 그리고 24번 변주에 등장하는데, 그것은 중세의 "디에스 이레(진노의 날)"이란 평성가에서 취한 것이다. 그리고 이 랩소디는 이 주제들을 묘사하는 표현의 방식 사이의 변증법적 대립을 매우 생생하게 구현하여 보여준다.

옛날의 "디에스 이레"가 파가니니 주제에 대하여 발휘하는 힘에도 불구하고 부동성, 불변을 상징하는 반면, 덧없는 정력으로 가득찬 파가니니 주제의 건조하고, 신경과민적인 균형성은 지칠 줄 모르고 증식하는 창작력을 낳는다는 방식으로 이 작품에는 생산적인 긴장이 매우 명료하다.

변주적 처리에 너무나 민감한 파가니니의 주제는 또한 다른 작곡가들에게도 작곡의 기초가 된다.
그리고 이 중 몇몇은 아마도 파가니니의 거장적인 기교가 주는 원래의 충격을 복구 시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라흐마니노프의 변주곡 각각은, 비록 분리될 수 없는 전체의 부분이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며, 그는 여기서 기교성 외에도 다른 문제들을 깊이 탐구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마치 나쁘게는 악마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좋게는 암흑의 오르페우스의 음악이라고 평가받는 파가니니의 "사상"에 대한 랩소디인 것처럼 보인다.
글 : 박정민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참마음 참이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