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Dietrich Fischer-Dieskau, 1925. 5. 28. ~)
독일의 바리톤 가수.
이 시대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악가인 피셔-디스카우는 모든 면에서 축복받은 예술가이다. 그는 네 번이나 결혼하였다.
피셔-디스카우를 단순한 베이스-바리톤이라고만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는 진정으로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예술가이다. 그는 탁월한 오페라 베이스-바리톤이면서 독일 리트(Lied)의 대가이다.
특히 슈베르트의 가곡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는 뛰어난 솔리스트이며 지휘자이기도 하다. 그는 수많은 오라토리오, 콘서트에서 솔리스트로서 빛나는 음성을 전하였다.
그는 자서전을 비롯한 훌륭한 책자를 펴낸 작가이며 또한 뛰어난 화가이다. 1980년네는 밤베르크(Bamberg)에서 첫 개인전을 가져 그의 숨은 재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는 연설가이며 교사이다. 그가 낭송한 괴테의 시는 귀중한 음반으로 남아있다. 그는 가장 훌륭한 레코드를 취입한 성악가이다. 그가 지금까지 취입한 음반은 그 수를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러므로 그를 단순히 오페라 아티스트, 또는 리트를 부르는 성악가라고 규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1925년 5월 28일 알버트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보통 DFD라고 부름)는 베를린의 어느 중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알버트는 처음 결혼한 부인과 일찍이 사별하였기 때문에 역시 학교 선생님인 도라(Dora: 1884-1966)와 재혼하였으며 DFD는 도라가 낳은 세아들중 막내로 태어났다. DFD는 이른바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들은 교사, 의사, 건축가, 목사 등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어머니, 즉 DFD의 할머니는 귀족인 폰 디스카우(von Dieskau) 가문의 일원으로 그의 선조 중에는 궁정음악감독이 있었으며 1742년 바흐가 그 궁정음악감독을 위해 ‘농부 칸타타’(Peasant Cantata)를 작곡하기도 했다.
DFD의 음악적 재능은 어린 시절부터 두드러졌다.
일찍이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운 그는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피아노를 공부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수재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피아노를 공부하는 한편 성악 레슨을 받았다.
16세 때에는 유명한 게오르그 발터(Georg Walter)교수로부터 본격적인 성악을 공부했다.
베를린음악원에 들어가서 한 학기를 마쳤을 때인 1943년 그는 나치 전쟁에 휘말리어 청년돌격대(Wehrmacht)로 징집되어 전선으로 가게 되었다. 이탈리아 전선에 배치된 그는 1945년초 미군에 포로로 잡혀 2년동안을 미군 포로수용소에서 지내야 했다. 다행히 포로수용소에 있으면서 성악을 계속 공부할수 있었다. 대부분 독학이었다.
1947년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그는 베를린으로 돌아와 베를린음악원에서 헤르만 봐이쎈보른(Hermann Weissenborn)교수에게 잠시 사사한후 본격 성악가로서 진출하였다.
DFD는 1947년 바덴봐일러(Badenweiler)에서 리허설 없이 브람스의 ‘독일 진혼곡’을 연주함으로서 전문 성악가로서의 경력을 과시하였다. 바리톤을 맡은 솔리스트가 갑자기 출연하지 못하게 되어 갑자기 대타자로서 연주회 몇시간 전에 발탁되었던 것이다.
같은해 그는 라이프치히에서 독일가곡 독창회를 가졌다.
이어 베를린의 티타니아궁전에서 콘서트를 가져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이로서독일 전역에 그의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948년 가을, 그는 마침내 베를린 슈타츠오퍼(현재의 도이치오퍼)의 리릭 바리톤 주역으로 선정되었고 베르디의 ‘돈 카를로’에서 포사(Posa)를 맡아 오페라에 데뷔하였다.
같은 해에 그는 비엔나와 뮌헨의 오페라극장에서 초청 성악가로서 활동하게 되었고 이듬해부터는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 콘서트 순회연주를 가졌다.
DFD는 1954년부터 1961년까지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오페라에 출연하였고 잘츠부르크에는 1956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출연하였다. 그는 오페라에 있어서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섬세하게 처리하였으며 깊은 내면적 통찰력과 수준 높은 해석으로 공연하였다. 특히 그의 음색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것이어서 어떠한 역할이라도 맡을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오페라 베이스-바리톤으로서 그는 주로 베를린의 도이치오퍼, 뮌헨의 바바리아 슈타츠오퍼에서 공연하였다. 그는 또한 비엔나 슈타츠오퍼, 코벤트 가든, 함부르크 슈타츠오퍼, 그리고 바이로이트와 잘츠부르크라는 양대 오페라 페스티발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첫 미국 순회 콘서트 연주는 1955년이었으며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리트 리사이틀을 가진 것은 그로부터 거의 10년 후인 1964년이었다. 그동안 그가 맡은 역할은 거의 모든 유명 오페라의 베이스-바리톤을 망라하고 있다.
‘피가로의 결혼’에서 알마비바백작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역할이었다.
DFD는 현대음악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벤자민 브리튼, 사무엘 바버, 한스 베르너 헨체, 에르네스트 크레네크(Ernest Krenek), 비톨드 루토슬라브스키(Witold Lutoslawski), 지그프리트 마투스(Siegfried Matthus), 빈프리트 질리히(Winfried Zilig), 고트프리트 폰 아이넴(Gottfried von Einem), 알버트 라이만(Albert Reimann)등 현대 작곡가의 오페라의 세계 초연에 출연하여 그의 학구적인 면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리트 성악가로서 그는 1992년 은퇴하기까지 세계의 거의 모든 유명 음악회장에서 연주회를 가졌으며 그때마다 완전매진을 기록하였다. 그의 연주는 정확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그는 가사와 음악을 똑같은 파트너로서 처리하였다. 특히 슈베르트의 가곡에서 최고의 경지를 이룩한 그에게는 단 한사람의 경쟁자가 있었을 뿐이었다.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계속하여 연구하고 새로운 기준을 수립하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피셔-디스카우는 약 45년에 이르는 무대 활동을 1992년 말 마감하였다.
1992년 12월 31일 뮌헨의 바바리아 슈타츠오퍼에서 있었던 갈라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고별을 고하였다. 이후 그는 오늘날까지 교수로서, 지휘자로서, 낭송자로서, 저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DFD는 1949년 첼리스트인 이름가르트 포펜(Irmgard Poppen)과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세 아들을 두었다. 마티아스는 무대 디자이너이고 둘째 마르틴은 지휘자이며 (현재 하트포트 심포니 지휘자), 셋째 마누엘은 첼리스트이다.
부인 이름가르트는 1963년 셋째 아들 마누엘을 낳은후 출산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누엘은 어머니의 뒤를 이어 첼리스트가 되었다. 그후 DFD는 1965년 여배우 루트 로이베리크(Luth Leuwerik)와 결혼하여 2년동안 살다가 헤어졌고 다시 1968년 미국인 성악 교사의 딸인 크리스티나 푸겔-술레(Christina Pugel-Schule)와 결혼하였으나 1975년 헤어졌으며 현재는 1977년 결혼한 소프라노 줄리아 바라디(Julia Varady)와 생활하고 있다.
다방면에서 대단한 피셔-디스카우! 돈도 무척 많이 벌었다. 연극배우-탈렌트 출신의 어느 나라 문화예술부 장관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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