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릭 쉐링(Henryk Szeryng, 1918 - 1988)
폴란드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
헨릭 쉐링은 멕시코 음악계의 중진으로서 온 국민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엇지만 그는 폴란드 태생이다.
미국의 아이작 스턴, 벨기에의 아르투로 그뤼미오와 더불어 전세계 바이올린계의 정상에 군림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연주는 해가 거듭될수록 더욱 기교적 원숙미와 심오한 음악성이 더욱 빛을 발했던 대가였다.
헨릭 쉐링은 1921년 파데레프스키(Ignacy Paderewski, 1860-1941)가 수상으로 있던 시기에 폴란드 바르샤바 근교에서 태어났다.
7세 때, 같은 폴란드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후베르만의 권고로 바이올린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 후, 후베르만의 추천으로 베를린으로 가서 13세 때까지 카알 플레쉬(Carl Flesch)에게 사사했다.
그리고 바르샤바, 부쿠레시티, 비인에서 공개 연주회를 가졌다.
그런 뒤로 파리로 가서 쟈크 티보(Jacques Thibaud, 1880-1953)에게 바이올린을, 나디아 블랑제(Nadia Boulanger)여사에게 작곡을 배우는 한편, 소르본느 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했다.
그가 독일-헝가리派의 주법과 프랑스-벨기에派의 주법 양쪽을 다 수업한 것이 후에 그의 예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의 연주 스타일은 단정하고 엄격하면서도, 우아하고 유려하다. 그와 같이 상반된 요소가 그의 연주속에서 훌륭히 유지되고 있는 것은 특히 주목할만 하다. 그의 바탕은 리리시즘이지만 그것이 잘 억제되어 있기 때문에 정서과잉에 빠지는 일이 결코 없다.
또 그 억제가 지나쳐서 지적으로 차가워지는 일도 없다. 그의 연주는 아주 품위가 높고 따뜻하다. 그렇기 때문에 바하나 모짜르트의 연주에서 뛰어날 뿐만 아니라, 브람스나 바르톡의 작품에 있어서도 발군의 연주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발발과 동시에 6개 국어에 능통했던 쉐링은 망명 폴란드 정부의 연락장교로 영국에 주재했다.
그때 약 300회의 위문연주회를 가졌으며, 1942년 폴란드의 난민이주계획을 교섭하기 위해 멕시코로 건너가서 작곡가 마뉴엘 폰세(Manuel Maria Ponce, 1882-1948)와 알게 되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2차대전 후에 멕시코 시립음악에 음악부가 창설되면서 쉐링은 교수로 초빙되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때 그는 멕시코에 영주하기로 결심하고 시민권을 획득했다.
1954년, 멕시코를 방문한 아르투르 루빈쉬타인(Artur Rubinstein, 1887-1982)은 같은 폴란드 출신의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 쉐링을 발견하고 협연하게 된다.
그런 연유로 멕시코의 한 음악원의 교수로 평생을 마쳣을지도 모르는 쉐링이 전 세게로 알려지면서 오늘날의 명성을 얻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파리와 베를린에서 수학했던 쉐링의 레퍼토리는 매우 넓다.
독일, 프랑스, 러시아, 고전, 현대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연주를 잘하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는 1734년製 스트라디바리우스(이자이, 샤를 뮌시가 원소유자라는 유서 깊은 명기이다.)와 1743년製 과르네리의 두 바이올린 명기를 애용하였다.
헨릭 쉐링은 루빈슈타인에 의해 세계 각지에 헌신적으로 소개되었다.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연주의 완성도가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연주가 언제 그렇게 완성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깊었다.
그때까지 그에게는 하잘 것 없는 콩쿠르 입상 경력 하나 없었고, 초절기교를 드날리던 젊은 시절도
없었으며, 변변한 레코딩 하나 없었다.
최근에 아를레키노 레이블을 통해 소개되는 그의 젊은 시절 녹음들은 협주곡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그가 실은 남 못지 않은 연주력의 소유자였고,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균형감과 남다른 조절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세상에 소개되어 나가자 그의 연주는 높은 평가를 얻게 된다.
특히 음반을 통할 경우 그의 안정감있고 정확하며 전체적인 흔들림없는 연주는 더욱 빛나게 되었다.
또한 초절기교를 요하는 곡들과는 거리가 먼,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아주 드문 존재로서 인식되었다.
헨릭 쉐링이 남긴 레코드는 많다.
또 같은 곡도 2-3회 녹음하고 있는데, 최근에 레코딩한 것일수록 녹음이 좋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연주 자체도 해가 거듭됨에 따라 더욱 좋아지고 있어서 늦게 나온 레코드일수록 더 훌륭하다.
with Ion Voicu and Henryk Szeryng
낱낱히 다 들 수는 없지만 그중에서 명연으로 꼽히는 대표반으로는 다음과 같다.
우선 헬무트 발햐(Helmut Walcha, 1907-1991)와 협연한 바하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 6곡>,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피터 라이바(Peter Rybar, 1913-2002)와의 협연한 바하의 <두개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그리고 그 자신이 빈터투르 음악원 관현악단을 지휘하면서 연주한 바하의 <바이올린 협주곡 전집>, 그 자신이 초연했고, 또 세계 최초의 레코딩인 알렉산더 깁슨(Alexander Gibson, 1926-1995) 지휘, 런던 교향악단 연주에 의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 3번> 등이 명반이다.
그리고 잉그리드 헤블러와 협연한 모짜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알렉산더 깁슨 지휘,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연주에 의한 모짜르트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 전집>, 하이팅크 지휘,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의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같은 콤비에 의한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에두아르드 반 레모르텔(Edouard van Remoortel, 1926-1977) 지휘, 몬테카를로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의한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 라벨의 <찌간느>, 얀 크렌츠(Jan Krenz, 1926- ) 지휘, 밤베르크 교향악단 연주에 의한 비에냐프스키와 시마노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하이팅크 지휘,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야노스 슈타르케르(Janos Starker, 1924- )와 협연한 브람스의 <이중 협주곡>, 엘리아후 인발(Eliahu Inbal, 1936- ) 지휘,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클라우디오 아라우(Claudio Arrau, 1903-1991), 야노스 슈타르케르와 협연한 베토벤의 <3중 협주곡>, 빌헬름 켐프(Wilhelm Kempff, 1895-1991), 피에르 푸르니에(Pierre Fournier, 1906-1986)와 협연한 베토벤의 <피아노 삼중주 제 7번, 대공> 등은 모두 정평높은 명연반들이다.
Pianist, Emil Gilels and Violinist, Henryk Szeryng
■ 앨범
01. Paganini - Violin Concertos No 1 & 4 / Szeryng, Gibson
London Symphony Orchestra,
Sir Alexander Gibson, Conductor,
Henryk Szeryng, Violin
02. Bach - Sonatas & Partitas for Solo Violin / Henryk Szeryng
Henryk Szeryng, Violin
03. Paganini - Concerto per Violino No.3 / Henryk Szeryng
London Symphony Orchestra,
Sir Alexander Gibson, Conductor,
Henryk Szeryng, Violin
04. Brahms - Double Concerto / Beethoven - The Violin Romances
Concertgebouw Orchestra, Amsterdam
Bernard Haitink, Conductor,
Henryk Szeryng, Violin,
Janos Sarker, Cello
05. Beethoven -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61 / Henryk Szeryng
London Symphony Orchestra,
Hans Schmidt, Conductor,
Henryk Szeryng, Violin
06. Henryk Szeryng in Recital / Kreisler, Wieniawski, Tartini, Schumann, Vitali, Gluck, Halffer
Henryk Szeryng, Violin
쟈료 출처 :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