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돈 크레머 (Gidon Kremer, 1947~ , 라트비아 리가
라트비아 출생의 독일 바이올리니스트.
국적 : 독일
출생지 : 라트비아 리가
주요수상 : 퀸엘리자베스콩쿠르 3위(1967), 몬트리올콩쿠르 2위(1969), 파가니니국제콩쿠르 우승(1969)
라트비아 리가 출생으로, 모계로는 독일, 부계로는 스웨덴 계통의 피를 이어받았다.
외할아버지는 독일에서 활약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카를 브루크너(Karl Bruckner)였고, 부모님도 바이올리니스트였다. 4세 때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의 기초를 배웠고, 1965년 모스크바음악원에 입학하여 다비트 오이스트라흐(David Oistrkh)에게 정식으로 바이올린을 배웠다.
1967년 퀸엘리자베스콩쿠르, 1969년 몬트리올콩쿠르에 출전하여 각각 3위와 2위로 입상했고, 1969년 파가니니국제콩쿠르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에는 차이코프스키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여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1975년에 유럽에 데뷔한 이후 1976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이 지휘하는 베를린필하모니관현악단과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의 협주곡을 협연했으며, 1978년에는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이 지휘하는 이스라엘필하모니관현악단과 지휘자가 작곡한 세레나데를 협연했다.
1979년에는 로린 마젤(Lorin Maazel)이 지휘하는 베를린필하모니관현악단과 표트르 차이코프스키(Pyotr Chaikovskii)의 협주곡을 녹음하는 등 맹활약을 벌이면서 명성을 다져나가던 중 1980년 당시의 서독으로 망명했다.
1981년 서독에서 로켄하우스음악제를 창설했는데, 현대를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연주가들이 모여 실내악 페스티벌을 벌였으며, 1989년 내한공연도 가졌다.
1992년부터는 음악제의 명칭이 크레머의 이름을 딴 크레메르무지카로 바뀌었다.
그가 녹음한 음반 중 유명한 것으로 외젠 이자이(Eug暴 ne Ysaye)의 《무반주 바이올린소나타》, 요한 S.바흐(Johann S. Bach)의 《무반주 바이올린소나타》와 《파르티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i Prokofiev)의 《바이올린소나타 1번》·《바이올린소나타 2번》 등이 있으며, 《브람스 바이올린소나타 전집》도 유명하다.
뛰어난 기교파 바이올리니스트로 ‘파가니니의 환생’이라고도 불리며 현대 작곡가들과의 지속적인 교류와 연주, 그리고 숨겨진 작곡가들을 소개하고 부활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크레머.어떻게보면 ‘기괴하다’고까지 표현할 만한 용모를 지니고 있으며,기교파 바이올리니스트로 인식되고 있는 그가 ‘파가니니의 환생’으로 불리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진지하고 학구적인 자세로 연주의 재창조성을 탐구하고 있으며, 그 결과물로서 보여지는 연주는 아무 생각 없이 현란한 기교만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롭고 진취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현대 작곡가들과의 지속적인 교류와 그 결과에 의한 작품의 연주, 그리고 숨겨진 작곡가들을 소개하고 부활시키는 데 노력하고 있다. 현대 음악 레코딩만 하더라도 슈니트케, 구바이둘리나, 아르보 페르트, 루이지 노노, 필립 글래스 등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래서 크레머가 이번에 무엇을 연주하였는가, 크레머의 해석이 어떠했는가 하는 것은 그때마다 세계 음악계의 작은 사건이 되어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피아졸라’도 그 예라 할 수 있다.
1947년 라트비아 공화국의 리가에서 태어난 크레머의 외할아버지는 독일에서 활약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칼 브루크너였고, 양친 또한 모두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모계로는 독일, 부계로는 스웨덴 계통의 피를 어어받은 그는 네 살 때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의 기초를 배웠다
1965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본다렌코에게 배웠다.
67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3위, 69년 몬트리올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했고, 같은 해 파가니니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이 콩쿠르에서의 우승은 그의 파가니니적인 이미지를 극대화시킨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70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75년에 서방에 데뷔한 이후, 76년에 카라얀의 베를린 필과 브람스의 협주곡을, 78년에는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이스라엘 필과 번스타인의 ‘세레나드’를, 79년에는 마젤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을 녹음하는 등 승승장구를 거듭하다가 1980년에 급기야 당시의 서독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81년에 로켄하우스 음악제를 창설했다.
로켄하우스는 원래 헝가리 국경에 접한 오스트리아 의 작은 마을로, 그 마을에 있는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로켄하우스 성에서 매년 7월 음악제가 개최되었다.
실내악 페스티벌인 이 음악제는 현대를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연주가들이 모여 이어지고 있다.
로켄하우스의 멤버들은 연주 여행도 행했고, 89년에는 우리나라에도 들렀었다.
92년부터는 이 음악제의 명칭이 크레머의 이름을 따서 ‘크레메라타 무지카’로 바뀌었다.
Pianist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와 함께
글 출처 : https://www.classical25.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