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 1875 - 1962)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크라이슬러' 라 하면 왠지 ‘아주 옛날 사람’이란 느낌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클래식을 모르는 사람들도 ‘좋아한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크라이슬러 작곡의 ‘사랑의 기쁨’이나 ‘사랑의 슬픔’은 너무나 낭만적이고 분위기 있는 소품들이라 그가 도무지 20세기의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분명히 19세기에 26년을 살았고, 20세기에 61년을 살았다.
그는 바이올린 주법상의 거의 모든 장점을 겸비한 유례가 없던 존재로서, 풍부한 정서와 따뜻한 표정으로 청중들의 마음에 호소하는 연주함으로써 한 세대를 풍미한 연주자였다.
작곡가로서는 <빈 카프리치오>와 같이 빈의 깊은 정서가 담긴 악곡을 비롯, 18세기 음악적 감성을 주는 바이올린 소품들을 작곡하여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크라이슬러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의 한 사람으로서 1875년 2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나서 1962년 1월 88세로 뉴욕에서 사망했다.
그의 음악적인 재능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정성스런 교육에 의해 발굴되어졌는데, 6살 때부터 Jacob Dont의 밑에서 공부했었으며 이듬 해 빈 콘서바토리에 입학하여 쟈크 아우버(Jacques Auber)와 요제프 헬메스베르거 주니어(Joseph Hellmesberger, Jr)에게 음악과 바이올린을 배웠다.
1885년 빈 콘서바토리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그는 다시 파리 콘서바토리에 입학하여, 랑베르 마사르(Lambert Joseph Massart)에게 바이올린을, 레오 들리브(Leo Delibes)에게 작곡을 배웠다.
특히, 랑베르 마사르는 대개 프랑코-벨기에 악파, 독일 악파, 이탈리아 악파, 러시아 악파, 그리고 체코와 그밖의 동구권으로 나누어 지는 바이올린 악파중에서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위대한 스승들 가운데 20세기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마사르는 심약한 사람이었지만, 스승으로서는 아주 훌륭해 크라이슬러, 비에니아프스키, 사라사테, 마르시크 등의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를 길러냈다.
마사르의 제자 크라이슬러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지속적인 비브라토를 구사해 우아하고 달콤한 음색을 만들어낸 현대적인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마사르의 다른 제자인 마르시크는 20세기 초반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칼 플레쉬, 자크 티보, 조르주 에네스쿠 등을 길러낸 위대한 스승으로 이름을 남겼다.
크라이슬러는 1887년 이 음악원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졸업한 후, 1888년 뉴욕의 스타인웨이 홀에서 데뷔연주회를 가졌으며, 다음 해에는 모리츠 로젠탈과 함께 미국 순회공연을 매우 성공리에 마치면서 성공적인 연주가로서의 출발을 했다.
빈으로 돌아온 크라이슬러는 몇 년간 음악을 중단하고, 빈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로마와 파리에서 미술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오스트리아 군에 입대하여 창기병 연대(Uhlan regiment)의 장교로 복무를 하면서 1898년 빈 필하모니에 입단, 이듬해 아르투르 니키슈(Arthur Nikisch)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니와 협연함으로써 본격적인 연주활동을 시작하였다.
1900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독주자로서의 활동 외에 호프만 (Josef Hoffman), 제라디(Jean Gerardy)와 함께 실내악 활동을 했었으며, 1904년 런던 필하머니 협회로 부터 베토벤 금메달을 받기도 하였다.
1914년 세계 1차대전이 발생하자 그는 창기병 연대에 재복무하다가 그해 9월 렘베르크에서 러시아 기병대의 공격을 받아 어깨와 엉덩이에 부상을 입고 제대하게 되었으나, 다행히 그의 부상은 심각한 것은 아니어서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활동에는 지장은 없었다.
1940년 2차대전의 조짐이 보이자 그는 미국으로 향하고 1943년에는 뉴욕의 시민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교통사고와 시력과 청력이 약해지는 불행을 당하게 되지만, 1947년 카네기홀에서 은퇴연주 할때까지 성실히 연주에 임했다.
크라이슬러는 어린 시절 유복한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탓도 있겠지만 대단히 관대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업인 의사를 포기하고 음악을 계속하게 된 것도 보다 많은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놓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으며, 그러한 크라이슬러의 성격은 그가 남긴 작품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리고 연주가로서의 그의 연주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의 그의 따듯한 성품을 느낄 수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가 무대위에서 청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와 매력이 남달랐다는 점이다.
크라이슬러는 과르넬리의 바이올린을 사용하였으며, 그의 악기에는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늘 자기가 사용하는 악기에 만족을 못하고 좋은 악기를 찾고 있었으나 자선활동에 열심이다보니 모아놓은 돈이 없었다고 한다.
어느날 아주 질이 좋은 뛰어난 바이올린을 발견하게 되었지만 너무 가격이 비싸서 다시 올 터이니 가급적 잘 보관해 달라고 부탁을 한후, 돈을 마련하여 그 악기점을 방문했였으나 이미 다른 악기 수집가에게 팔린 후였다.
그래서 그 악기 수집가가 사는 집을 수소문하여 찾아가서 그에게 그 바이올린을 팔 것을 간곡히 부탁했지만 그는 어쩔수가 없다고 거절당했다.
크라이슬러는 포기하고 그 집을 떠나려고 현관을 향하다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 돌아서더니, 그러면 그 악기가 침묵하기 전 저에게 한번만 연주할 기회를 주겠느냐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주인이 허락을 하자 그는 이 악기를 들고 한 10여분동안 신들린 듯 연주를 했다고 한다.
연주가 계속되면서 계속 심각한 표정을 하던 이 악기 수집가는 그의 연주가 끝나자
..."당신이 바로 이 바이올린의 주인이셨군요.이 악기의 행복을 위해 주인에게 돌려 드리지요"...하고 그 악기를 그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이 악기는 프리츠의 손에서 신기한 음악을 만들어내게 되었다고 한다.
크라이슬러의 스타일은 지금 들어보면 너무나 고풍스런 것이다.
이미 1백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탓이다.
그의 가장 기교적인 작품에 쓰인 어려운 기교들도 사라사테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과정을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크라이슬러가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하이페츠를 처음 대면한 것은 1912년이었다.
당시 함께 자리했던 짐발리스트는 크라이슬러의 농담이 진담이 되어 ‘하이페츠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태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크라이슬러는 전쟁중에 부상당하면서도 연주가로 살아남았다.
이는 크라이슬러도 젊은 시절 만만찮은 기교파였음을 증명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가 무대 위에서 청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와 매력이 남달랐다는 점이다.
1947년 은퇴한 후로도 따뜻한 인품으로 친근감을 주는 명사로서 오랫동안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점은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그가 19세기 빈 풍의 전인적 인간형으로 교양인이자 신사였다는 점은 덧붙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가 비록 소품일지언정 작곡을 했다는 것도 하이페츠에 대한 열등감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패였을 것이다.
라흐마니노프와 함께 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집의 기념비적인 녹음을 RCA를 통해 남기고 있으며, 자작 자연의 소품집들도 그의 음악성을 엿볼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작곡가로서의 크라이슬러는 단악장 협주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D 장조 1악장 편곡), 바이올린 협주곡 C 장조(비발디 풍으로) 등의 협주곡과 사랑의 슬픔 (Liebesfreud), 사랑의 기쁨 (Liebesleid), 아름다운 로즈마린(Schon Rosmarin), 중국의 북(Tambourin Chinois, Op.3) 등의 아름다운 실내악 작품들을 남겼다.
이 외에도, 비인 기상곡(Caprice Viennois), 전주곡과 알레그로(Praeludium und Allegro), 집시의 여인(La Gitana), 베토벤 주제에 의한 론디노(Rondino uber ein Thema von Beethoven)등의 곡들이 사랑받고 있다.
쟈료 출처 :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