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 하이페츠, Jascha Heifetz (1901 - 1987)
러시아의 바이올리니스트.
20세기 '신이 빚은 바이올리니스트', '바이올린의 전설' 등의 격찬을 받은 야사 하이페츠는 86년의 생애중 83년간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60년 이상을 세계 각지를 돌며 무대에 섰고 200만 마일 이상의 연주여행을 하였으며 많은 청중들에게 경악과 감동을 안겨준 반면,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좌절하게 만든 주인공이기도 했다.
■ 하이페츠의 생애
하이페츠는 1901년 2월 2일 제정 러시아의 빌나(Vilnius)에서 태어났다.
유태인 혈통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 루빈 하이페츠( Ruvin Heifetz)에게 세살때부터 4분의 1 사이즈 바이올린으로 기초를 배웠고, 일곱살에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첫 공개 연주회를 가졌다.
당시 청중들은
"매끈하고 둥근 음색과 완숙한 솜씨로 작은 손가락이 매우 어려운 음표들을 유려하게 짚어나가는 모습에 마법에 걸린 듯 황홀하였다"고 한다.
1910년, 9살 때 페테르부르크 음악원(St Petersburg conservatory)에 입학하여 러시아 바이올린계의 당대 최고의 스승인 레오폴드 아우어(Leopold Auer) 교수에게 사사하였다.
러시아는 유럽의 음악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는데, 특히 러시아 바이올린의 역사는 19세기말 유태인 혈통의 음악가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그 대부가 바로 아우어 교수였다.
1886년에서 1918년 사이에 나타난 숱한 명 바이올리니스트들 - 예프렘 짐발리스트, 미샤 엘만, 나탄 밀스타인, 에디 브라운, 막스 로젠 등등 - 이 모두 아우어의 제자들이었다. 하이페츠 또한 아우어 교수의 탁월한 음악교육에 찬사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동으로 대접받는 것은 질병과 같은 것이며 치명적인 것이다.
나는 운좋게도 겨우 살아남은 몇 안되는 신동이라 불리우던 사람이었으며, 이는 전적으로 위대한 음악선생인 아우어 교수와 음악을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 덕분이었다."
아홉살에 아우어의 문하에 들어간 하이페츠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지 2년만에 아르투르 니키쉬(Arthur Nikisch)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함께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듬해인 1913년에 하이페츠는 라이프찌히에서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였는데, 이 당시 관객석에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크라이슬러와 짐발리스트가 참석하였었다.
12세 소년의 연주를 듣고난 후 크라이슬러는 짐발리스트에게 말하기를
"자네나 나나 이제는 바이올린을 내던져 박살내는 편이 나을 것 같네"라고 하였다.
하이페츠는 1917년 10월에 시베리아와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카네기 홀에 데뷔했다.
이때 그가 보여준 초인적인 기교와 뛰어난 음악성으로 인해 그는 하룻밤 사이에 미국 음악계의 우상으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미국 데뷔 첫 해에 그는 뉴욕에서만 30여회의 독주 무대를 가질 정도가 되었다.
저명한 비평가 쵸치노프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열여섯살의 이 소년은 홀을 꽉 채운 청중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했다.
태연히 무대에 걸어나와서는 이 유서 깊은 홀에서조차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는 엄청난 기교와 음악성을 보여주었다."
이 당시 제정 러시아는 공산당 혁명으로 붕괴되고 있었기에 하이페츠 일가는 많은 고생 끝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미국에 정착하였으며, 이후부터는 미국을 본거지로 하여 그의 음악활동이 펼쳐지게 되었다.
그는 1925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된다.
40대에 이르러 그는 캘리포니아의 비벌리 힐즈에 편안한 자택을 구하였고, 여생을 마칠때까지 거기서 머물렀다.
하이페츠는 솔리스트로서의 활동외에 루빈스타인, 포이어만과 더불어 이른바 '백만불짜리 트리오'를 결성하여 실내악 연주활동도 하였다.
이 트리오는 1942년 포이어만이 사망한 후에도 피아티고르스키를 영입하여 수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명성과는 달리 이 트리오의 연주는 그다지 깊은 조화를 들려주지 못하였는데, 루빈스타인의 말을 인용하면 "순전히 하이페츠의 음색과 고집 때문" 이었다.
그는 1962년부터 남캘리포니아 대학에 교수로 취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점차 연주활동을 줄여나가 1972년 10월 23일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연주계에서 완전히 은퇴하였다.
이후 그는 주로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987년 12월 11일 자택에서 8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 하이페츠의 음악
사진이나 비디오로 남아있는 하이페츠의 연주 모습을 보면 매우 특이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꼿꼿이 선채로 바이올린을 높이 치켜들고 거의 무표정한 상태을 끝까지 유지하며 연주에 몰입한다. 그래서인지 하이페츠의 연주는 "차갑다"는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다.
RCA사의 찰스 오코널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누군가가 하이페츠를 차가운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의 정교한 손놀림 때문일 것이고, 또 누군가가 하이페츠를 가리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이페츠가 언제나 음악에 대해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본능과 같은 분석력이 있기 때문에 나온 말일 것이다.
그래도 또 누군가가 그를 차가운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렇다, 그는 차가운 사람이다" 라고 말해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처럼 자신의 감정을 탁월하게 조절하는 음악가를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이페츠의 활잡는 방식은 활을 팔목 상부에 놓고 집게 손가락의 누름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아우어 교수의 방식이었다.
몸에서 떨어진 좌우 팔꿈치가 현에 강한 압력을 더해 주었다.
거기에다 팔목과 팔을 움직여 내는 비브라토가 더해져 강렬한 빛을 발했다.
이같은 연주법상의 개성과 함께 하이페츠는 극도의 집중력과 대담함, 가까이 하기 힘든 위엄, 완벽한 콘트롤을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그의 소리는 힘이 넘쳤고 당시의 바이올린계에 따라다니던 애수어린 감상적인 소리를 제거해 버렸다.
그의 연주는 너무나도 완벽한 기교와 정확한 음정을 자랑하였으며, 이것만으로도 그는 다른 바이올리니스트들의 경외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요제프 베흐스부르크 라는 사람은 하이페츠와의 만남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해준다.
"나는 비버리 힐즈에서 하이페츠와 긴 대화를 나눈 후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그 협주곡의 어려운 패시지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저를 비롯한 다른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는 수수께끼입니다' 그러자 하이페츠는 태연히 바이올린을 집어들고 나를 위해 지독하게 어려운 패시지를 매우 빠르고도 쉽게 연주해보였다.
나는 그가 어떻게 연주했는지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기에 한번 더 연주해달라고 했다.
그는 한번 더 연주해주었지만, 그래도 나는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는 내 멍청한 표정을 보더니 슬픈 듯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그가 어떻게 그 패시지를 처리했는지 아직 모르고 있다."
하이페츠의 기교적 측면은 두말할 필요없는 위대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예술성을 파악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는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연주를 하든 싸구려 연습용으로 연주를 하든 똑같은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하이페츠를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로 꼽는 이유는 아름다운 음색과 감정의 깊이를 음악안에 담을줄 아는 능력과 예리한 보잉(활을 쓰는 주법), 흠잡을데 없는 심미안 등등이다.
하이페츠는 정확한 기교구사 이상의 예술가로서의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 그의 연주는 냉정함으로 일관하는 것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그의 연주회장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가 들려주는 극도의 서정적인 표현 때문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잦았다고 한다.
하이페츠의 다소 과장된 빠르기와 극적효과를 위한 슬라이딩 주법 등은 때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만들어낸 음향은 비판으로 일관하기에는 너무나 완벽했다.
맑게 트인 톤과 명확하면서도 거침없는 프레이징이 그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경우는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하이페츠의 빠른 템포가 어색함을 주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라 여겨진다.
칭찬에 인색하기로 유명했던 칼 플레슈의 말을 인용하자면,
"역사적으로 절대 완벽한 연주자는 아직 없었다.
그래도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면 하이페츠가 유일한 예다."
자료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