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제르킨(Rudolf Serkin, 1903 - 1991)
보헤미아(현재의 체코)태생의 미국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Rudolf Serkin)은 1903년 보헤미아의 에게르(Eger)에서 유태계의 러시아인 가정에 태어났다.
4세 때부터 성악가인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웠으며, 9세 때 빈으로 나와 리햐르트 로베르트(Richard Robert)에게 피아노를, 요셉 마르크스(Joseph Marx)에게 작곡을 배웠다(이 때 조지 셀도 동문이 되었으며, 미국에서 협연한 레코드가 많다).
12세 때 빈 필하모닉과 멘델스존의 협주곡을 협연할 정도로 재능이 알려졌는데, 본격적으로 무대에 서기 시작한 것은 1920년부터다.
루돌프 제르킨이 부쉬(Adolph Busch, 1891-1952) 가문과 인연이 맺어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제르킨이 어느 곳에서 연주했는데, 그 때 객석에 아돌프 부시(Adolf Busch)가 앉아 있었다.
그 곳의 반응에 실망한 제르킨은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나려고 역으로 갔는데, 제르킨의 재능에 놀란 부시는 자신의 반주를 부탁하려고 제르킨이 출발하기 직전에 간신히 역에서 그를 붙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거의 우연하게 만난 두 사람은 그 후 32년간 같이 연주한다.
1920년, 베를린에서 부쉬가 이끄는 실내악단과 바하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 5번을 협연했는데, 이 곡이 끝나고 청중들의 열화 같은 앙코르에 응해서 연주한 곡이 바하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다.
연주 시간이 적어도 36분 이상 소요되는 이 작품의 전곡(全曲)을 앙코르곡으로 연주한 것이다.
이 사건은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그에 관한 전설적인 일화(逸話)로 남아 있다.
기막힌 앙코르였으며 청중들에게 전연 뜻밖의 보너스였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후 제르킨은 바이얼리니스트로 아버지 아돌프 부쉬의 실내 오케스트라 단원이기도 했던 이레네(Irene)와 1935년 결혼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돌프 부쉬와 그의 형인 지휘자 프리츠 부쉬(Fritz Busch, 1890-1951), 동생인 첼리스트 헤르만 부쉬(Hermann Busch, 1899-1972), 딸 이레네와 제르킨, 그들의 아들 숀(호르니스트)과 유명한 피아니스트 피터 제르킨(Peter Serkin, 1947- )과 함께 20세기에 가장 강력한 음악 가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 품위 있는 귀족적인 단정한 연주로 높이 평가받던 아돌프 부쉬의 명성이 높아짐과 함께, 거의 그의 전속 반주자로 일하며 헤르만 부쉬를 포함한 트리오, 부쉬 현악 4중주단과 협연, 그리고 부쉬 실내 관현악단의 협연자로 제르킨의 명성도 전 유럽에 퍼졌으며, 30년대 초부터 아돌프 부쉬와 함께 HMV에서 브람스 실내악곡의 상당수, 베토벤과 슈베르트, 슈만 등을 녹음했다.
이 중 많은 수가 지금까지도 명연으로 평가받고 있다.
1939년 나치에 의해서 추방이 되자, 결국 부시 일가와 제르킨은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는 1939년 커티스(Curtis) 음악원 교수로 취임했고, 북동부 버몬트(Vermont) 주의 길포드(Guilford)에 거주하며 1950년 근교 말보로(Marlboro) 음악 축제를 열어 부쉬와 공동으로 주재하다가 부쉬가 세상을 떠나자 음악제를 자신의 말년까지 이끌어 나간다.
이 음악제는 미국에서 현재 가장 유명한 음악 축제 중 하나이며, 제르킨의 초청으로 한 해도 빼놓지 않고 지휘 매스터 클래스를 맡은 파블로 카잘스 등 저명한 음악인들이 참여했다.
음악가들은 이 음악제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전세계적으로 각광받는 독주자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52년 아돌프 부쉬가 세상을 떠난 후 부터이다.
40년대 말부터 미국 콜럼비아(Columbia)에서 협주곡 녹음을 시작했으나, 1953년 카잘스와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전집을 완성한 이후는 거의 독주곡과 협주곡 연주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이 때부터는 실내악 녹음은 말버러 실황을 제외하면 매우 드물며, 실내악의 스튜디오 녹음은 1963년 부다페스트 4중주단과 녹음한 브람스와 슈만의 5중주곡, 1982년 로스트로포비치와 협연한 브람스 첼로 소나타 2곡 뿐이다.
이렇게 독주곡에 집중한 그는 미국 뿐 아니라 다시 유럽으로도 연주 여행했으며, 우리 나라와 일본을 포함하여 전세계를 다니면서 평론가들에게 절찬받았다.
그는 1988년에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및 시카고 심포니와 베토벤 '황제'를 협연했는데, 이것이 공개 연주로는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제르킨은
"내가 피아니스트긴 하지만, 피아노는 항상 음악 자체에 비하면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고 말하곤 했다.
그가 커티스 음악원에 재직할 때도 바흐의 칸타타를 연구하기 위해 1년 휴직하기도 하는 등, 피아노라는 악기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것과는 그의 태도는 좀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그래선지, 그가 만들어내는 피아노의 음향은 보통의 다른 피아니스트들의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거의 최만년의 녹음에서도 놀랄 만큼 기교에 문제가 없었는데, 재미있는 점은 그의 손은 보통 피아니스트들의 '솜씨 있어 보이는' 손하고는 거리가 멀고, 투박하고 마치 막일에 익숙한 노동자의 손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레코드로 듣는 한, 부시의 반주자였던 시기의 것들은 투명하면서 상식적인 음을 들려 주는데, 카잘스와 같이 한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에서는 벌써 분명히 변화가 나타나며, 스테레오 시절의 뭔가 찌르는 듯한 그 특유의 음향이 들린다.
사실 이 레코드의 대부분이 부쉬가 죽은 다음 해(1953년)에 녹음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놀랄 만하다. 그리고 1960년대 초반에는 벌써 이 변화가 다 끝난 상태였다.
물론 녹음 회사의 차이도 있겠지만, 그의 명연 중 하나인 브람스 피아노 5중주곡은 부시 4중주단과 녹음한 1938년의 레코드(EMI)와 1963년 부다페스트 4중주단과 녹음한 것(Sony)을 비교하면 피아노의 음향이 놀랄 만큼 차이가 많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최만년의 DG 녹음에서는 다시 초기를 연상시키는 둥글며 모가 나지 않은 음향이 들리는데, 한 사람의 녹음임을 감안하면 이런 음향의 변화는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초기의 실내악적인 투명하고 잘 어울리던 음향이, 중기에서는 다소 날카롭고 그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 같은 소리로 바뀌었다가, 만년에는 부드러움이 더해져서 둥글고 따스한 소리로 정착한 것 같다.
어느 일본 평론가가 쓴 책에는,
"제르킨은 실황을 듣지 않고 레코드로만 평가하면 오해를 부를 소지가 크다"고 했다.
그의 말은 제르킨이 녹음에 극히 신중하고 성실하며, 스튜디오 녹음은 특히 조형을 갖추려 하기 때문에 실황과 레코드가 많이 달라진다는 얘기였다.
그는 실황에서
'이상야릇하게 몸을 움직이며, 그에 따라 음악이 크게 기복을 그린다'는 평을 받았으며, 흥얼거리는 버릇은 레코드에서도 가끔 알아들을 수 있다.
지금은 어차피 그의 실황을 보기는 불가능하니 레코드로만 판단해야 할 텐데, 레코드에서는 단정하고 꼼꼼한 점이 많으면서도 어딘가 음악이 그 균형을 박차고 나올 것 같은 느낌이 간혹 든다.
Sony의 베토벤 '비창'의 스튜디오 녹음을 들어 보면, 3악장에서 특히 무언가 맥동하는 힘, 조형의 밑에 감추어진 통제하기 어려운 힘이 느껴진다.
확실한 것은, 실황이건 스튜디오건 제르킨은 음악을 듣기 좋게 의식적으로 다듬으려고 애쓰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제르킨의 본성은 자유 분방한 음악에 있지만, 그가 음악인으로서 매우 존경했다는 장인 부쉬에게서 배운 통제력이 실황에는 최소한의, 레코드에서는 매우 단정한 균형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아마도, 실황에서는 좀 더 자신을 주장하려는 본능과 몸에 익은 조형 감각이 충돌하는데 비해 레코드에서는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연주를 남기려는 그의 성실함이 의식적으로 조형을 갖추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어쨌거나, 외면적으로 '듣기 좋게' 들리는 연주를 포기한 대신 그가 얻은 것은 강인한 조형력, 그리고 두드러지는 열띤 긴장감이다.
베토벤이나 브람스에서는 이는 분명히 장점이며, 그의 정력적이고 열띤 긴장감 있는 연주는 두 작곡가에서 그를 거장으로 손꼽는 중요한 이유이다.
셀 지휘 브람스의 협주곡 2곡을 잘 들어 보면 어딘가 약간 끈적거리는 맛 속에서 끈질기게 한 면으로 파고드는 점이 잘 드러난다.
다른 작곡가들도 물론 독특하지만 이 두 작곡가만큼 매력적으로 들리진 않는데, 특히 잘 맞는 것으로는 슈베르트를 추천하고 싶다.
그의 음반은 제르킨 전성기인 50~70년대의 실황 녹음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좋건 싫건 스튜디오 레코딩을 들 수밖에 없다.
먼저 귀한 실황 음반으로, 1977년 카네기 홀에서 녹음한 '75세 기념 연주회'(Sony)는 꼭 들어 봐야 할 것이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를 연주한 프로그램에서 부드러우면서도 제르킨다운 힘 있는 음악이 잘 살아 있는 매우 좋은 연주인데도, 굳이 아쉬운 점을 들자면 이미 실황과 레코드의 차이가 별로 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러 사람들이 누누이 말하는 것처럼, '실황에서 흥얼거리면서 크게 음악을 넘실거리게 만들어 때로는 거칠다는 느낌까지 주던' 제르킨은 이미 아니다.
루돌프 제르킨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똑같은 스타일을 고집하며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은 고전 음악 레퍼토리와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 같은 낭만주의 레퍼토리, 후기낭만주의 음악(막스 레거)과 바르토크,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예프, 마르티누 드의 현대 레퍼토리를 두루 연주했다.
음악적 정수를 목표로 삼은 올곧은 연주는 흔히 간결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작품 속에 나타난 심오한 선율들을 더 잘 펼쳐놓기 위해 명확한 터치와 뚜렷한 아티큘레이션으로 다듬어 조금씩 조금씩 유혹의 옷을 벗어 던진다.
그리고 그는 라흐마니노프, 요제프 호프만 혹은 호로비츠와 같이 타고난 테크닉의 소유자는 결코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피아노와 씨름을 했고, 그의 연주에서는 그러한 노력이 엿보인다.
하지만 일단 연주에 몰입하면 제르킨은 마치 속세를 초월한 사람 같아 보였다.
슈나벨과 마찬가지로 제르킨은 일생동안 실내악을 연주했으며 연주하지 않을 때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처음 연주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을 무렵, 제르킨은 폭넓은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었다.
슈만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낭만주의 곡들을 주로 연주했지만 그 당시에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에게 특히 더 애정을 느꼈다.
그의 협주곡 레퍼토리는 모차르트에서부터 베토벤, 브람스, 바르토크, 프로코피예프까지 아우른다.
또한 그는 막스 레거의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토’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뷔를레스트’와 같은 작품도 빼놓지 않고 연주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제르킨의 레퍼토리는 축소되었고, 그의 연주 프로그램은 베토벤의 5개의 마지막 소나타와 슈베르트의 세 개의 마지막 소나타로 한정짓게 된다.
제르킨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고 믿는 부분에서 새로운 빛을 전해주기 위해 나날이 노력하면서 끊임없이 텍스트를 다시 시작한다.
정상의 순간에 있었을 때 제르킨의 연주는 안정의 상징으로 보였다.
그는 대담하고 심지어, 좀 야윈 소리이긴 해도 웅장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의 연주에는 숭고함과 결코 ‘고상한 척’하려 들지 않는 고귀함이 서려 있다.
연주할 때 그는 두 가지 메시지를 전달하려했는데, 한가지는 작곡자가 의도한 메시지와는 다른 한 가지 는 연주자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뚜렷한 작품의 메시지가 그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청중들에게 이 세사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초자연적인 연주를 선사하는 것이다.
제르킨은 하이든의 짧은 소나타, 모차르트의 론도, 베토벤의 바가텔 그리고 슈베르트의 즉흥곡에서 정열적이고 완벽한 연주를 들려준다.
강한 테치, 거친 프레이징, 빈틈없는 악센트를 보여주는 제르킨은 두 손의 간격을 지나치게 두지 않고 연주한다.
완벽한 연주 스타일을 고수하는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투명하고 분출하는 피아노를 사용해 초췌한 소리를 미화시키는 것이다.
1966년 슈베르트 소나타 D.959를 녹음한 제르킨은 텍스트에 매우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에너지 넘치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특히 느린 악장에서 들려주는 연주는 형용할 수 없는 한편의 시라 할 수 있다.
1975년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최후의 작품 소나타 D.960은 1978년에 카네기홀의 실황녹음보다 아마도 조금은 덜 진지하지만 명확함에서는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제르킨은 작품을 움켜쥐고 스튜디오 녹음에서처럼 관중들로 하여금 탐색하게 만든다.
그가 녹음한 가장 최고의 작품들인 베토벤의 소나타 <템페스트>, <발트슈타인>, <함머클라비어>, 그리고 <피아노 협주곡> 제 4번과 제5번(하이팅크와 콜린 데이비스와 협연), <슈베르트의 즉흥곡, Op.90>과 최후에 작곡된 세 개의 소나타, 쇼팽의 <야상곡>, 슈만의 <사육제>와 <숲의 정경>, 리스트의 <오베르망의 골짜기>, <단테를 읽고>, <장송곡>, 브람스의 <제3번 소나타 F단조>, <발라드, Op.10>, 헨델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협주곡(줄리니와 하이팅크와 협연), 드뷔시의<판화>, <영상집>그리고 프렐류드 등에서 결코 과시하는 듯한 연주를 들려주지는 않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마치 한판 승부하듯 음 하나하나에 가능한 모든 의미들과 과감히 맞서 싸우고자 한 것 같다.
제르킨은 1964년 음악적 공헌을 인정받아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를 수상하였고, 1972년 3월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으로 뉴욕 필과 그의 미국무대100번째 연주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스트라빈스키, 힌덴미트등이 포함되어 있던 Philharmonic's Symphony Society of New York의 명예회원으로 등록되었다.
1989년 암이 발병하여 더 이상 활동하기 힘들때까지 전 세계로 연주여행과 음반 녹음을 활발히 하였으며, 그 후 암과 투병하다가, 마침내 1991년 5월 길포드 자택에서 생애를 마쳤다.
루돌프 제르킨은 완벽주의자로 설명된다. 어떠한 연주도 탄탄한 기교를 바탕 삼아야 한다는 이상을 지닌 연주자 였다.
그러한 완벽주의는 그의 레코드에서 생생하게 발견된다. 그런가하면 그의 감수성도 못지 않게 풍부해서 매우 열정적인 연주를 들려준다.
"완벽한 기교와 뜨거운 감성의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연주", 이것이 제르킨 음악의 생명인 것이다.
■ 앨범
01. Mendelssohn, Brahms, Beethoven / Serkin
Rudolf Serkin, Piano
02. Bach, Reger, Beethoven / Serkin
Rudolf Serkin, Piano
03. Art Of Interpretation - Brahms / Serkin, Szell
Cleveland Orchestra,
George Szell, Conductor,
Rudolf Serkin, Piano
04. Beethoven - Die Klavierkonzerte, Etc / R. Serkin, R. Kubelik
Bavarian Radio Symphony Orchestra,
Rafael Kubelik, Conductor,
Rudolf Serkin, Piano
쟈료 출처 :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