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르 루빈스타인, Arthur Rubinstein (1887 - 1982)
폴란드 태생의 미국 피아니스트.
80이 넘는 나이에도 고귀하다고 할 만큼 청량한 음악을 연주하였고, 무대에 나타나는 것만으로 청중을 설득하는 품격이 있고, 첫 곡부터 청중을 사로잡았던 피아니스트.

언제나 "무대에 나오는 것은 나의 즐거움, 나의 기쁨 입니다"라고 말한 진정한 낭만주의의 거장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낭만주의 본래로 자유로운 인간정신의 구현에 가장 먼저 접근한 이가 루빈스타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롭지만 호소력 있고, 선이 굵으면서도 윤기 있는 그의 음색은 루빈스타인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폴란드는 쇼팽 이후에도 뛰어난 피아니스를 많이 배출해낸 나라이다.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이지만 파데레프스키, 고도프스키, 요제프 호프만 등의 대가들을 열거할 수 있는 데, 루빈스타인도 의심할 바 없는 폴란드가 낳은 피아노의 거장 중 한사람이며, 19세기 낭만파 거장들의 전통을 오늘날에 전하는 귀중한 피아니스트이다.

의자에 기어올라갈 수 있는 나이부터 피아노를 시작하여 만년까지 전혀 빛바래지 않은 탁월한 연주를 들려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따뜻하고 시적이며 귀족적인 해석의 연주자였다.
쇼팽이래 최고의 쇼팽연주자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는 자유분방한 낭만적 정취를 피아노에 듬뿍 담아내던 인물이었다.

루빈스타인은 1887년 1월 28일 폴란드의 로츠에서 태어났다(후즈 후 인 뮤직에는 1890년 바르샤바 출생으로 되어있다).
그는 3 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4 세 때는 벌써 공개연주회에 출연할 정도로 대단한 신동이었다. 피아노 소리를 처음 들은 순간부터 피아노에 심취한 그는 7살 때 고향의 자선콘서트에서 모차르트, 슈베르트, 멘델스존을 연주한 신동이었다.

바르샤바에서 로지스키 교수에게 사사했으며, 교수는 그의 뛰어난 재능에 놀라 당시의 명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하임(Joseph Joachim)에게 소개했다.

루빈스타인은 10세 때인 1897년, 요하임의 추천으로 베를린에 가서 리스트의 제자였던 카알 하인리히 바르트(Karl Heinrich Barth, 1847-1922)에게 피아노를 사사하게 되었고, 로베르트 칸, 막스 브루흐에게서 음악이론을 배웠다.

1897년에는 러시아 순회공연을 떠나 안톤 루빈스타인(Anton Rubinstein, 1829-1894:러시아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재래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 1899년 포츠담에서 첫 콘서트를 가진 이후 독일과 폴란드 투어를 계속했다.

13 세 때 베를린에서 모짜르트의 협주곡으로 데뷔했는 데, 그때 지휘자는 바로 요제프 요하임이었다.

루빈스타인은 요하임의 추천으로 파데레프스키(Ignacy Jan Paderewski, 1860~1941:폴란드의 피아니스트, 후에 폴란드의 수상이 되었다)에게 사사한 뒤 16 세 때 파리로 갔다. 이 무렵 생상스는 루빈스타인의 연주를 듣고 경탄하여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연주가" 라고 평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폴란드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또한 바이올리니스트 외젠느 이자이(Eugene Ysaye)와 함께 연합군을 위한 30회의 연주회도 열었다. 1916년, 스페인 순회연주를 통해 기록적인 성공을 거두었는데, 단 4 차례의 공연이 무려 120회까지 연장 될 정도였다.

1919년에 루빈스타인은 처음으로 도미하여 무려 75회의 연주회를 열어 청중들을 열광케 했다. 그러나 그런 인기의 보람도 없이 비평은 "미완성의 대기" 라고 하여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비평가들로부터 여러 가지 문제가 지적되었는데, 당시의 루빈스타인의 연주는 폭발적인 연주 효과를 겨냥하고 있었던 반면에 세부의 거친 음이 문제가 되었고, 복잡한 음은 자주 빼어먹고 연주했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을 계기로 루빈스타인은 4년 동안 무대에서 사라져 스위스의 한 작은 마을에서 짧은 기간 안에 자신의 약점을 시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1922년부터 1937년까지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자신의 주법을 개선하고 인간적인 아름다움이 따뜻함과 정열을 유지하면서 조형력을 강화하고 기교적인 조잡함을 제거하는데 힘썼다.

그 결과 그의 연주는 대성하여 1937년 미국 연주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이 때 유명한 평론가 올린 다운즈(Olin Downes)는 그의 빛나는 기교를 절찬하여 "6개의 손과 30개의 손가락을 가진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루빈스타인은 그대로 미국에 정주하여 1946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였으며, 하이페츠(Jascha Heifetz), 에마누엘 보이어만(후에 Gregor Piatigorsky로 개명함) 등과 함께 피아노 트리오를 만들어 실내악에서도 그의 명성을 재차 확인시켜주었다.

Jascha Heifetz
Jascha Heifetz
Gregor Piatigorsky
Gregor Piatigorsky

1954년 할리우드를 떠나 파리로 향하게 되고 유럽에서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강도 높은 콘서트를 개최함으로서 청중들의 열광을 받았다. 그는 거의 70이 가까운 나이에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이때 백발을 휘날리면서 연주하는 그의 모습은 지금의 음악가들에게 하나의 표상으로 기억되고 있다.

루빈스타인의 연주는 세월과 더불어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갔고 기교적으로는 보다 세련되어 갔다. 특히 1960년대를 고비로 그의 연주는 많은 변화를 갖는다.

그 이전의 그는 영화 <카네기 홀>에서 그 풍모를 과시했듯이 찬란하고 화려한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그 반면에 스케일은 크지만 강한 표현법으로써 모든 곡을 그의 개성으로만 물들였다는 지적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의 변화는, 억센 것을 청산하고 단정유려하고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담은 여유있는 음악을 들려주게된 것이다. 즉, 본래의 호방한 외면적 효과에 원숙한 인간미가 곁들여짐으로써 최고의 예술적 경지에 이르렀다.

루비스타인은 음악은 50세 무렵부터 평형이 잡힌 것으로 정리되고, 기술적으로도 보다 투철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70세무렵부터 세련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루빈스타인의 활동은 50세까지가 전기, 그리고 70세까지가 중기, 그 이후가 후기로 대충 분류할 수 있는데 이는 루빈스타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또 한 사람의 쇼팽 전문 연주자였던 호프만(Jozef Kazimierz Hofmann, 1876-1957)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본인의 말처럼 루빈스타인의 쇼팽 연주는 비교적 주관적이었으나, 자유롭고 깊이가 있으며 부드러운 호소력 깊다.

그의 쇼팽은 작품에 대한 기본 정서를 섭렵하고 난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기에 그를 최고의 쇼팽 전문가라 불러도 틀림이 없다.

루빈스타인의 레코드는 거의 RCA 에서 나왔으며 손꼽기 난감할 정도로 많은 명반을 남기고 있다.

루빈스타인의 쇼팽의 연주는 이미 정평이 높은 바이지만, 특히 스크로바체프스키 지휘, 뉴 필하모닉 연주에 의한 <피아노 협주곡 제 1번>, 오먼디 지휘, 필라델피아 관현악 연주에 의한 <피나오 협주곡 제 2번>, <폴로네즈 선집>, <발라드>와 <마주르카>전곡반, <즉흥곡>전곡반, <왈츠>전곡반은 길이 남을 불후의 명반들이다.

그 밖에 라인스도르프 지휘, 보스톤 교향악단 연주에 의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 4번>, 리스트의<피아노 소나타>와 슈베르트의 <방랑 환상곡> 결합반, 오먼디 지휘, 필라델피아 관현악단 연주에 의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 2번> 등도 굴지의 명반으로 남겨져 있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더불어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로 불려졌고 음악 못지않게 와인에도 달관한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휴머니스트이었다.

아울러 20세기에 가장 사랑받았던 피아니스트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희망이라고는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삶은 전혀 탈출구를 보여주지 않고,오직 바랄 수 있는 길은 죽음뿐이었다.
그날 오후 나는 낡은 옷에 묶여진 벨트를 끌러 천정에 매달았다.
의자를 받치고서 내 목을 걸었다.
그러나 의자를 차는 순간,벨트가 끌러지면서 나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내 첫 반응은 일종의 쇼크같은 것이었다.
나는 울었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피아노에 앉아 한숨을 쉬고 다시 울었다.
내가 그렇게나 사랑했던 음악이, 내 모든 감정의 진정한 동반자였던 음악이,
나를 이렇게나 비참한 길로 인도했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소시지 두개만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렬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다가 나는 갑자기 멈춰섰다.
무언가 다른 어떤 것이 나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계시나 강림같은 것이었다.
나는 마치 처음 눈을 뜬 사람처럼 내 주위를 살폈다.
거리와, 나무와, 집과, 달려가는 강아지와, 남자와,여자와...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심지어는 도시의 소음들까지도 다르게 들렸다.

삶은 놀라운 것이었다.
세상은 살만한 것이었다.
설령 감옥에 갇혔거나 병들어 누워있다 하더라도....
나는 지금까지도 강하게 믿고 있다.
삶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관계 없이 사랑할만한 것이라고...."

- 루빈스타인이 21살 적 어느 날 자살을 실패하고 적은 글 -



Elisha Abas, age 9, with Arthur Rubinstein and piano teachers

Sculpture of Artur Rubinstein on Piotrkowska Street in lodz

Dimitris Sgouros and his parents with Arthur Rubinstein at his Geneva apartment, two months before his death


■ 앨범

01. Arthur Rubinstein - Ludwig Van Beethoven Piano Sonatas
         Arthur Rubinstein, Piano


02. Arthur Rubinstein - Chopin 19 Nocturnes
         Arthur Rubinstein, Piano


03. Rubinstein Collection, Vol.48 - Chopin / Polonaises
        Arthur Rubinstein, Piano


04. Rubinstein Collection, Vol. 35 - Rachmaninoff
         Chicago Symphony Orchestra,
         Fritz Reiner, Conductor,
         Arthur Rubinstein, Piano


05. Rubinstein Collection, Vol. 31 - Franz Liszt, Anton Rubinstein
         Arthur Rubinstein, Piano


쟈료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