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Sviatoslav Teofilovich Richter, 1915~1997,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아쉬케나지는 러시아의 수많은 피아노 거장 가운데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1915-1997)를 꼽았다. “다른 연주자와는 달리 그는 언제나 피아노 앞에서 정의(正義)를 실현하려고 했다”고 아쉬케나지는 말했다.

1950년대 말,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는 강철 같은 타건과 웅혼한 음색으로 서방 음악계를 주눅들게 했다. 그러나 이들을 더욱 주눅들게 한 것은 길렐스의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만약 나를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생각했다면 리히터를 만날 때까지 (그러한 생각을) 보류하십시오."

1958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했던 미국의 피아니스트 밴 클라이번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리히터의 따뜻하고 로맨틱한 연주는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연주 중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당시 콩쿠르 심사위원이던 리히터는 클라이번에게만 10점 만점을 주고 나머지 참가자들에게는 0점을 매겨 또다른 화제를 낳았다.

리히터는 서방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이미 "전설"이 되어 있었다.
1960년 그가 45세의 나이로 서방 무대에 등장하면서 그 전설은 더욱 확고 해졌는데,특히 미국의 비평가들은 "이제껏 만난 연주자들 중 가장 빼어난 피아니스트"라거나 "오케스트라 전체와 맞먹는 소리","연주곡 에 대한 경이적인 통제력" 등등의 찬사로 그를 경배했다.

분명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였으며,"거장"이나 "대가"라는 칭호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드문 예술가였다.

음악적인 면은 물론이거니와 음악 외적인 면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공연을 할때,조명을 완전히 꺼버리고,무대 안쪽의 작은 조명만을 살려 악보를 볼 수 있는 최소한의 조명만을 켜기를 고집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청중들이 자신의 공연을 '보러' 오길 원한 것이 아니라, '들으러'오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악보를 외울 시간에 연습을 더 하겠다는 말을 하면서,대부분의 공연을 암보하지 않고 악보를 지참하고 연주했다.

리히터 전까지는,리스트의 곡들은 100여년간 암보로 연주하는 것이 암묵적인 관행이었지만 그는 그 관행을 깨고,항상 연주회마다 페이지 터너(譯 : 연주자의 곁에서 악보를 넘겨 주는 사람)를 동행했다.

그가 겪은 가족사의 질곡도 만만찮다.그 질곡은 그의 아버지의 비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폴란드계 독일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빈 음악원에서 공부한 피아니스트였다. 하지만 결투로써 법을 어기고 도망자의 몸으로 우크라이나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제자였던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리히터를 낳았다.

리히터는 음악인이었던 아버지를 두고 있었으나,피아노는 거의 기초적인 수준밖에 배우지 않았으며 그의 아버지가 주선했던 음악 교육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중도하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은 거의 받지 않았던 유년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리히터와 함께 또 다른 전설로 남은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와 함께 당시 러시아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명성이 드높던 네이가우스(Heinrich Neuhaus,1888-1964)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했다.

이미 10대에 리스트의 소나타 대부분을 연주할 수 있었을 정도로 고도의 테크닉을 익히고 있었으며,대부분의 곡들을 초견 상태에서 연주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중에 독일계라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 피살당한다.
리히터가 불과 26세 되던 1941년의 일이었다. 리히터는 이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에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와의 연락도 끊겼다. 전쟁이 끝난 후 소련 당국은 리히터에게 어머니가 사망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녀는 후퇴하는 독일군을 따라 독일로 망명했던 것이고,우연히 라디오를 통해 리히터의 연주를 들은 어머니가 그에게 연락해 이들은 서로의 생존을 확인했다. 리히터가 철의 장막 밖으로 나온 1960년에야 20여년 만의 모자상봉이 이루어졌고,3년 뒤 그의 어머니는 숨을 거두었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는 압도적인 재능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피아니스트로서 리히터를 ‘대기만성형’이라 보는 시각도 있는데,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22세의 나이에 네이가우스의 문하에 들어가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어린시절의 그의 천재성도 만만찮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오래도록 네이가우스의 문하에 남아 있었던 것은 이 위대한 스승이 그의 큰 그릇을 알아보고 유달리 아꼈기 때문이다. 실제로 네이가우스는 프로코피예프에게 리히터를 소개했고, 리히터는 1940년, 25세의 나이로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6번을 초연했다. 이 어려운 소나타의 초연을 선뜻 맡긴 것은 리히터가 당시 이미 완성된 피아니스트였다는 점을 증명한다.

또한 지금까지 남아있는 여려 공연 실황들을 들어보면, 연습으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확고한 재능의 벽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연주는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집중력이 높으며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고있다.

그의 연주가 초절기교를 요하는 곡들에 특히 강한 편이기는 했지만,단순히 테크닉만 뛰어난 게 아니었던 그는 여타 교과서적인 곡들의 연주에 있어서도 깊은 통찰력을 보였다. 그의 뛰어난 곡 해석력은 바하의 평균율 전곡 녹음반에서 특히 두드러지는데,일본에서 발매된 이 '평균율'의 해설지에는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과 바하의 평균율을 모두 최고수준으로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음악가'라는 구절이 있다.

공통분모가 그다지 없는 이 둘의 음악을 거의 최고 수준으로 소화하기는 일반적으로는 매우 힘들지만,리히터는 특이하게도 이 둘을 모두 소화할 정도로 폭넓은 음악 수용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진면목은 스튜디오 레코딩 보다는 공연 실황에서 확실히 나타나는데, 그의 피아노 연주에는 연주하는 곡에 대한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여타 다른 연주들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수준의 속주와 더불어 곡에 대한 피아니스트로서의 감정 표현,그러면서도 어느 한 부분도 놓치지 않는,악보에 대한 정확성의 화신이라 불러도 될 만큼 뛰어난 정확성과 박력을 보여준다.

이런 박진감은,피아니스트 자신의 감정적인 정열에서라기보다는 음악에 대한 강한 집중력과 강력한 터치에 의해 나온다고 보는 편이 옳다.

우리는 그의 죽음이 주는 쓸쓸함을 방대한 레코딩으로부터 위안받을 수 있음에 안도한다. 그는 레코딩을 즐기지는 않았지만,다행스럽게도,그것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의 음반이 대부분 관객의 기침소리와 부스럭거림,박수와 환호로 채색돼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수많은 음반이 필립스 RCA 같은 레이블로 이미 나와 있지만 아직 공개되지 않은 콘서트 테이프도 적지 않은데,연주자의 허락 없이 시중에 배포된 음반만도 200종을 헤아릴 만큼 그의 녹음 목록도 풍요롭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그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는 음반을 고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리히터의 음악 세계를 가장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94년에 나온 필립스의 <리히터 에디션>을 꼽을 수 있다.
모두 21장으로 이루어진 이 전집은 그의 대표적인 콘서트는 물론 알려지지 않은 녹음까지 담고 있는데,비평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리히터 음악의 정수(精髓)만을 모은 <에센셜 리히터>(5CD, 필립스)는 전집을 구입하기가 버거운 사람들에게 대안이 될 만하다.

첫 장에 58년 불가리아 소피아의 리사이틀 녹음을 넣은 이 전집은 각 음반에 "거장","시인","철학자","신비주의자" 등의 꼬리표를 붙였는데,리히터 의 깊고 넓은 연주 세계를 이처럼 명쾌하게 구분하기도 쉽지 않을 듯하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압도적인 에너지와 경이로운 테크닉,가슴조일 만큼 부드럽고 서정적인 음색,구도자 와 같은 경건함,영혼의 심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듯한 끝모를 깊이는 그를 거장에서 시인으로, 다시 철학자로, 그리고 신비주의자로 자유롭게 유영하게한다. 바흐의 평균율피아노곡집(4CD, BMG)은 리히터 음악의 또다른 정점을 보여준다.

"피아니스트들의 구약성서"로 꼽힐 만큼 완벽한 테크닉과 구성을 갖춘 이 작품은 피아니스트들이 한번쯤 등정하기를 꿈꾸는 음악의 히말라야 산맥과 같은 작품이다.

리히터의 바흐는 따뜻하고 낭만적이다. 바흐의 전통적인 경건함이나 교과서적인 엄격함,바로크적인 음색은 여기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그의 바흐는 듣는 이를 대번에 사로잡아 버린다.함몰시킨다. 듣는 이는 그의 바흐 안에서 비로소 편안하다.궁극의 평화와 안온함이 여기에 있다.

리히터는 말년으로 접어들수록 화려함을 더욱 기피했다.
거대한 공연장보다 이름없고 한갓진 공회당에서의 연주를 더 선호했다.
러시아나 일본의 궁벽한 마을에서,그는 음악을 모르는 이들과 함께 음악을 즐겼다.

그의 80회 생일 때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영감과 미에 대한 사랑의 원천"이라고 그를 칭송했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살아남은 자들은 오랫동안 그의 음반으로부터 영감과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

글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