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Arturo Benedetti-Michelangeli, 1920 - 1995)
이탈리아의 피아니스트.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이 위대한 피아니스트는 생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완벽주의자에, 소심한 성격에,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에, 웃는 모습을 볼 수 없는 남자.

1920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1939년 제네바 콩쿨에서 우승하며 그 모습을 보인 미켈란젤리. 그는 11살 때에 대학생에게 피아노 레슨을 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일찌기 뛰어난 연주력을 가진 영재이기도 했다.

바티칸궁 야외에서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연주는 하나의 전설처럼 인구에 회자한다. 3악장이 끝나갈 무렵 하늘에선 천둥과 번개가 치고,오케스트라와 어울린 미켈란젤리의 피아노는 라스트를 향해 질주를 한다. 그 생생함은 음반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콘서트는 스스로 완벽하게 준비되었을 때만 무대에 오르는 프로정신을 보여주기도 하지만,관객의 기침 소리에도 연주를 하다가 내려갈 만큼 신경질적이고 괴팍함을 드러내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였다.

1995년 스위스에서 생을 마감한 그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 그가 추구했던 바대로 완벽한 연주라고 할 수 있다. 대선배인 알프레드 코르토는 미켈란젤리의 등장을 '리스트의 재래'라고 하지 않았던가? 결벽증에 완벽을 추구하던 미켈란젤리. 그가 남긴 음악과 연주는 그의 이름 속에 담겨 있는 '천사 미카엘'의 '축복'으로 사후에 더 빛을 발하고 있다.

1987년 여름이었다.
파리에서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Arturo Benedetti Michelangeli)라는 이름의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했고,나는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일반적인 피아노 연주와는 격이 달랐는데,이럴 때면 언어가 가진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그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K.503> 칸타빌레 몇 마디를 연주할 때 나는 숨도 못 쉬었다. 한마디로 그는 건반의 마술사였다.

단순히 기교를 위한 기교는 결코 구사하지 않았던 그의 연주에는 높은 수준의 리얼리티가 흘렀다. 그 어떤 피아니스트나 유명한 비평가도 음악의 가장 높은 곳에서 비행하는 미켈란젤리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그의 탐구 정신은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이 시점에서 라흐마니노프의 다음과 같은 말은 미켈란젤리의 예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위대한 음악은 너무 편안한 자세에서 감상해서는 안 된다. 좋은 음악을 들을 때는 정신적, 감성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편안히 의자에 발을 올려놓고 음악을 듣는다면 그건 넌센스다. 음악을 들을 때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음악은 시와 같으며 또한 열정이며 때때로 머리를 아프게도 한다.”

미켈란젤리에게 음악은 사실상 열정의 대상이고,고민의 대상이었다.
라흐마니노프가 그랬던 것처럼 미켈란젤리도 무대 위에서 웃음을 쉽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위풍당당하게 걸어 들어왔으며,퇴장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미켈란젤리는 자연스러운 영감과 신비로움,그리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피아니스트이다.

제임스 켐벨은 다음과 같이 썼다.

“미켈란젤리가 연주할 때면 환상적인 분위기와 함께 정적이 무대를 감싼다. 시선은 언제나 피아노 건반 너머에 고정된다.그는 마치 음악과 신비의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 코드를 듣는 순간 관객은 피아노가 지니고 있는 톤의 한계를 잊는다. 우리는 새로운 피아노 음악의 세계에 초대되는 것이다.”

그는 청중을 음악의 포로로 만든다.피아니스트 브루노 카니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켈란젤리보다 더 뛰어난 피아니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는 세기의 피아니스트이다.”

미켈란젤리는 1920년 1월 5일 이탈리아 브레시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주세페와 벤트리 음악원의 파올로 키메리(Paolo Chimeri)에게 피아노의 기초를 배웠다.

1926년 이 음악원의 원장은 이글거리는 천재성으로 똘똘 뭉친 어린 미켈란젤리의 재능에 축복을 내려주었다. 그의 첫 데뷔 무대는 1927년 3월 10일에 이루어졌다.

체르니의 <Op,409>의 피아노 작품과 마이어의 <타란텔라>를 연주한 그는 지방 신문의 격찬을 받았다.

그는 오르간과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미켈란젤리가 음악적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 많은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듣지 않았다. 따라서 타인의 주법이 아닌 나 자신의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피아노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악기의 타악기적인 요소가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르간과 바이올린을 공부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 악기들의 음색을 피아노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1934년 미켈란젤리는 밀라노 음악원에서 디플로마 학위를 수여 받았다. 주세페 안포시(Giuseppe Anfossi)를 사사한지 3년만의 일이었다. 졸업 시험을 칠 때 열 네 살이었던 그는 브람스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라벨의 물의 희롱을 연주했다. 그때부터 콩쿠르에 참가하기 시작하면서 프로페셔널 연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리의 레퍼토리는 이미 십대에 완성되어 있었다.

베토벤의 <협주곡,황제>,슈만의 <협주곡>,바흐-부조니의 <샤콘느>,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브람스와 쇼팽의 작품이 그가 즐겨 연주하던 곡이었다. 1938년 7월 미켈란젤리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외젠 이자이 콩쿠르에 참여했다. 바이올린 부문만 열렸던 제1회 콩쿠르에서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가 1위를 차지했다.

2회 콩쿠르는 피아노 부문으로 진행되었는데,에밀 길레스가 우승의 기쁨을 맛보았다. 미켈란젤리는 7위에 입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많은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당시의 벨기에 신문은 미켈란젤리가 그리그의 <협주곡>을 연주할 때 모든 악장마다 갈채를 받았다고 전한다. 음악 비평가를 포함해서 여론은 심사 결과에 불만을 표시했지만,모든 걸 돌이킬 수는 없었다.

다음 해에 미켈란젤리는 제네바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그는 결선에서 리스트의 <협주곡 1번>을 연주했는데,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던 알프레드 코르토(Alfred Cortot)는 또 한명의 리스트가 탄생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코르토는 ‘이 정도로 새로운 차원에서 피아노 음색을 창조해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미켈란젤리는 EMI와 첫 앨범을 계약했고 그라나도스의 <안달루시아>,그리그의 <두개의 서정 소곡>을 레코딩 했다. 1940년 리스트의 <죽음의 무곡>,베토벤의 <황제>를 연주하면서 라 스칼라에서 각광받았다.

1942년과 43년 사이에 그는 밀라노에서 슈만과 그리그의 <협주곡>을 연주했다. 이 시기에 스카를라티와 쇼팽의 소품,그리고 바흐의 <이탈리안 협주곡>을 녹음했다. 이 음반의 성공으로 미켈란젤리는 최고로 주목받는 존재로 뛰어올랐다.

제 2차 세계대전 때는 이탈리아 공군에서 파일럿으로 일했는데,당시에 그는 ‘나는 지금은 파일럿이자 의사일 뿐이며,연주는 이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의 문제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미켈란젤리는 무솔리니 반대 운동을 했고,결국 8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바로 무대에 복귀한 그는 다시 모두의 환영을 받는 존재로 인정받았고,1948년에는 런던의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바흐-부조니의 <샤콘느>, 브람스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녹음했다.

그리고 미트로풀로스의 지휘로 슈만의 <협주곡>을 연주하며 카네기 홀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이탈리아 반도를 벗어나서 전세계적인 각광을 받는 피아니스트로 인정받고 있었지만,미켈란젤리는 볼로냐 음악원의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마르타 아르헤리치,마우리치오 폴리니,이그나츠 모라베츠 같은 매우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낸 그는 스승으로서의 높은 명성을 구가했다.

지휘자 아고스티노 오리치오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마에스트로는 열정적으로 제자들을 이끌었다.여기에는 재능이 떨어지는 학생들도 포함된다. 미켈란젤리는 자신이 가리치는 대상이 누구이건 간에 차별하지 않았다.”

그는 ‘아카데미아’라는 음악학교를 브레시아,볼차노,아레초에 설립하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1965년에는 브레시아와 베르가모에 국제적인 피아노 페스티벌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제자였던 노레타 콘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50년부터 팔년 동안 배웠는데,아레초에서 열린 마스터클래스에는 다섯 번 참가했다. 거기엔 열 여섯 명의 학생들과 피아노 여덟 대가 있었다. 선생님은 연주 자세에 있어 자연스러움을 강조하셨고,손가락의 음색을 다양하게 구사하도록 이끌어 주셨다. 학생들에게 화를 내시는 일이 없었으며,많은 점에서 관대하신 분이었다. 하지만 칭찬은 거의 하지 않으셨다. 선생님께서 존경심을 표명한 유일한 피아니스트는 오직 라흐마니노프 한 사람이었다.”

1977년에 들어서게 되면서 미켈란젤리는 더 이상 가르침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제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겠다. 티칭은 내 인생의 한 부분이었던 만큼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나는 너무 많이 지쳤다.”

1968년 미켈란젤리가 이탈리아에서 연주를 그만둔 배경에 대해 많은 소문이 나돌았다. 그와 친한 친구였던 프란카 페나사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볼로냐에서 연주를 가진 후에 출연료를 경찰에게 압수 당했는데 그는 이 일로 인해 상심했다. 아마도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결국 미켈란젤리는 스위스의 루가노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동향인이라면 아무와도 만나지 않으려 했다. 물론 그는 나중에 이 일을 후회했지만 말이다. 1980년대에 있었던 공연에서 청중이 ‘마에스트로,이탈리아로 돌아 오세요’라고 이구동성으로 아우성쳤고,미켈란젤리는 마음이 움직였다.”

1983년 세르주 첼리비다케(Sergiu Celividache)는 어떤 이탈리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째서 미켈란젤리가 이탈리아를 떠나도록 놔두었는지.우리는 우정과 하모니로 연결된 사이였다. 내가 존경하는 스승은 미켈란젤리가 연주하는 슈만의 <카니발>을 듣고서 ‘독일인도 저정도의 심오함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탈리아가 미켈란젤리를 잃었다는 건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다.”


미켈란젤리는 자선 공연을 종종 했다.
1988년 10월 그는 심장병에 시달리면서도 보르도에서 열린 자선 공연에 등장했다. 오랫동안 지병인 심장병을 앓아온 미켈란젤리는 언제나 공항 근처에 거주했는데,그 이유는 응급 상황이 발생하면 가장 빨리 병원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1988년 대규모의 수술을 받고 잠시 무대에 섰다가 몇 년 후인 1995년 7월 12일 루가노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에 대한 수수께끼는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대중에 노출되는 것을 싫어했던 그는 인터뷰라면 치를 떨었으며,어느 해인가는 베르나에 있는 수도원에서 일년을 은둔하기도 했다. 스포츠카를 광적으로 좋아했으며 등산을 잘 했고,요리도 즐겨했다. 가장 큰 소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리스의 작은 식당에서 손님들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던 그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번은 콘서트장에서 그의 사인을 받으려는 많은 팬들을 뒤로 하고 창문을 통해 외부로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노레타 코시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지만,모든 일에 소극적이었어요. 말주변도 좋지 않았고,어쩌다가 웃었으며,종종 우울해 했다. 아이들에게 공짜로 피아노를 가르쳤지만,제대로 된 스폰서도 구하지 못했다.”

첼리비다케는 미켈란젤리와의 추억 한 토막을 꺼내들었다.

“그는 독특한 사람이었는데 그 자신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번은 런던에서 라벨을 연주했는데,어떤 여성이 대기실로 와서 그에게 질문했다. ‘마에스트로,만약 라벨이 당신의 연주를 듣고 어떻게 말할까요?’ 미켈란젤리는 정중함을 잃지 않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게 중요한가요. 공연은 재미있게 즐기셨죠?’”


타고난 감성을 타고났거나 혹은 종교적인 명상을 해온 사람들만이 '내적인 침묵'이라는 신비스런 경험을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만이 미켈란젤리의 연주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날엔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청중은 최고를 가질 권리가 있다'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단순히 직업에 속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의 한 부분인 것이다. 그리고 재능이나 노력에 의해 결정되는 성질이 아니며 끊임없는 인내가 필요하다. 음악을 한다는 것은 펭귄복을 입고서 청중 앞에서 뽐내는 일이 결코 아니다. 때때로 비인간적인 연습의 노예가 되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직업으로 음악을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지속적인 노력으로 같은 작품을 연구해 왔던 미켈란젤리는 마침내 심오함의 영역에서 움직였다.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과 쇼팽의 거의 모든 작품을 연주했다. 가끔씩 바흐와 텔레만의 <변주곡>을 연주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미켈란젤리는 음악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여기에는 단순히 피아노 연주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 그는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을 때는 라디오를 들었고,특히 실내악과 오페라를 좋아했다.

작곡가 중에서는 바그너에 열광했다. 음악 감독 자크 레제는 크리스마스 여행 때 미켈란젤리의 음악을 처음 들었다. 나중에 그는 미켈란젤리와 함께 일했다.

“그는 내가 알게된 첫 번째 연주자였다.미켈란젤리는 항상 노력했다. 그는 100퍼센트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99퍼센트의 가능성이 있는 것도 거절했다.”

첼리비다케도 미켈란젤리의 성향에 대해 말한다.

“그를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심지어 전문적인 조율사도 피아노를 점검할 수 없었다. 극도로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였던 미켈란젤리는 전세계를 여행할 때도 피아노 두 대와 함께 이동했다.”

로널드 레트클리프는 스타인웨이에 관한 그의 책에서 미켈란젤리를 회상한다.

“미켈란젤리가 해머 하나가 이상하다고 불평을 늘어 놓길래 기술자들이 피아노 뚜껑을 열어 세심하게 조사했지만 무엇 하나 이상한 점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속적으로 불만을 제기했는데,여러 번의 조사 끝에 작은 바늘 하나가 해머 사이에 끼여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한마디로 그는 0.5그램의 무게 차이도 건반에서 가려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프란카 페나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그는 자신의 공연에 만족하지 못했다.매번 형편없다는 말을 하곤 했다. 모든 무대가 그에게는 매번 중요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부러워했지만,미켈란젤리는 모든 사람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실수에 계속 집착했고,나중에는 이를 견디지 못해했다.”


미켈란젤리는 독특한 개성으로 가득 찬 매우 진귀한 음악을 남겨 놓았다. 모든 것이 완벽해서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모든 분석 작업은 의미 없는 것들이다'라고 알도 치콜리니는 말했다. 또한 비평가들은 흔히 말한다.

“미켈란젤리와 같은 피아니스트는 어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 그는 독특한 의식구조를 가진 초자연적인 능력의 소유자이다. 20세기 피아니스트 중 미켈란젤리와 견줄 수 있는 연주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피아니즘은 예술이 도달할 수 없는 숭고한 경지에 도달했다. 그의 테크닉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지만,그의 가슴 속에 있는 천재성은 설명할 수 없다.”

미켈란젤리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1939년 EMI에서 첫 번째 음반을 제작했다. 그라나도스와 그리그의 소품을 담고 있는 이 앨범은 열 아홉 살의 나이를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통찰력이 돋보인다. 1942년에 녹음한 쇼팽의 <마주르카 33번>과 <34번>은 우울한 주제에 초점을 맞추면서 조금은 억제된 느낌으로 연주했다. 알베니스는 미켈란젤리가 스페인 음악과 본질적으로 맞아 떨어지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스페인 정원의 밤>같은 이베리아의 전형적인 레퍼토리들을 미켈란젤리가 녹음하지 않았다는 사실의 확인은 유감스럽다.

초기 앨범 중에서 가장 주목받은 레퍼토리는 바흐의 <이탈리아 협주곡>인데,그의 연주는 생동감 넘치는 신선함으로 가득 차 있으며 특히 왼손 테크닉이 인상적이다. 긴 디미누엔도를 처리하는 그의 솜씨는 디누 리파티(Dinu Lipatti)를 연상시킨다.

미켈란젤리는 1942년에 안토니오 페드로티와 알체오 갈리에라가 지휘하는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슈만과 그리그의 <협주곡>들을 녹음했다. 1948년 카네기홀 데뷔 당시에 녹음한 이 라이브 앨범은 미켈란젤리의 음반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열광으로 꿈틀거리는 감수성을 담고 있다. 우아함과 즉흥적인 열정이 스며들어 있는 이 녹음 이후에 내면으로 침잠하는 스타일로 슈만의 <협주곡>을 다시 녹음했다.

베토벤은 <소나타> 다섯 곡과 <협주곡> 네 곡을 녹음했는데,특히 여러 번 녹음한 <황제>의 라이브 음반들은 사금파리처럼 빛난다. 무엇보다 첼리비다케와 스타인버그와 협연한 앨범이 가장 인상적이다.

미켈란젤리는 베토벤과 쇼팽의 음악에 특히 뛰어났다.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녹음한 <열 개의 마주르카>는 폴란드 농민들의 댄스를 보는 듯한 강렬하고 화려한 인상을 선사한다. 1959년 6월 30일 런던에서 연주한 <소나타 2번>도 그의 주요한 레퍼토리이다.

모차르트 협주곡 중에서는 프랑코 카라치올로가 지휘하는 스카를라티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이 특히 인상적이며,에토레 그라치스의 지휘로 녹음한 도 훌륭하다.

미켈란젤리의 드뷔시 해석은 이상적이고 순수하다. 메모리아(Memoria)가 발매한 마지막 리사이틀 음반에는 드뷔시의 <영상 1, 2권>과 <전주곡 1권>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음색을 정확하게 담고 있는 극소수의 음반중 하나이다. 메모리아는 넉 장의 미켈란젤리 앨범을 세트로 발매했다. 바티칸 홀에서 녹음한 라이브 연주에는 <밤의 가스파르>가 포함되어 있다. 라벨과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을 녹음한 1957년도 EMI 음반은 전설적인 앨범으로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몇몇 음반에는 그의 리허설 장면도 수록되어 있다. 미켈란젤리는 자신의 페라리를 몰고 가듯이 슈만의 <카니발>을 열정적으로 연주했다. 첼리비다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켈란젤리는 생동감 넘치는 칸타빌레와 섬세한 정확성으로 작품의 예술성을 표현하면서도 결코 과장이 없다.”

이러한 동일성은 음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는데 가장 중요하다. 정신 분석학자인 칼 융은 동일성과 대체할 만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숭고한 진실을 체험한 사람이야말로 자신의 삶이 재능으로 채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켈란젤리처럼 말이다.

첼리비다케는 이 마에스트로와의 추억에 대해 힘주어 말했다.

“미켈란젤리와 함께 리허설을 했는데,그의 연주를 듣고 피아니스트의 길을 더 이상 걷지 않도록 해주신 것에 대해 신에게 깊은 감사를 드렸다. 왜냐하면 미켈란젤리의 연주를 들은 후에는 도저히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글|Eric Shoones, 번역|김효진 -

■ 앨범

01. Steinway Legends -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Piano - Steinway


02.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 Mozart,Chopin,Schumann,Beethoven,Brahms, etc
Alceo Galliera, Alfred Wallenstein, Dimitri Mitropoulos,
Edmond de Stoutz, Gianandrea Gavazzeni - Conductor,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Piano,
Anna Maria Casoni, Ferruccio Mazzoli, Franky Dariel


03. Debussy: Preludes (Book 2) /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Piano


04. Brahms:4 Balladen Op.10 / Schubert:Klaviersonaten, Piano Sonata D.537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Piano


05. Chopin - 10 Mazurkas, Prelude Op 45, etc / Arturo Benedetti-Michelangeli
Arturo Benedetti-Michelangeli,Piano


쟈료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