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누 리파티,Dinu Lipatti (1917 - 1950)
루마니아의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과 같은 천재피아니스트조차 부러워했던 천재,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넘어선 고결한 톤과 명확한 기교, 작곡가의 심장을 느낄수 있게하는 곡해석, 그는 정말 많은것을 갖춘 위대한 피아니스트였다.

1950년 10월 16일, 브장송음악제가 열리고 있는 콘서트 홀에 창백한 얼굴의 피아니스트가 매우 힘겹게 걸어나오는 순간 큰 환호가 그를 맞이 한다.

의자에 앉은 그는 바흐의 파르티타 일번을 연주하기 시작하는데 마치 마지막 고해성사를 하듯 한음 한음 경건하고 조심스레 건반을 내리누른다. 이어서 모짜르트의 슬프고 아름다운 피아노 소나타 8번, 슈베르트의 즉흥곡 을 거쳐서 쇼팽의 14 곡의 왈츠연주가 이어진다.

이 피아니스트는 쇼팽의 왈츠 전곡을 자신만의 독특한 배열로 연주하는데 시작은 5번, 끝맺음은 2번이었다. 마지막 2번을 연주하기 바로 직전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른 이 피아니스트는 결국 마지막 왈츠를 연주하지 못하고 무대를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왈츠 2번은 그의 '백조의 노래'가 되고말았다.

이제는 전설처럼 되어 버린 서른셋의 나이로 1950년 귀천한 디누 리파티의 유명한 마지막 연주 장면이다.
당시로선 불치병이었던 백혈병과 싸우며 일궈낸 이 감동적인 연주장면은 매번 항거할 수 없는 감동과 경건함마저 느끼게 한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만큼 쇠약한몸을 이끌고 어떻게 이토록 우미한 음악을 만들어낼수 있었는지.아마도 신이 그에게 내린 마지막 은총의 소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왈츠의 후반부 연주로 갈수록 안타깝게 부치는 힘을 느낄 수 있지만 음악의 광채는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듯 싶었다. 마지막 왈츠 2번 대신 자신의 기도와 같았던 'Jesu, Joy of Man's Desiring'을 연주했지만 이 곡은 음반에는 수록되지 못했다. 연주를 지켜보던 EMI의 저명한 프로듀서 월터 레그는 레코딩 버튼을 누르는 것을 깜빡 잊고 두고 두고 후회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디누 리파티는 1917년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테오도르 리파티는 직업 외교관의 길을 걷긴 했지만 칼 플레쉬와 동문수학한 바이올리니스트로 사라사테의 제자였다.

모친인 안나 라코비셰뉴 역시 피아니스트였으니 리파티는 음악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환경에서 성장한 셈이다. 어린 리파티는 남다른 재능의 소유자였는데 그는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만 한 살이 되기 전에 음악에 맞추어 손뼉을 쳤다. 부모님에게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우던 그는 네 살 때 치러진 자신의 세례식에서는 모차르트의 미뉴에트를 연주할 정도였다.

이러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리파티가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운 것은 열 한 살이 지나서였다.
그의 부모는 한 번 들은 곡들을 그대로 쳐내는가 하면, 즉흥적으로 피아노 소품들을 지어내기도 하는 아들의 천부적인 재능이 정규교육에 시들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부모의 예상은 상당 부분 적중해서 어린 시절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키워진 리파티의 청음과 작곡 능력은 그의 남은 생애 내내 큰 도움이 되었다. 부모의 뜻에 따라 리파티의 음악 교육은 피아노가 아닌 작곡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일곱 살부터 그는 미하일 요라에게 작곡을 배웠다.

요라는 훗날 부쿠레슈티 왕립 음악원에서 만난 플로리카 무지세스쿠, 파리 고등음악원의 나디아 블랑제와 함께 리파티에게 영혼의 부모이자 영원한 스승이 되었다.

1932년 부큐레슈티 음악원을 졸업할 당시의 리파티에게 테크닉상으로 루마니아에서 그와 겨룰 수 있는 피아니스트는 거의 없었다.
이즈음 그가 즐겨 연주했던 곡들은 그리그와 쇼팽,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들이었다. 그는 피아니스트인 동시에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등 몇 곡의 실내악곡을 써서 조르주 에네스쿠 상을 받은 전도유망한 작곡가이기도 했다.

1933년 리파티는 최초의 국제 무대인 빈 국제 콩쿠르에 도전했다.
난생 처음 방문한 빈의 거리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었지만 콩쿠르의 경쟁은 예민한 성격의 소년에게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다.

빌헬름 박하우스, 에밀 자우어,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클레멘스 크라우스 등 심사위원들은 그의 걸출한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열 여섯은 국제 콩쿠르에 우승하기에 너무 어린 나이라고 판단하여 1등상을 출전 제한 연령을 꽉 채워 출전한 폴란드의 볼레슬라프 쿤에게 주었다.

심사위원중 한 명인 알프레트 코르토는 "예술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고 격노하면서 심사위원직을 사퇴해버렸다. 그리고 코르토는 자신이 교수로 있는 파리 고등음악원으로 리파티를 초청했다.

1934년 8월 파리에 온 리파티는 코르토에게 피아노를, 파울 뒤카에게 작곡을, 나디아 블랑제에게 작곡과 실내악을 그리고 샤를르 뮌슈에게 지휘를 사사하며 리파티는 점차 원숙한 연주자로 성장해갔다.
스무 살 때인 1937년에는 HMV와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첫 음반도 녹음했다.

클라라 하스킬과 함께
1939년 최고상을 수상하며 파리 고등 음악원을 졸업한 리파티는 고향으로 돌아가 잦아진 공개 연주에 대비하기 위해 하루 12시간씩 연습에 매달렸다. 그렇게나 맹렬히 연습하면서도 그는 베토벤과 같이 자신이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곡의 연주는 완곡하게 사양했다.

1941년 루마니아의 평론가 로메오 알렉산드레스쿠가 쓴 독주회 평은 리파티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연주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음악에 깊숙이 숨겨진 표현들을 리파티처럼 신중하고 사려깊게 재현해내는 피아니스트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 자신이 뛰어난 비르투오소임에도 불구하고 리파티는 연주회의 프로그램을 '소박한' 테크닉만을 필요로 하는 곡들로 주의깊게 엄선한 것 같다.
그는 독주회 내내 손가락의 기교가 아니라 음악 속에 담겨진 시적 감흥, 그리고 그 심연에 깔린 영감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나는 음악에 봉사하는 사람이다"라는 자신의 고백처럼, 리파티는 음악 앞에서 항상 겸손했으며 겉으로 드러난 기교보다는 그 속에 담긴 심오한 정신을 드러내는 연주를 추구했다.
음악평론가로도 활동했던 그가 가장 가혹한 비평을 쓰는 경우는 바로 자신의 기교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연주자들을 대할 때였다. 리파티의 겸허함은 그 자신이 즉흥연주의 대가이면서도 즉흥 연주를 하지 않았다는데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이런 신중함이 지나쳐서였을까. 소년 시절부터 예민했던 그는 성년이 된 후로 차츰 심해지는 무대 공포증에 시달렸다.
막상 무대에 나가서는 놀라울 정도로 고요하고 침착한 무대 매너를 보여주는 그였지만 연주 며칠 전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가 하면 연주 직전에는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뜨거운 물병으로 손을 데워야만 했다.

1940년대가 되면서 리파티의 일정은 더욱 바빠졌다.
독일,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에서 연주 요청이 쇄도했다.
당시 평론가들은 입을 모아 바흐와 브람스, 쇼팽, 슈만, 스카를라티 등의 피아노 곡에 있어서 리파티의 해석은 독보적인 경지에 올랐다고 평가했다.

20대 후반이라는 일천한 나이도 이제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리파티는 호리호리한 체구에 걸맞지 않게 '레슬링 선수의 어깨와 팔'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바흐와 마찬가지로 한 번에 12도의 건반을 짚을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받은 영재 교육과 독일에서의 요라, 무지세스쿠의 가르침, 코르토와 불랑제로부터 흡수한 프랑스적 연주 경향들은 그를 말 그대로 전인적인 연주자로 성장시켰다.

이밖에 슈나벨, 피셔, 토스카니니, 카라얀 그리고 리파티가 '스승 중의 스승'이라고 부른 에네스쿠 등 당대 음악인들과의 교류도 중요한 정신적 자양분이 되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리파티가 나이를 뛰어 넘은 완벽한 연주자가 된 것은 타고난 재능에 더한 그 자신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었다. 결코 스스로의 연주에 만족하지 않는 완벽주의와 함께 악보를 '신앙 고백이자 성경'으로 생각한 연구 자세가 바로 리파티라는 뛰어는 연주자를 탄생시킨 것이다.

리파티 연주의 또 하나의 비밀은 약박에 대한 연구와 치밀한 페달링에 있다.
바흐나 슈만, 만년의 쇼팽 왈츠 등의 음반을 들어보면 작곡가를 막론하고 리파티의 연주에는 자연스러운 '노래'가 살아 있다. 이 비결은 바로 리듬, 특히 약박의 처리와 페달링에 있다.

리파티는 강박보다 약박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의 문제가 곡의 생명력을 좌우한다고 믿었다. 또 그래프로 그려질 정도로 신중하고 정교한 페달링은 듣는 이로 하여금 피아노가 건반악기라는 사실을 잊게 할 정도이다.

1943년 제 2차 세계 대전 중인 유럽의 전황은 점차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단지 루마니아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의 연주를 폄하하는 나라도 생겨났다. 루마니아의 정치적 상황에 위협을 느낀 리파티는 북유럽 순회 연주를 마치고 연인인 마들레느 칸타쿠치노와 함께 스위스 제네바로 향했다.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다.

무엇이든 풍족하게 누릴 수 있었던 루마니아에서의 생활은 모두 추억이 되었다.
리파티는 이제 생계를 위해 무대에 서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지인의 도움으로 제네바 음악원의 교수직을 맡지만 외국인인 리파티가 스위스에서 교수가 된다는 것은 불법이었기에 리파티는 교수이면서도 개인 레슨을 할 수가 없어 근근이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연주 요청은 꾸준히 들어왔으나 이즈음 리파티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열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38도 정도의 열이 두세 주일 가량 계속되다가 사라지곤 했다. 의사는 결핵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1943년 겨울부터 병을 이유로 연주회가 취소되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의사는 그에게 연주 횟수를 줄이고 요양할 것을 권했고, 달리 방도가 없었던 리파티는 마들레느와 함께 스위스의 휴양지인 몬타나로 향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계속 되었고 루마니아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그의 병이 결핵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점이었다. 그의 병은 아무런 치료 방법도 없는 사실상의 불치병인 백혈병이었다.

1944년 봄 자신이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음을 알아차린 리파티는 눈앞에 닥쳐온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의지를 가다듬어 병마에 맞섰으며 건강이 허락하는 대로 최선을 다해 연주를 해냈다. 초기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제네바 음악원의 교수직도 발병 이후로는 더욱 열성적으로 매달렸다.

뜻밖에 병세는 일시적으로 호전되어 1946년의 영국 순회 연주는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그와 절친한 친구가 된 EMI의 명 프로듀서 윌터 레그는 1947년 런던에서 연주와 녹음을 하자는 제의를 해왔고, 1946년과 47년 시즌에 리파티는 60여 회의 연주를 소화해낼 수 있었다. '신의 도우심으로 병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라고 리파티는 편지에서 쓰고 있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 앞에서 그의 희망은 너무나 무력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병마는 다시 맹렬하게 그의 육체를 침투해왔고, 방사선 요법을 사용해 보았지만 부작용이 심각했다. 리파티는 지독한 현기증과 두통, 구토에 시달려야 했고, 이대로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그를 점점 옥죄기 시작했다.

연주곡을 고를 때도 기교와 힘을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곡을 우선시하게 되었고, 더 이상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같은 대규모의 곡은 연주할 수 없었다.

병과 씨름하는 와중에서도 연주를 중단하지 않은 탓에 그의 양팔은 무섭게 부어올랐다.
청중들은 무대에서 꿈처럼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주는 이 천재 피아니스트가 얼마나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놀랍게도 이 당시, 아니 그가 사망한 해인 1950년의 녹음에서조차 병마의 흔적은 단 한 점도 보이지 않는다. 죽기 다섯 달 전인 1950년 7월에 녹음한 쇼팽의 왈츠, 마주르카, 녹턴에서도 리파티는 자유로운 리듬, 영혼을 꿰뚫는 듯한 영롱한 타건, 섬세하고 투명한 노래를 구현해내고 있다.

이즈음 절친한 친구가 된 의사 사라신과 드부아페레가 항상 리파티의 곁을 지켰는데, 1948년 봄에는 이탈리아에서 순회 연주가 열렸다.
리파티는 바쁜 일정 짬짬이 스위스의 작은 시골교회에서 연주하기를 즐겼는데 이럴 때면 꼭 연주료를 자선단체에 기부하곤 했다.
파리 연주회에서 한 가난한 음악 애호가가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종일토록 걸어서 파리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무대에까지 설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친지들의 충고에 그는 '한 사람이라도 내 연주를 들으러 와 준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냐'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1948년 여름 방사선 요법의 부작용으로 리파티의 건강은 더욱 나빠졌다.
왼팔의 혈전증이 악화되면서 팔은 보통 사람의 서너 배 두께로 부어올랐다. 부은 팔을 숨기기 위해 특수하게 제작된 연주복을 입어야 할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도 연주와 녹음은 계속되어 바흐의 <코랄>과 스카를라티의 <소나타집>,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슈만의 <피아노 소나타와 협주곡> 음반이 속속 출시되어 폭풍우같은 반응을 일으켰다.

Madeleine Lipatti, Dinu Lipatti in Montana 1946
Madeleine Lipatti, Maria Martin, Dinu Lipatti in Montana 1946

1949년 리파티는 마들레느와 둘 만이 참석한 조촐한 결혼식을 치뤘다.
이 해에 더 이상 학생들을 가르칠 기력도, 시간도 남아 있지 않아 제네바 음악원의 교수직을 사퇴했다.
공개 연주는 주로 바흐와 모차르트, 슈베르트, 쇼팽 등으로 구성되었고, 그의 건강이 좋을 때는 가끔 슈만과 바르토크도 포함되었다.

고통스런 방사선 요법의 횟수만도 1백 회가 넘자, 리파티는 마침내 희망을 포기하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다.
의사 드보아페레는 저명한 연주자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서 막 개발된 백혈병 치료제인 코치손을 들여왔고, 1950년 코치손을 복용한 리파티의 병세는 기적적으로 나아졌다. 이 해 여름 그가 여러 장의 음반을 녹음한 것도 코치손의 약효에 힘입은 덕이었다. 리파티는 그동안 기피해 온 베토벤의 <'발트슈타인' 소나타>를 녹음하였고,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에 서는 푸르트뱅글러와 슈만의 협주곡을 연주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브장송 연주회 당일인 1950년 9월16일 리파티의 건강은 급작스럽게 나빠졌다. 의사와 아내, 친구들 모두가 독주회를 말렸다.
하지만 리파티는 반드시 청중과의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연주를 서너 시간 앞둔 저녁, 그는 기절했다가 주사 기운에 간신히 깨어났다.

연주회장의 계단을 오르기조차 힘겨워했다는 리파티가 어떻게 바흐의 <파르티타>와 모차르트 <피아노 소타아 A단조>, 슈베르트의 <즉흥곡> 등을 연주할 수 있었을까. 일시적이나마 기운을 회복하기 위해 너무도 많은 주사를 맞아서 리파티의 얼굴은 마치 자동인형처럼 무표정했고, 청중들은 흐느낌을 참지 못했다. 결국 쇼팽의 <왈츠> 전곡 중 마지막 2번을 마치지 못한 브장송 연주회 실황은 EMI의 실황녹음으로 출반되어 아직도 듣는 이들을 눈물짓게 만든다.

브장송 연주는 리파티 자신의 예감대로 백조의 노래가 되고 말았다.
그의 생명의 불꽃은 브장송 연주회 후 석 달도 채 지속되지 못했다. 알프스의 찬 겨울바람이 제네바에 몰아치던 1950년 12월 2일, 리파티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눈을 감았다. 언제나 음악의 봉사자가 되기를 원하던 숭고한 생명이 이승을 떠나는 순간, 스피커에서는 베토벤의 현악 4중주가 나지막히 울리고 있었다.


■ 앨범

01. Chopin - 14 Valses,Barcarolle Op.60,Nocturne Op.27 no 2,Mazurka Op.50 no 3
         Dinu Lipatti, Piano


02. Chopin & Grieg - Piano Concertos / Dinu Lipatti
        Dinu Lipatti, Piano


03. The art of Dinu Lipatti / Bach, Scaratti, Mozart, Chopin, Listz, Lavel, Enesco
         Dinu Lipatti, Piano


04. Dinu Lipatti - Besancon Recital (Lipatti's Final Recording)
         Dinu Lipatti, Piano


05. Conpin - 14 Valses, Nocturne Op.27 No.2, Mazurka Op.50 No.3
         Dinu Lipatti, Piano


쟈료 출처 : 음악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