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켐프(Wilhelm Walter Friedrich Kempff, 1895 - 1991)
독일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20세기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해석의 전형은 흔히 빌헬름 박하우스와 빌헬름 켐프의 양대 산맥으로 이야기된다. 이를테면 이들의 연주와 해석이 독일 음악의 가장 전통적이고도 순수한 계승이라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19세기 말엽에 출생했고 20세기 초엽부터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여 독일 음악의 합리적 전통을 되새기는 작업을 이행했다.

특히, 빌헬름 켐프의 레퍼토리는 바흐에서 모차르트와 슈베르트를 거쳐 브람스에 이르는 고전 음악의 핵심들. 그 중에서도 베토벤에 대한 강렬한 추억을 남겼다.

음악적 구성력이 뛰어나고 역동적인 동시대의 ‘라이벌’ 빌헬름 박하우스에 비하여 강렬함이 뒤처진다는 얘기가 있고 바로 그 점이 러시아의 에밀 길레스와도 대별된다는 얘기가 있지만, 빌헬름 켐프의 타건은 베토벤이 고전주의의 완성자이지만 동시에 낭만주의의 비조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그의 피아노 소나타가 대체로 음악적 양식의 완성보다는 ‘개인적 독백’에 가까운 측면이 있음을 고려한다면, 빌헬름 켐프의 피아노는 베토벤의 가장 은밀한 서정과 닮아 있다.

빌헬름 켐프는 1895년 독일 브란덴부르크의 위테르보크에서 태어났다.
루터파를 신봉하는 오르가니스트 가문 출신인 켐프는 일찍이 피아니스트로 아주 독보적인 천재성을 드러내보였다.

천재들이 거의 그러하듯 켐프 역시 어린 시절 수많은 일화를 만들었다.
그 중의 하나. 9세 때 베를린 음악학교의 시험을 볼 때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암보로 이조(移調)하여 연주해서 교수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일이 있었다.

1905년부터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리스트의 전통을 이어받은 하인리히 바르트(Heinrich Barth)에게 배웠는데, 한스 폰 뷜로의 제자였던 바르트가 양성한 제자들로는 특히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을 꼽을 수 있다. 스무 살 때 켐프는 피아니스트, 오르가니스트와 동시에 작곡가로 활동했다. 이 학교를 졸업한 뒤엔 베를린 음악대학으로 다시 진학하여 피아노, 오르간, 음악학을 연마했다. 물론 재학 중에도 이미 직업적인 아티스트로 착실히 명성을 쌓아 올려갔다.

하지만 1916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첫 협연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고, 베를린에서 개최된 첫 독주회에서 베토벤 소나타 ‘함머클라비어’와 브람스의 ‘파가니니의 변주곡’등을 연주하면서 진정한 피아니스트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17년(22세)에 최고의 영예인 '멘델스존 상'을 받고 졸업했고 본격적인 연주활동에 나섰다. 1917-1918년 켐프는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순회연주를 한 바 있다.

졸업 이듬해에 베를린·필의 독주자로 계약을 맺었고, 1920년에 대망의 첫 레코딩을 했다. 이 당시 켐프는 시벨리우스와 푸르트뱅글러, 달베르, 니키슈와의 우정을 유지해나갔다.

1920년 스칸디나비아 반도 순회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켐프는 베토벤의 ‘에코세이즈’와 ‘바가텔’을 수록한 첫 음반을 내놓는다.

이어서 1924년부터 1929년까지는 슈투트가르트의 베르텐베르크 국립음악원의 학장직을 맡았고, 1931년부터 1941년 사이에는 에트빈 피셔와 발터 기제킹, 에두아르트 에르트만, 엘리 네이 등과 함께 포츠담에서 서머 스쿨을 열기도 했다.

가르치는 일과 연주활동을 양립시킬 수 없을 만큼 그는 분방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포츠담 음악연구소의 마스터 클라스를 이끌면서 연주활동을 펼쳤고, 1931년엔 독일 예술원 회원으로 추대됐다.

제2차 대전후 잠시 작곡에 전념하다가 다시 연주 일선에 나섰고, 베토벤 소나타 전곡의 연속 연주와 전집 레코딩의 위업을 달성하여 세계최고의 베토벤 아티스트라는 명예를 안았다.

빌헬름 켐프는 교육자, 작곡가(네 개의 오페라, 두 개의 교향곡, 두개의 현악4중주와 바이올린 협주곡등을 작곡했다.)로 활동하면서 이따금 켐프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고, (1928년 바흐의 ‘푸가의 기법’을 지휘했다.) 즉흥에 강한 오르가니스트로 나타나는가 하면, 게오르크 쿨렌캄프와 파트너를 이루어서는 실내악 연주자로, 로테 레만과 함께는 특히 피아노 연주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시기에 켐프는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일본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게 되고, 특히 1938년에는 파리에서 연주했다. 그러다 전쟁 이후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더 이상 활발한 연주활동이 불가능해지자(히틀러 통치시절 켐프는 수동적인 태도를 취해 몇 년간 유럽무대에서 고립되었다), 켐프는 다시 작곡을 시작했고, 자신의 회고록 집필에 들어갔다.

1950-1951년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을 처음으로 완주한 그는 일본 순회공연을 마치고 나서, 1954년부터는 독주회와 실내악 연주(특히 피에르 푸르니에와 예후디 메뉴인, 파블로 카잘스, 헨릭 셰링 등과 함께)활동을 했다.

단지 1964년에만 이루어진 그의 미국데뷔무대는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낸다.
만년에 병마에 시달린 켐프는 베토벤을 조심스럽게 연주하고, 슈베르트의 소나타들을 다시금 새롭게 발굴해내고 난 뒤에는 다시 바흐로 회귀한다.

그는 낭만 레퍼토리를 연주할 때조차도 오르가니스트였을 때 연마된 명료함과 엄격함의 교훈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타고난 즉흥가인 그는 현란한 테크닉을 선보이며 각 작품이 명하는 바에 따라 연주를 펼쳐나갔다.

무엇보다 ‘힘있고 열정적이다’ 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의 연주는 몇십년 동안 많은 발전을 거듭해 왔고, 시간이 흐르면서 친근한 톤을 유지하면서 더욱 진지해지고 정묘해졌다. 프레이징의 기술과 극도로 정제된 터치에 힘입은 그의 연주는 맑고 순수하기까지 하다.
브렌델은 “켐프가 마치 아이올로스의 하프같았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말인즉 바람이 일면 항상 울릴 준비가 되어 있는 하프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그는 “켐프는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고 말하기도 했다.

소리의 균형을 잘 전개시켜나가는 감각의 소유자인 켐프는 또한 분위기와 강약의 변화에 대해서도 탁월한 감각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듯 자연스러움과 간결함이 특징인 켐프의 연주기술은 놀랄 만한 역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랫동안 독일 인문주의 전통의 전형으로, 또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리스트와 브람스의 스페셜리스트로 간주되어온 그이지만 외국의 찬미자들의 눈에 비친 그는 독일인도, 독일 피아니즘을 계승한 연주자는 아니었다. 푸르트벵글러와 마찬가지로 켐프는 그리스 고전의 빛에서 독일 문화를 꽃피운 것처럼 보였고 오로지 아폴론적인 명료함을 우선시했다. 그의 생기 넘치고 꿈꾸는 듯한 음악성과 이야기를 가볍게 이끌어가는 자연스런 배합등은 음악적 직관력과 초감성, 판타지 그리고 부드럽고 광채가 서려 있는 거의무형의 소리 미학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슈만 작품에서조차도 거의 성가신 탐험을 하지 않는 켐프는 연주시에 타이탄적이거나 형이상학적 차원, 더 나아가 영감성을 결코 함부로 부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연주는 감동적이며 거침없고 동시에 유연한 것이다.


그는 주로 베토벤의 32개 소나타와 다섯 개의 콘체르토를 연주하며 생활을 해나갔으며, 지칠 줄 모르는 슈베르트 소나타의 개척자였으며, 정작 자기 나라에서는 좋게 평가받지 못하고 연주되지 않았던 쇼팽, 리스트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슈베르트의 소나타 전곡 녹음에서 보여준 그의 연주는 빛을 발하고, 유니크한 간결함의 앙상블을 들려준다.

켐프의 연주에서는 천재적인 드라마티즘, 아라우와 제르킨과 리히테르의 연주에서 엿보이는 정묘한 콘트라스트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처음의 참모습상태에 있었던 것처럼 텍스트에 표시된 대로 연주하는데, 가장 자연스러운 템포와 제일 알맞은 음색을 택한다. 연주자와 텍스트간의 바로 그러한 상호침투 작용이 청중들을 최면상태로 몰고 가는 것이다.

켐프가 리스트 연주에서 감정을 자유롭게 해방시키고 아름다움의 비밀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간결함을 추구하는 연주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950년에 녹음한 리스트의 ‘순례의 해’와 두 개의 ‘전설’에서 켐프는 몽상가적이고 현실을 외면하는 시인의 모습으로 연주를 들려주어 이 녹음은 연주 역사상 가장 놀랄 만한 최정상의 연주로 표시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즉흥연주에 뛰어났던 켐프는 먼 훗날까지 작곡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버리지 못했다. 오르가니스트로서, 교육자로서 '켐프' 역시 피아니스트 켐프를 항상 따라다녀야 했다. 이런 점 때문에 그가 집중적인 손가락 기교 훈련에 몰두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베를린 음대에서 캠프의 피아노 교사는 하인리히 바르트였다.
훗날 바르트는 켐프를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하는데, 이는 중대한 상징성을 띤다.

바르트는 한스 폰 뷜로의 수제자로서 음악에 있어서의 독일정신을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받았는데다, 거슬러 올라가면 한스 폰 뷜로 역시 리스트와 체르니에게 후계낙점을 받았고, 체르니의 '줄기'는 베토벤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정통, 원조, 종가 이런 것들은 이때부터 켐프가 짊어져야 할 세상의 기대였다.


<Helmut Muller-Bruhl und Wilhelm Kempff in der Tonhalle Zurich 1964>

먼 훗날 켐프는 어릴 때의 기억을 이렇게 회고했다.

"...아버지가 무거운 악보를 들고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피아노 위에 올려진 갖가지 악상지시가 마법의 기호처럼 느껴졌다.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이건 누가 쓴 거죠?'라고 물었다. 당연히 하느님이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그러나 아버지는 '베토벤이란다'라고 대답했다.... "



■ 앨범

01. Beethoven - The Piano Sonatas / Wilhelm Kempff
Wilhelm Kempff, Piano


02. Beethoven - The Late Piano Sonatas / Wilhelm Kempff
Wilhelm Kempff, Piano


03. Beethoven - Piano Sonatas Nos 8, 14, 21 & 23 / Wilhem Kempff
Wilhelm Kempff, Piano


04. Brahms - Piano Sonata; Schumann - Fantasie, Papillons / Kempff
Wilhelm Kempff, Piano


05. Schumann, Beethoven, Brahms, Chopin / Kempff, Gigler
Wilhelm Kempff, Piano


06. Schubert - The Piano Sonatas / Wilhelm Kempff
Wilhelm Kempff, Piano


쟈료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