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 1904 ~1989, piano)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음악가이자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거장이었다. 그의 비범한 기교와 작품 자체에 대한 해석력, 그리고 건반을 통해 만들어내는 감성은 청중을 매료시켰다.

마치 무슨 징조처럼 키예프의 뮤직 스트리트에서 태어난 호로비츠는 우크라이나에서 아마추어 음악가인 어머니에게, 그리고 키예프 음악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피아노의 명인 펠릭스 블루멘펠트 (Felix Blumenfeld)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 어린 건반악기 연주자는 원래 작곡가가 되는 것이 소원이어서 밤마다 '신들의 황혼 (Gotterdammerung -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4부)' 악보를 배개 밑에 깔고 잠이 들곤 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터지면서 부르주아인 그의 가족 재산이 볼셰비키에게 몰수당하자 당시 십대였던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무대에 서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1925년에 그는 독일 유학을 가기 위해 러시아를 떠나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5천 달러 상당의 돈을 신발 밑창에 깐 청년 호로비츠는 소련 국경 수비대원 앞에서 자신이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숨기려고 애썼다. 훗날 호로비츠는 서류를 검사하던 수비대원이 그에게 "절대 조국을 잊지 말게"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고 회고했다.

그 뒤 2년 동안 호로비츠는 화려한 연주 솜씨로 유럽 도시의 청중을 사로잡았다.
1928년, 그는 카네기홀에서 미국 데뷔 무대를 가졌고 토머스 비첨 (Sir Thomas Beecham)의 지휘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연주했다. 한참 혈기가 넘쳤던 호로비츠는 비첨이 지휘하는 곡이 너무 처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관객들 역시 활기 넘치는 연주를 좋아한다고 느낀 그는 비첨과 결별을 선언했고 뉴욕 필 하모니의 나머지 연주자들도 놀라서 연달아 그의 뒤를 따랐다.

손가락이 무서운 속도로 건반 위를 날아다니는 연주로 유명했던 이 거장은 오케스트라에 악보보다 몇 박자 앞서 연주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가 나중에 시인했듯이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했던 것보다 더 크게,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은 음표"를 연주하게 만들었다.

관객들과 비평가들은 그를 천재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호로비츠가 선보인 새로운 스타일의 화려한 피아노 연주법은 무엇보다 청취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러나 호로비츠가 모든 사람의 취향을 만족시킨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그가 너무 독선적이며 과장이 심하고, 본래의 작곡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의 작곡가이자 비평가 버질 톰슨 (Virgil Thomson)은 호로비츠가 제멋대로 구는 음악가라는 냉정한 평가를 내림으로써 그에게 치명타를 날렸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호로비츠의 연주 스타일과 곡 해석은 그처럼 연주하고자 노력하는 - 그러나 그렇게 성공적이지는 못한 - 세대에게 모델이 되었다. 자신의 빠른 연주법과 소리 크기의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정교한 테크닉에 대해 그는 "처음부터 그랬습니다"라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그는 테크닉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사실 그 테크닉은 그만의 독특한 표현 양식이었다. 그는 두 팔을 평평하게 편 채 조금 낮은 자세로 연주했다.

한편 그의 개인적인 삶 역시 그의 음악만큼이나 전통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호로비츠는 1933년에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Arturo Toscanini)의 딸 완다와 결혼하여 56년 동안 파란만장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면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녀를 배신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는 독특한 성벽을 지닌 남자였다. 그는 깔끔한 나비넥타이를 좋아했고, 성인이 된 뒤로는 거의 매일 도버 솔 (Dover sole - 살짝 구은 넙치에 소금과 레몬 즙을 뿌려 먹는 고급 요리)을 먹었으며, 일요일 오후 4시 공연만을 고집했다.

1928년에 발표된 그의 첫 번째 레코드는 팝 차트에 올랐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음반에 대한 복제를 중단시킬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음으로써 음악 산업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는데, 엄격한 예술가였던 그는 이 거부권을 몇 번 행사했다.

그의 활동 기간 내내 음악을 둘러싼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그의 때 이른 은퇴 역시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이 거장에 대한 전기 작가의 말을 믿느냐 아니면 이 거장의 말을 믿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의 은퇴 이유는 심각한 정서 장애가 원인이라는 설과 그저 단순한 게으름이 원인이라는 설로 갈렸다.

후기 낭만주의 음악을 공연하는 것에 상당히 만족했던 그의 장인 토스카니니와 달리 호로비츠는 더 현대적인 음악에 도전했다. 그는 한순간도 리스트나 쇼팽을 멀리한 적이 없었지만 자신의 다양한 레퍼토리 안에 스크리아빈 (Skryabin)과 프로코피에프 (Prokofiev), 카발레프스키 (Kabalevskiy) 그리고 슈만을 포함시켰다.

이 외에도 '카르멘'에서 발췌한 곡을 비롯하여 미국 시민이 된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는 1944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존 필립 소사 (John Philip Sousa)가 쓴 미국 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 (The Stars and Stripes Forever)'를 자신이 직접 편곡하여 연주했다.

그는 연주회장의 객석을 가득 채우는 일에서든 (그는 매진이 되지 않으면 연주를 하지 않았다) 1965년에 열린 화려한 컴백 무대에서든 자신이 시도한 모든 일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그는 12년의 휴식기를 가진 후 카네기홀에서 컴백 무대를 열어 열광하는 청중에게 혼신의 연주를 들려주었다.(그날 연주회도 물론 일요일 오후 4시였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창의력의 소유자였고 사회적으로는 수줍음 많은 망명자였던 그에겐 이제 더 넘어야 할 산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1986년에 소련의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를 실시하자, 무명의 한 국경 수비대원이 한 마지막 말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던 82세의 피아니스트에게도 마침내 고국 러시아에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음악을 사랑하는 고국에서 호로비츠는 왕족 같은 대접을 받았고, 그의 귀환은 성공적이었다. 모스크바음악원의 그레이트홀에서 열린 감동의 콘서트에 참석한 사람이나 혹은 레닌그라드에서 열린 두 번째 콘서트에 참석하여 눈물로 그의 귀환을 환영한 콘서트 애호가들은 입장권을 구하기 위해 공연장 밖에서 밤을 새워야 했다. 모스크바에서는 티켓을 구하지 못한 학생들이 홀 안으로 들어가려고 서로 밀치는 과정에서 작은 소란이 일기도 했다.

늘 그랬듯 호로비츠의 연주는 관객을 사로잡았다.
한 비평가는 이를 두고 "그것은 일종의 종교적 체험과도 같았다"고 묘사했다.
호로비츠는 모스크바에서 공연한 지 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탈리아에 있는 토스카니니의 영지 안에 묻혔다.
그 한계가 거의 무한함을 그 스스로 입증한 피아노 국가의 한 시민으로서.

글 출처 : 클래식의 거장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