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굴드, Glenn Herbert Gould (1932 - 1982)
■ 굴드의 생애
굴드는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1932년 9월 25일에 음악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그 (Edvard Grieg)는 굴드 외고조부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굴드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바이얼리니스트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오르간과 피아노를 연주했다.

많은 전기에서 굴드의 어머니를 '피아니스트'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연주회를 가지는 음악가는 아니었다. 다만 그의 어머니는 굴드가 10살이 될 때 피아노를 가르쳐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굴드가 세 살 되던 해 그는 악보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섯 살 때 그는 작곡을 시작했고, 가족과 친구들을 위한 조그마한 작품을 연주했다. 여섯 살 때에 굴드는 요제프 호프만의 마지막 토론토 연주회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이 연주회는 소년 굴드에게 깊고 중요한 인상을 남겼다고 전한다.

캐나다의 저명한 작가인 로버트 풀포드(Robert Fulford)는 굴드의 이웃집에 살던 아홉 살 때에 그를 만났다 (당시 굴드 역시 아홉살이었다). 그는 " 어린아이인데도 글렌은 고독했다. 왜냐하면 그는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 미친듯이 연습했다. 그에게는 무시무시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음악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그것은 완전한, 무조건적인 느낌이었다.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고 적고 있다.

10살이 되던 해에 굴드는 토론토의 로얄 콘서바토리에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피아노 교사는 알베르토 게레로(Alberto Guerrero)였다.

굴드는 또한 프레데릭 실베스터에게 오르간을, 레오 스미스에게 음악이론을 배웠다.
그는 12살 때인 1944년, 음악원을 수료하고 키바니스 음악페스티벌의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하였다. 1945년에는 로얄 콘서바토리의 독주자 종합시험을 통과하여 완전한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수준에 도달했음을 인정받게된다.

14살 되던 1946년, 그는 음악이론시험에 합격하고 최고성적으로 졸업장을 수여받았으며 알베르토 게레로에게 1952년까지 계속해서 피아노를 배우게 된다.
당시 10대의 굴드에게 중요한 영향을 준 인물은 아르투르 슈나벨 - (굴드는 "피아노는 슈나벨에게 있어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베토벤에 대한 접근이었다" 라고 평했다) - 과 로잘린 투렉의 바흐 녹음 그리고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였다고 전한다.

1946년 그는 로얄 코서바토리에서 베토벤의 4번 협주곡을 연주하여 독주자로 데뷔한다.
이 연주에 대해서 굴드는 그 자신이 슈나벨의 녹음을 2년이 넘도록 소유하면서 듣고 있었고 그 음반의 모든 뉘앙스를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연주하는 데에 다소 각오가 필요했다고 기록해 두었다. 다음 해에 굴드는 같은 협주곡을 토론토 심퍼니와 연주하였고, 어떤 비평가는 "그는 교수들 사이에서 한 명의 어린아이였지만 그들과 토론을 할 수 있을 만큼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굴드의 공식적인 첫 번째의 리사이틀은 1947년에 스카를랏티, 베토벤, 쇼팽 그리고 리스트로 짜여진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졌다.
굴드가 국외에 알려진 것은 1955년 미국의 워싱턴 D.C와 뉴욕에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한 이후였다. 그는 이 한 곡의 연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는 전격적으로 그와 전속 계약을 맺고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시작으로 많은 곡목을 녹음하게 된다.

그의 데뷔 음반인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은 1955년 6월에 일주일간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 이때 그가 보여 준 기벽은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초여름 날씨인 6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굴드는 코트를 입고 머플러와 베레모, 그리고 장갑까지 착용한 채 스튜디오로 나타났다. 그리고 뉴욕의 물이 마실 만한 것이 못된다는 생각에서 캐나다에서 부터 들고 온 두병의 물병과 다섯 병에 이르는 약병까지 가지고 있었다.

녹음을 시작하기 전에 굴드는 근육을 풀기 위해서라며 따뜻한 물에 손을 20여분이나 손을 담갔다. 피아노 의자도 캐나다에서 직접 가지고 왔는데, 그 의자 또한 걸작이었다.

굴드의 큰 키에 어울리는 나지막한 의자로 네 개의 다리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장치가 달려 있었고 두 손을 자유롭게 교차시킬수 있게 한 부분을 고정시켜 놓은 의자였다.

하지만 더욱 가관인 것은 연주를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황홀한 표정에 눈을 지긋이 감고 있다가도 갑자기 흥분되어 온통 얼굴을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기도 하고, 몸을 계속 흔들어 대면서 끙끙거리는 소리로 계속 곡을 흥얼거리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연주 모습을 보여 주었고, 데뷔 앨범 녹음에서의 그의 이러한 연주 모습은 스틸 사진으로 발표되어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가 곡을 흥얼거리는 소리는 이후 녹음 기사들의 골칫거리가 됨과 동시에 그의 음반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굴드의 트레이드마크로 기억하게 되었다. 심지어 굴드의 끙끙거리는 콧소리와 삐걱대는 의자 소리는 오디오 기기와 녹음 상태를 판별하는 하나의 기준으로까지 활용되기도 하였다.

확실히 새롭게 리마스터링하여 CD로 제작한 음반들에서는 이전의 LP들보다 이런 소리들이 더욱 또렷하게 들린다.

이후 그는 1956-7년 시즌에 미국 각지에서 연주 여행을 다니며 대단한 인기를 얻었고, 이어서 1957년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독주회를 개최함으로써 2차 대전 후 최초로 소련 땅을 밟은 캐나다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연주에 대한 소련에서의 평가는 이후 거의 전설로 남게 되었고 젊은 소련 피아니스트들은 가능한 모든 경로로 그의 음반을 구하는데 혈안이 되었고, 바흐 연주에 있어서 그를 모방하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비엔나 음악제에 참가하여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하여 유럽에서도 화려한 데뷔를 하게된다.

그는 이후 1960년까지 소련을 포함한 전 유럽에서도 화려한 데뷔를 하게된다.
계속해서 곡을 입으로 흥얼거리며 한 손만으로 연주하는 부분에서는 계속 지휘를 하는 듯이 손을 흔들고 다리를 꼬았다가 풀었다 하는 그 특유의 기벽이 비판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연주에 관해서는 이제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개성적인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며, 부조니 이후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평을 받으며 유럽 전역에 걸쳐 압도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가 연주회 생활을 청산하고 녹음 작업만을 수행하기 시작한 시기는, 그의 나이 32세 되던 해인 1964년부터이다. 1964년 3월 시카고에서의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그는 캐나다에서 은거하면서 많은 곡을 녹음하면서 라디오와 텔레비젼에도 출연하고 상당히 많은 양의 음악에 관한 글을 썼으나, 공식적인 연주회 무대에는 1982년 그가 5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복귀하지 않았다.

그는 음악을 극히 사적인 예술로 생각했었다.
기술의 발전.즉 음반으로 인해 연주가들은 작품을 최상의 상태에서 연주할 수 있도록 대비할 시간과 자유를 줄 수 있고, 연주회에서 비롯되는 불확실한 여러 상황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연주가 마치 단거리 경주라도 하듯이 질주하고 있을 때 조차도 그는 청중과의 교감으로 말미암은 흥분 상태를 겨냥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음악을 표현하고 있는 고독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음을 쉽게 발견 할수 있다.

그리고 해적판 음반을 통해 들을 수 있는 그의 실황 녹음과 비교해 볼 때 실황연주에서는 굴드만의 개성적인 모습이 상당히 엷게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고, 이러한 여러 점들을 고려해 볼 때 녹음 작업만을 외롭게 수행해 나간 그의 판단을 옳았다고도 말할 수도 있겠다.


1981년에 굴드는 재녹음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26년전에 녹음했던 장소에서 골드베르크변주곡을 두 번째로 녹음했다.
굴드는 변주들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고 보다 큰 전체 속에서 하나의 리드미컬한 파동, 화성, 그리고 근원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개체들로 해석함으로 이전의 녹음과는 전혀 다른 두 가지의 해석을 남겼다.

굴드는 기술(테크닉이 아니라 테크놀로지라는 의미에서)이 만들어주는 가능성을 언제나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첫 번째의 녹음이후 25년간 이루어진 녹음 기술의 놀라운 발전은 굴드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재녹음하도록 결심하게 하는 데에 중요한 동기를 부여했다고 생각된다.

그의 데뷔 레코딩 곡이기도 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신녹음은 그의 마지막 녹음이 된다. 굴드는 이듬해 1982년 10월 4일 토론토에서 51세의 이른 나이에 뇌졸증으로 사망한다.




■ 굴드의 음악
글렌 굴드는 30대 초반에 콘서트활동을 중단하고 레코딩만으로 음악을 함으로써 청중의 기억속에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캐나다가 낳은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찬사를 받는 희안한 피아니스트다.

연주행위가 시간 예술로 1회성을 지닌 것이라는 근본적인 속성을 거부하고 녹음기술로 최고의 연주 작품을 만들겠다는 그의 고집은 하나의 독특한 영역을 구축했다. 20세기의 모든 연주자들 가운데 가장 강한 개성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는 아무래도 글렌 굴드를 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연주 외적인 면에서도 많은 기행을 보여주었고, 연주 자체에 있어서도 다른 연주자들은 상상할수도 없었던 표현을 자유롭게 보여 준 피아니스트가 바로 그였다.


연주 외적인 면에서 보여 준 그의 천재성과 기행은 일단 접어 두더라도 그의 연주에서 보여주는 파격만으로도 그의 강한 개성은 전후무후한 것이었다. 굴드의 데뷔 음반인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처음 출반되었을때 평론가들은 하나같이 "미친놈의 연주"라고 혹평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의 모든 해석과 연주 전통을 깡그리 무시하고 극히 개성적인 아티큘레이션과 미친 듯이 질주하는 듯한 템포로 곡 전체를 일관하고 있는 굴드의 연주는 이제까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음악이기 때문이다.

굴드의 기괴한 모습은 단순히 빠른 템포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남긴 모든 음반에서는 다른 연주자들이 악보를 쫓아 레가토로 연주하는 부분을 스타카토로 연주한다던가 코드를 분산 화음으로 처리하는 일 등을 쉽게 발견할수 있다. 또 템포의 설정에 있어서도 최단 시간의 기록을 깨 버리려는 듯이 광기 어린 속도로 곡을 휘몰아치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오히려 다른 연주자들은 상상도 못할 템포로 느리게 연주하기도 한다.

굴드가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니와 카네기 홀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 4번을 협연할 때의 일이다. 리허설을 할 때부터 번스타인과 굴드는 템포에 대해 서로 대립했었는데 결국 굴드의 고집으로 번스타인이 엄청나게 느린 굴드의 템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건은 연주가 끝난 뒤에 벌어졌다. 연주가 끝나고 박수가 터져 나오는 순간 번스타인은 청중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 방금 연주한 곡의 템포는 제가 원하는 템포가 아니라 굴드가 고집한 템포이니, 템포가 너무 느리다고 생각하셨다고 느끼셨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번스타인이 이런 변명을 늘어 놓고 있는 동안 자신이 원하는 템포로 연주를 끝낸 굴드는 이에 상관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표현으로 연주하는 것 뿐임을 분명히 밝히려는 듯이, 아무런 변명 없이 고독한 모습으로......

굴드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가 보여 주는 기행이 아니다.
그를 단순히 남이 하지 않는 기행만을 추구하는 괴팍한 연주자라고 한 마디로 매도하기보다는 자신이 느끼고 바라는 바대로 작품을 해석하는 예술가의 모습으로 재해석해야만 할 것이다.

어떤 곡이건 그 해석과 연주 방법은 한 가지로 고정될수 있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이제까지 연주되어 온 스타일을 누구나 답습해야 한다는 철칙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굴드의 경우에는 이러한 연주자의 창의성이 극단까지 닿아 있기는 하지만.현대의 음악계와 같이 천편일률적인 콩쿠르 입상용 획일적인 연주만이 난무하는 이러한 시점에 있어서 굴드와 같이 개성적인 모습의 연주자를 음반으로 나마 확인할수 있다는 사실은 더없이 귀중할 뿐이다.

굴드의 연주는 '엑센트릭'이라는 말로 표현할수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명확함, 믿을수 없을 정도로 가볍고 신선한 터치와 스타카토를 바탕으로 듣는 이의 의표를 찌르면서 곡 자체에 전혀 새로운 신선함을 부여하는 그의 연주는, 이제까지 아무도 하지 못했고 이후의 다른 어떤 연주자도 모방할 수 없는 참신함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전의 모든 연주 전통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상태로 자신만의 개성을 망설임 없이 발휘하고 있는데, 음색 자체도 피아노포르테와 같은 독특한 음색을 지향하면서 극단적인 템포와 극히 개성적이고 독특한 음색을 지향하면서 극단적인 템포와 극히 개성적이고 독특한 아티큘레이션을 구사하고 있다.

이러한 굴드의 연주는 비평가들 사이에서 원곡의 왜곡이라는 지적 등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 그가 드러내 주는 엄청난 신선함과 강한 개성, 그리고 이러한 그의 연주에서 드러나는 흡인력은 그 누구도 부정할수 없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연주자 들이 모두 하나의 길을 향해서 있는 동안, 굴드는 연주자의 역할과 한계에 대해 그리고 음악 자체의 본질에 대해 그 누구도 제기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지고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수행한 극히 이례적인 존재였다.

■ 굴드와 바흐/골드베르크
1982년 그의 나이 50세 때 뇌졸증으로 사망할 때까지 많은 양의 음반을 녹음하였는데, 그의 마지막 레코딩은 데뷔 때와 같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다. 살아 있었을 때 유일하게 같은 곡이 재녹음되어 출반된 경우인데, 데뷔시의 충격적인 반응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이 음반에서도 그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고있다.

첫번째 음반에서는 엄청난 빠르기와 비할데 없는 리듬감으로 압도적인 인상을 심어 주었다면, 두번째 음반에서 그는 헤아릴 수 없는 고독을 내적인 성숙성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수 있다.

그리고 굴드 음반 목록의 처음과 시작이 골드베르크 변주곡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과,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구조역시 처음과 끝이 동일한 아리아가 위치하고 있고 그 사이에 30개의 변주곡이 연주되고 있다는 점과 비교하여, 굴드의 생애가 이 곡의 구조와 완벽한 유사성을 갖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굴드와 이 곡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차대전 직후만 해도 바흐의 건반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일은 드물었다. 반다 란도브스카로 대표되던 하프시코드 연주가 곧 바흐 방식이었다. 바흐음악을 피아노로 다룬 연주자는 여류 피아니스트 로잘린 투렉정도다. 이런 전통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온 연주자가 캐나다 태생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였다.

1955년 약관 23세의 굴드가 피아노연주로 발표한 바흐'골드베르크 변주곡' 레코드는 바흐연주사에 신기원을 열었다.
단지 피아노로 녹음했대서가 아니다. 질주하는 빠르기, 개성적 아티큘레이션, 끊어 치는 스타카토와 이어 가는 레가토의 뒤집기, 코드의 분산화음 처리….
당시로선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의 연주였다. 여기에 온갖 기행이 보태져 굴드는 살아서 전설이 됐다.

굴드는 바흐 스페셜리스트다.
굴드의 바흐전집에는 죽기전 한 번 더 녹음한 골드베르크변주곡을 비롯, 평균율-파르티타 전곡, 키보드협주곡, 영국 - 프랑스 - 이탈리아 모음곡, 육성인터뷰를 담고 있다. 굴드는 바흐 외에도 베토벤 - 베베른 - 슈트라우스 - 힌데미트 - 쇤베르크 - 스위링크 - 기본스를 주로 연주했다.낭만곡은 드물다. 하나같이 세상에 초연한, 개성파연주다.

우울증환자였던 굴드는 병균이 옮는다며 남과 악수하지 않았다. 낮에 자고 밤에 일했고, 내키지 않을 땐 연주당일 공연을 취소하기 일쑤였다.

굴드의 콘서트 피아니스트 경력은 9년에 불과하다.
32살때 무대서 은퇴, 레코딩에 주력했다.82년 뇌일혈로 세상을 뜨기까지 굴드가 레코드로 남긴 연주, 그 중에서도 바흐는 템포-프레이즈-다이나믹에서 독보적이다.

바흐전통도, 낭만도, 신고전도, 그렇다고 모던한 접근도 아닌, 바흐 연주사에 독보적인 굴드만의 것이다.

레코딩 작업만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온 굴드인지라 그의 레퍼토리는 상당히 다양 하다. 단 그가 거부한 작곡가들도 있었는데, 쇼팽과 슈베르트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굴드가 피력한 작곡가론은 무척 독특하다.
물론 그가 가장 중요시 하고 많은 음반을 남긴 작곡가는 바흐였다.
하지만 그는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로 바흐 이전 영국의 작곡가인 윌리엄 버드와 오를란도 기본스를 꼽았는데, 이는 이들 작곡가들의 곡의 연주에서 바흐의 곡과는 달리 자유로운 익명성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바흐 외에 모짜르트와 베토벤의 음반도 상당수 남기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모짜르트와 베토벤에 대해 특별한 존경심을 품고 있지는 않은 듯싶다. 특히 그는 베토벤의 경우 초기 작품과 말년의 소나타를 즐겨 연주하고 높이 평가하기는 하였지만 그 나머지 작품 중 상당수의 곡에 대해서는 그리 탐탁치 않게 여긴 듯하다.

베토벤 이후 19세기 초반의 초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작품에 대한 그의 혹평은 극에 달하는데, 그는 그 시기의 곡(쇼팽, 슈만, 리스트 등)에 대해 "의미 없는 극적인 제스처와 과시벽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후기 낭만주의 작품과 현대 음악에 대한 굴드의 열정은 상당한 수준에 이른다.
그 자신이 현대적 어법을 사용한 다수의 현대곡을 작곡한바 있는 데에서도 드러나듯이, 현대 음악에 대한 굴드의 이해는 정확하고 작품에 대한 공감에 가득 찬 것이었다. 또한 굴드 이전에 거의 사장되어 있었던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들 - 리하트르 슈트라우스, 시벨리우스, 그리그 등 - 의 피아노 작품을 발굴했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은 위대하다.

물론 이들 낭만주의 작곡가의 곡과 현대 음악에 있어서도 굴드는 작품의 충실한 재현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바흐적인 맥락에서 지극히 개성적이고 독특한 해석을 선보이고 있다.

"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늘 혼자서 보냈다. 그건 내가 비사교적이기 때문이 아니고, 예술가가 창조자로서 작업하기 위해 머리를 쓰기 바란다면 자아 규제 ― 바로 사회로부터 자신을 절단시키는 한 방식 ― 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작품을 산출하고자 하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사회 생활면에서 다소 뒤떨어진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중에서 -




자료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