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길렐스(Emil Grigoryevich Gilels, 1916 - 1985)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네이가우스 문하의 두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와 에밀 길렐스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높이 평가받는다는 것은 역시 그 스승의 영광이기도 하면서 러시아 피아니즘의 영광이기도 할 것이다.

길렐스는 리히터보다 한 해 늦게 우크라이나의 태어났다. 그는 어릴때부터 발군의 기량을 선보여 17세 때인 1933년, 전 소비에트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때까지 길렐스는 천부적인 재능과 손가락의 힘과 테크닉을 향상시키는 철저한 훈련이 합일점을 이루어 탄생한 사회주의 예능교육의 성공작으로서 인식되고 있었다. 만일 거기에 머물렀으면 연주기계로 전락하는 비극이 일어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행히 네이가우스를 만났다.

1935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그에게 배우게 된 것이다.
게다가 구소련이 자랑스럽게 내놓는 강철 같은 타건과 테크닉을 지닌 청년 피아니스트의 자격으로 서방세계의 콩쿠르에도 나갈 기회가 주어졌다. 그래서 그는 정책적으로 서방에 소개되기 시작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구도의 형성으로 '철의 장막'이 쳐진 이후에도 한동안 유일하게 서방을 오가며 연주를 할 수 있는 구소련의 연주가였다.

■ 출생

에밀 길렐스는 1916년 우크라이나 오데사의 음악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모두 음악가였고 음악을 좋아하는 가풍 덕분에 그는 6세의 어린 나이로 야콥 트카흐(yakob Tkach)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그는 길렐스에게 대단히 엄격하고 절도있는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특히 러시아 피아니즘의 전수자답게 대단히 큰 스케일을 강조하면서 끝없는 반복 학습을 통해 기교를 연마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어린 시절부터 경직되고 틀에 얽매인 교육을 받으며 자란 탓일까?
길렐스의 성격 역시 큰 변화를 추구하지 않았고 자유분방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명랑함보다는 항상 진지하고 사색적이며 때론 대단히 신경질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어릴적부터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웠고 성격적으로 괴팍한 면이 많았으며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을 만큼 변덕이 심했던 그의 친구 리히터(Sviatoslav Teofilovich Richter, 1915~1997)와는 상반된 성격이다.

13세가 되던 1929년에는 최초의 공개 리사이틀을 가졌으며 1930년, 길렐스는 오데사 음악원에 입학하여 베르타 라인크발트(Berta Reingbald)교수에게 사사하였다.

라인크발트 교수와의 수업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길렐스는 우크라이나의 피아노 경연대회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게되는데 특히, 17세가 되던 1933년에는 전 소련 음악콩쿠르에서 우승을 하였다. 그리고 더 큰 공부를 하기 위해 19세에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Heinrich Neuhaus ■ 네이가우스와 만남

모스크바로 간 길렐스는 너무도 유명한 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러시아 피아니즘의 대부격인 하인리히 네이가우스(Heinrich Neuhaus, 1888~1964)였다.
네이가우스 밑에서 수학하며 그는 진정 예술을 이해하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피아니스트로 변모하게 된다. 네이가우스의 가르침을 받은 길렐스는 그때부터 이미 소련에서 가장 자신 있게 내놓는 문화상품으로 각광받았다.

네이가우스 문하에서 1937년까지 피아노 공부를 하였다.
그 이듬해, 1936년에는 브뤼셀에서 이자이 국제 콩쿠르에서 아르투로 베네디티 미켈란젤리(Arturo Benedetti Michelangeli)와 모라 림파니(Moura Lympany)같은 피아니스트들과 경쟁하여 우승을 하였으며 같은해, 빈 콩쿠르에서 야포크 플리어(Yakov Flier)에 이어 2등을 차지하였다.

■ 제2차 세계 대전과 에밀 길레스

그런 활동으로 서방세계에까지 널리 그의 이름을 알릴 수 있었으며, 23세 때인 1939년엔 뉴욕에서 개최한 만국박람회에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소련 예술가로는 처음으로 서방세계의 초청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뉴욕에서의 연주회는 성사되지 못했고 더 큰 예술가로서의 도약을 꿈꾸던 길렐스는 잠시 꿈을 접어야만 했다.

22세의 젊디 젊은 나이에 최고의 콩쿨에서 우승까지 거머쥔 길렐스.
그 젊은 나이에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까지 발탁되었으나 그는 바로 전쟁이란 뜻하지 않은 불운을 만나게 되었다.
전 세계를 집어 삼킨 전쟁의 화마 속에서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으면 천만다행한 그 급박한 상황. 길렐스는 여타의 많은 예술가들처럼 난리통을 피해 피난, 망명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가야 하는 곳은 바로 전장이었다. 전장의 일선에서 싸우는 병사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다니게 된 것이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길렐스는 소련의 구석구석을 다 돌며 매우 성실히 위문공연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때의 영상기록은 지금도 남아 있다. 전투기가 하늘 위로 날아다니는 공군 비행장에서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길렐스가 피아노 앞에 앉아 라흐마니노프 전주곡을 매우 빠른 비트로 연주하고 공군 병사들이 박수를 쳐주는 장면이다.

1944년 12월, 2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무렵 길렐스는 모스크바 콘서버토리 그레이트 홀에서 프로코피에프(Prokofiev)의 "피아노 소나타 8번"을 초연하는 영광도 안았다.

1945년에는 바인베르트의 피아노 오중주의 초연에 참여했고, 1946년에는 유명한 스탈린상의 수상자가 되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길렐스는 처음으로 소련을 벗어나 1947년부터 곧바로 연주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다른 연주자들에 비하면 대단히 빠른 출세였다. 처음엔 동구권 쪽을 많이 다녔으나 이후엔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 등에서도 공연을 하며 그의 명성을 유럽 전체에 다시 알릴 수 있었다.

■ 1955년 그리고 미국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1955년.
길렐스에게 이 때는 그의 음악 인생에 한 획을 그은 기록적인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1954년에 소련의 인민 예술가의 칭호를 얻게 된 길렐스는 1955년에 다시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소련 예술가로는 처음으로 미국땅을 밟게 되었다. 평생의 장기 중 하나인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며 길렐스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미국의 언론은 ‘강철의 피아니스트’라는 이름과 함께 그를 소개했고, 그에게 무한대의 극찬을 보냈다.

길렐스와 오이스트라흐가 가진 미국에서의 첫 번째 연주는 2차 대전 이후 전 세계 양대 강국으로 군림했던 미국과 소련의 팽팽한 맞대결에서 소련이 문화적 펀치를 날린 것에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제아무리 미국이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강국이라 한들 문화에 있어서만큼은 소련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체념과 한계를 일깨워주었다고 할까?

사회주의 체제의 소련엔 이처럼 훌륭한 예술가가 있다.
사회주의에선 이처럼 훌륭한 예술가들을 양성해낸다.
그러므로 소련과 사회주의는 위대하다는 메시지를 길렐스의 강철타건을 통해 널리 알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이스트라흐, 길렐스의 원투펀치에 이어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부터는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레오니드 코간,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에브게니 므라빈스키, 키릴 콘드라신 등 수많은 소련의 우수한 예술가들이 소련을 벗어나 그들의 뛰어난 음악성을 널리 알렸고 이들의 음악은 서방세계의 음악 애호가들의 넋을 빼놓을 정도로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그 후 길렐스의 명성은 1960년대와 1970년대를 넘어서까지 계속 이어졌다.
프리츠 라이너, 조지 셀, 오이겐 요훔, 로린 마젤 등 서방세계의 쟁쟁한 지휘자들과 협연하며 수많은 피아노 협주곡을 녹음하였고 길렐스가 남긴 피아노 협주곡은 모두 동곡 최고의 전설적 명반으로 남아 있다.

■ 러시아 그리고 죽음

그의 말년에는 해외 콘서트 투어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그의 고국 러시아에서 1952년부터 재직한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후진 양성에 정성을 쏟았고, 1961년, 1962년 그리고 1966년에는 레닌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85년 10월 14일에 에밀 길렐스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을 눈앞에 두고 안타갑게 타계하였는데, 1980년대에 녹음한 이 베토벤의 소나타들의 녹음과 1970년대에 오이겐 요훔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녹음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2번 등은 음악계의 귀중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이렇듯 한 시대를 풍미하며 국경과 이념의 구분 없이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거장 에밀 길렐스.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너무도 허탈했다. 지병에 걸려서 고생한 것도 아니었고 비행기 추락처럼 불가항력적인 사고로 의한 것도 아니었다. 건강검진을 위해 입원한 크레믈린 병원에서 맞은 주사의 부작용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때 그의 나이 69세였다.

길렐스의 어이없는 죽음이 너무도 안타깝고 허탈하게 느껴지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당시 길렐스는 독일 DG와 계약을 맺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을 하고 있었는데 무려 10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계획된 대형 프로젝트였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은 길렐스가 바쁜 연주 활동 중에서도 큰 애착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그의 음악인생을 총망라하는 필생의 역작이었다. 하지만 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이 대규모 프로젝트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 중 단 4곡만을 미완성으로 남겨진 채로 끝나고 말았다.

길렐스의 친한 친구였던 리히터는 길렐스의 죽음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사망 당시 크레믈린 병원에서 근무한 의사들을 맹비난하였다. 길렐스의 죽음은 순전히 의사들의 실수였기 때문이었다.

  

■ 위대한 생애

길렐스는 어린 시절부터 사회주의 방식의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개인의 자유와 인권은 제한되고 오로지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해 양성되는 기계와도 같은 교육 시스템에 철저히 물들어서인지 그의 성격은 자존심이 강하지만 특별히 모나지도 않고 모험을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인생 행적을 쭉 살펴보면 체제에 순응하였을 뿐 반기를 들거나 망명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그는 1942년에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바로 그것이 그가 처해있는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전쟁 중엔 최전방에서 싸우는 병사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다녔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47년에 스탈린 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1954년엔 인민예술가의 칭호를 얻게 되었고 1962년엔 레닌상, 1976년엔 사회주의 노동영웅의 칭호를 받았다. 이와 같은 행적을 살펴볼 때 개인의 인권과 예술의 자유를 탄압하는 사회주의 체제에 반기를 들고 망명도 불사한 다른 예술인들-쇼스타코비치, 유디나, 로스트로포비치, 아쉬케나지 등-과 비교했을 땐 그가 용기가 없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세상 돌아가는 일에 아예 관심이 없고 그저 피아노에 파묻혀 사는 사람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정답은 후자일 것이다.

길렐스가 어떤 정치적 제스처를 강하게 했다는 기록 같은 건 찾아볼 수 없고, 그는 그저 피아노에 파묻혀 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망명을 할 이유도 없는 것이 그는 매우 젊은 시절부터 국경을 초월하여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주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특권을 누렸고, 소련 정부에서 그를 적극 후원해주었으니 그랬을 법도 하다. 성격 또한 조용한 편이었고 때론 고집스러우며 좋고 싫음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점에서 그의 친구인 리히터와는 크게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리히터는 대단히 고집이 세었고 변덕스러워서 연주회 당일에 바로 취소를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길렐스는 묵묵히 자기가 맡은 일을 하는 성격이었고 변덕이 심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일례로 한 레코딩 회사와 프로젝트로 전곡 녹음을 한 숫자를 보면 알 수 있다.

리히터의 경우는 어느 작곡가의 곡을 전곡 녹음한 경우를 찾기 힘들다.
하지만 길렐스는 조지 셀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녹음하였고, 오이겐 요훔과는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전곡, 로린 마젤과는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전곡(이 곡을 전곡 녹음한 피아니스트는 거의 없다.대부분 1번만 할 뿐이다)을 녹음하는 괴력을 선보였다.

예술의 세계에선 국경이란 의미가 없다.
미국에서 베토벤을 연주하는 사람이 있다면 소련에서도 똑같이 베토벤을 연주하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이념과 사상과 언어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지만 같은 악보를 보고 같은 연주를 하는 것만은 똑같다. 그들 세계엔 음악으로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 외엔 다른 어떤 것도 큰 의미를 둘 수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길렐스가 사회주의 체제에서 만들어진 음악가였고 한때는 그의 역사적 명반들을 들을 기회조차 봉쇄되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가 남긴 수많은 명반들이 지금까지 그 빛을 잃지 않고 음반매장에서 탑 프라이스를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그의 피아노엔 세상의 모든 이념과 사상마저도 모두 수렴하는 아름다움만이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 강철타건

길렐스의 피아노는 흔히 강철타건으로 알려져 있다.
당대의 그 어떤 피아니스트도 힘에 있어서 만큼은 길렐스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어마어마한 힘으로 내리 찍는 광폭한 타건은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를 들려주고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확한 컨트롤이 엄청난 힘과 결합하여 길렐스만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여기에 그의 예민한 감각에서 나오는 뛰어난 섬세한 기교와 정연한 질서는 그의 힘있는 연주에 더욱더 완성도를 높혔다.
1950년대 초, 중반에 녹음한 곡들에서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당시 녹음한 음반 중 가장 유명한 음반인 1957년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레오폴드 루드윅과 협연)와 1955년에 녹음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프리츠 라이너와 협연)이 대표적이다.



Farizet, Gilels, Lydia Yurganova, Daniel Shafran

1970년대를 지나 완숙미가 가해지면서 아름다운 서정성을 가미한 연주로 탈바꿈하였으며, 유작으로 남겨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에 잘 나타나 있다. 그가 남긴 베토벤과 브람스 피협, 소나타는 당대 최고의 명연으로 지금까지 명반으로 기억되고 있다. 러시아 피아니즘의 전통을 이어받아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를 즐겨 연주했는데 라흐마니노프 3번도 명반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8번도 초연했다.

특히, 에밀 길렐스는 바흐, 스카를라티 등의 바로크 음악에서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의 고전파 음악, 쇼팽, 슈만, 리스트 등 낭만파 음악, 생상스, 드뷔시 등 프랑스 음악, 차이코프스키, 스크리아빈,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등의 러시아 음악과 프로코피에프의 현대음악 까지 광범위한 레퍼토리로 규범이 될만한 많은 명연을 남기기도 하였다.

during Queen Elisabeth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Jakob Flier, Emil Gilels, Arthur Rubinstein


in Bruxelles during Ysaye Competition 1938, Emil Gilels,Pawel Serebriakov, Isaac Michnowsky, Jakob Flier

■ 앨범

01. Emil Gilels - Beethoven Sonatas
        Emil Gilels, Piano


02. Schumann - Piano Sonata No 1; Chopin, Schumann, Liszt /Gilels
         Emil Gilels, Piano


03. Emil Gilels - Early Recordings [Box set]
        Gilels Gilels, Piano


04. Schubert - Trout Quintet / String Quartet No.14
        Amadeus String Quartet,
        Amadeus String Quartet members,
        Rainer Zepperitz (Double Bass)
        Norbert Brainin, Siegmund Nissel (Violin)
        Peter Schidlof (Viola)
        Martin Lovett (Cello)
        Emil Gilels (Piano)


05. Beethoven - Klavierkonzert No.5; Tschaikowsky - Symphonie No.4
        Tschechische Philharmonie,
        Karl Bohm, Conductor,
        Emil Gilels, Piano


06. Beethoven - Piano Variations / Gilels, Ogdon
         Emil Gilels, Piano
         John Ogdon, Piano


07 .Steinway Legends - Emil Gilels [Box set]
         Emil Gilels, Piano


08. Historic Russian Archives - Emil Gilels Plays Beethoven (Box Set)
        USSR Symphony Orchestra,
        Kurt Masur, Conductor,
        Emil Gilels, Piano
자료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