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브렌델(Alfred Brendel, January 5, 1931 - )

오스트리아 태생의 피아니스트.
금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하나로 꼽혔던 알프레드 브렌델(78). “올해를 마지막으로 연주활동을 접겠다”고 이미 선언했던 브렌델이 생애 마지막 연주를 펼쳤다.

지난 1년 동안 미국·영국·독일 등에서 고별 순회 연주를 한 그는 2008년 12월18일 저녁 오스트리아 빈의 무지크페라인 홀에서 60여년 동안 그가 줄곧 견지했던 '사색의 연주'를 접었다. 그가 이날 빈 필하모닉(지휘 찰스 매커라스)과 함께 이틀 연속 연주한 곡목은 모차르트의 <협주곡 9번. ‘Jeunehomme(젊은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작품이다.

건강 이상도, 부상도 아닌 “때가 됐다”며 떠나는 피아니스트의 은유적인 선곡이었다. 20세기 후반의 피아노 음악을 이끌어온 거장, 알프레드 브렌델. 언제나 신뢰할 수 있었던 브렌델의 진지한 피아니즘이 마침내 ‘과거’라는 시간 속으로 떠났다.

알프레드 브렌델은 학구적이고 진지한 음악가이며 작품 해석의 권위자로 현존하는 피아니스트중 작품의 의도를 가장 잘 파악한다고 알려진 피아니스트이다.

60이 넘긴 나이에 새롭게 도전하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사이클의 3번째 전곡 연주와 녹음에 성공하였고, 피아노계에서 가장 관심의 촛점이되는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알프레드 브렌델이다.

브렌델이야말로 20세기의 피아니스트들 가운데서 가장 특이한 존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유난히 개성이 강하고, 신경질적이고, 까다로워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라서 그렇다. 그는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게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의 자리까지 올라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한다. 그는 어떻게 보면 공기와 같이 원래부터 ‘그저 그냥 있는’ 존재같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다른 연주가들의 떠들썩함에 비한다면 말이다.

그의 연주도 그렇다. 다른 연주가들처럼 자신의 개성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무색, 무미, 무취의 연주라 할 수 있다. 다른 요소들을 다 배제하고 ‘남은 것은 그저 음악’인 셈이다. 무엇이 그의 연주를 그렇게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그는 작품의 전체적인 구도를 읽어내는 탁월한 혜안을 가졌다. 따라서 다른 요소들을 많이 집어넣지 않고도 그저 구도를 잡아나가는 것에 의해서만 작품의 의미를 청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표현해 내는 슈베르트와 베토벤은 다른 그 누구의 연주보다 강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전혀 노력 없이 직관에 의해서만 그렇게 된 ‘신적인 천재’라는 얘기는 아니다. 브렌델 자신이 고백하길 자신은 절대로 신동이 아니었다 한다.

알프레드 브렌델은 1931년 1월 5일, 모라비아(Moravia, 오늘 날의 체코 공화국)의 비젠베르크(Vizmberk)에서 태어났다. 브렌델이 3살 때에 가족들은 유고슬라비아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브렌델은 처음으로 축음기를 통하여 음악을 접했다.

이미 6살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유고의 대표적인 음악교육기관인 자그레브 음악원을 거쳐 오스트리아의 그라츠 음악원에서 정식으로 피아노를 비롯하여 작곡, 지휘를 수학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브렌델은 작곡뿐 아니라 피아니스트로서 피아노 연주도 계속하였다.

정상적인 피아노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그는 당시 피아노의 거장이었던 에드빈 피셔(Edwin Fischer)와 에두아르드 스토이어만(Eduard Steuermann)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하여 공부하였으나 대부분은 독학으로 피아노를 공부하였다.

훗날 브렌델은 에드빈 피셔와의 만남이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큰 축복이자 영광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그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자신만의 피아니즘을 더욱 다듬은 그는 1948년 빈에서 공식적인 첫 데뷔 무대를 가졌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파울 바움가르트너(Paul Baumgartner)의 문하에서 다시금 실력을 연마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으며, 이 당시 피아노에 집중하기 위하여 작곡을 포기했다.

그가 16살 되던 해, 그의 정상적인 피아노 레슨이 끝나자 브렌델은 앞선 세대의 피아니스트들의 녹음을 듣거나 비엔나의 연주회에 참가하여 공부를 계속하였다.

특히 알프레드 코르토(Alfred Cortot), 빌헬름 켐프(Wilhelm Kempff), 아르투르 슈나벨(Artur Schnabel) 등의 연주를 보고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빌헬름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angler),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등의 거장들에게 존경심을 가졌다. 특히 그는 그가 저술한 에세이에서 에드빈 피셔와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에 대한 존경을 적고 있기도 하다.

1949년에는 알프레드 브렌델은 약관 18세의 나이로 이탈리아 볼차노( Bolzano)에서 열린 부조니 콩쿨에서 4위로 입상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들과 런던, 파리, 뉴욕, 비엔나, 베를린, 뮌헨, 암스테르담 등 대도시와 유럽을 비롯한 미국의 주요 음악 페스티발에 초청되어 연주하였다. 그리고 21살 때인 1952년 브렌델은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을 첫 녹음하였고, 그 이후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세트를 내놓았다.(1세트는 복스 레코드(Vox Records)레이블에서, 다른 2세트는 필립스 레코드(Philips Records)에서 녹음하였다.)

이 녹음으로 브렌델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녹음한 최초의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리고 연주회와 녹음 일정으로 매우 분망한 가운데서도 그는 1960년부터 1970년 사이에 비엔나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열어 후학들을 가르쳤다. 빈에서 리스트를 위주로 한 기교적인 레퍼토리를 복스 레이블로 녹음하던 그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것은 1969년 런던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고 필립스를 통하여 녹음을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1970년 이래로 브렌델은 필립스 클래식스를 통해 독점적으로 레코딩을 해오고 있다. 그의 레퍼토리는 바흐에서 쇤베르크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다.

그는 베토벤의 피아노 작품 전곡을 레코딩한 최초의 피아니스트이며,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와 쇤베르크의 <피아노 협주곡>들을 콘서트 레퍼토리로 정착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특히 베토벤 소나타와 협주곡을 시작으로 모차르트와 슈베르트 등 그가 연주하는 빈 출신 작곡가들의 작품 연주에서 완벽하게 구현된 정통적인 스타일은 그를 비견 할 수 없는 정통적인 해석의 권위자로 70년대 이후 피아노계의 중앙에 위치하게 만들었다.

그는 또한 리스트, 브람스(협주곡 포함), 슈만, 슈베르트의 피아노 작품들도 녹음하였고, 네빌 마리너(Sir Neville Marriner)가 지휘하는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Academy of Saint Martin in the Fields)와 함께 모짜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녹음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 그는 하이든과 같은 새로운 영역과 <주제와 변주곡 1, 2집>과 같은 학구적인 레퍼토리들을 개척해나가는 한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의 작품들을 더욱 원숙해진 해석으로 순차적으로 재녹음하였다.

그는 쇼팽에는 쇼팽 연주가라는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쇼팽을 거의 연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레퍼토리는 하이든에서 쇤베르크까지 폭 넓게 아우르는데, 특히 모차르트의 곡에 있어서는 협주곡 위주로 연주하였으며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의 작품들을 자주 연주하였다.

브렌델은 초절기교의 비르투오소가 아니었고, 눈부신 개성을 뽐내는 스타일리스트도 아니었다. 그는 청중을 자극할 만한 어떤 ‘포즈’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언제나 작품의 본래적 언어에 충실했다. 섬세한 프레이즈에 도달했을 때 건반을 향해 살짝 기울어지던 머리, 피아노가 선율을 노래하는 장면에서 멀리 허공을 바라보던 눈빛…. 그것이 브렌델이 보여준 포즈의 전부였다. 그래서 브렌델은 대기만성일 수밖에 없었고, 젊은 시절의 그는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연주자였다.

이른바 ‘빈 3총사’로 불리던 프리드리히 굴다(Friedrich Gulda), 파울 바두라 스코다(Paul Badura-Skoda), 외르크 데무스(Jorg Demus) 등 또래의 피아니스트들보다 한수 아래 취급을 받아야 했다. 1963년 알프레드 브렌델은 미국 무대에도 데뷔했지만 그를 불러주는 메이저 음반사는 한 곳도 없었으며 몇 군데 마이너 레이블에서만 그에게 녹음 기회를 줬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음반사 ‘복스’에서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녹음하는 등,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갔다. 이 ‘견고한 구조주의자’에게 음악계의 스포트라이트가 쏠린 건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였다.

어느덧 그는 40대였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젊었을 때 내 연주는 그리 화제를 모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한발씩 전진했지요. 그러던 어느날, 영국 런던의 퀸 엘리자베스 홀에서 연주했을 때, 그날의 연주회는 나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것도 아니었고 프로그램 자체도 밋밋했어요. 그런데 연주회 다음날, 세군데 음반사로부터 제안을 받았어요. 갑작스레 물이 끓어올라 온도계의 눈금이 확 치솟는 느낌에 휩싸였지요.”
1982/1983년 시즌, 그는 7개국에서 총 77회의 리사이틀을 열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연주하면서 회원권을 매진시키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후 그는 1987년과 1988년에는 슈베르트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들을 가지고 유럽, 러시아, 미국, 일본 등지에서 순회 연주를 해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각각 4회에 걸친 사이클 연주를 베나드 레빈은 '더 타임즈'에서 이렇게 평했다.

"네번의 연주 프로그램은 더없이 훌륭하고 기억에 남을 음악 경험이었다. 가장 심오하고도 영속적인 의미에서 "삶을 살 만하게 해준 경험이었다. 연주를 들은 나는 물론 청중 모두 이 여덟시간을 통해 연원한 삶의 양식을 얻었다"

1992년 다시 베토벤피아논 소나타 사이틀 연주를 시작하여 영국,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에서 연주를 하였다.

알프레도 브렌델이 필립스 레이블로 낸 레코딩은 바흐, 베토벤, 브람스, 하이든, 리스트, 무소르그스키, 모차르트, 슈베르트, 슈만, 베버 등의 독주 및 관현악곡을 두루 꿰고 있다. 그리고 같은 해, 브렌델은 새로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와 레코딩을 시도하고 나섰고, 1993년 이 새 시리즈의 첫 음반을 발표했다.

브렌델의 필립스 레이블 디스코그라피에는 바흐, 베토벤, 하이든, 리스트, 무소르그스키, 슈베르트, 모차르트, 슈만 그리고 베버 등의 독주곡과 협주곡이 자리하고 있다. 필립스사는 1996년 1월에 65회의 생일을 맞이하게 된 그를 위해 25CD의 브렌델 에디션과 다양한 기념행사를 기획했다. 한편 브렌델은 피아노 연주 외에 작곡과 문학, 미술 등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악외에 문학이 브렌딜의 가장 큰 관심사이자 제2의 직업이다. 1976년 런던에서 낸 첫 수상집 <Musical Thoughts and Afterthoughts>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음악을 생각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며, 새 힘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음악에게는 영감이 알파요 오메가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
1990년에는 롭슨 서적에서 을 펴내어 찰스 하이치크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브렌델은 1983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받은 명예학위를 비롯하여 세게 각지에서 수 많은 명예학위를 받았다. 또한 1989년에 영국에서 명예기사 직위를 받았고, 1993년 3월에는 로열 필하모니 협회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참고>

■ 알프레드 브렌델과 슈베르트

베토벤과 슈베르트 피아노곡을 가장 잘 소화해내는 피아니스트는 알프레드 브렌델이라고 하고 싶다. 최근 기교가 화려하게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많은 세상임에도, 그의 연주는 특별히 테크닉적으로 두드러지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과장되지도 않고, 특이하지도 않지만 사람의 마음을 끄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넉넉한 인심의 옆집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구수한 옛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여타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하는 베토벤 소나타 중 '열정'이나 '템페스트'를 감상 할 땐, 초긴장 상태에 이르게 된다. 빠른 템포와 스케일에 압도되고 시작과 무섭게 곡이 끝나버려 단지 '우와, 피아노 잘친다' 라는 느낌만 들뿐이다. <열정>, <템페스트> 소나타에서 폭풍 몰아치는 날의 낭만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브렌델 연주의 매력인 것 같다. 특히 그의 슈베르트는 위에 비유한 것과 같이 슈베르트의 음악을 넉넉한 마음의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것 같다.

브렌델의 그런 마음이 음악에 묻어 나오는 것이다.

알프레드 브렌델은 자신의 경력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매우 유명한 레이블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작품 전곡을 녹음, 연주함으로써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 자리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그의 경력 초기에는 프로코피예프와 무소르크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모음곡>,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 쇤베르크의 <피아노 협주곡>, 쇼팽의 <폴로네이즈> 등을 녹음했으며, 그 이후에는 점점 더 독일-오스트리아 레퍼토리에 집중했다. 소나타와 협주곡 전곡을 몇 차례에 걸쳐 녹음한 베토벤은 물론이고 모차르트, 하이든, 슈만, 슈베르트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슈베르트는 브렌델이 전 경력에 걸쳐 피아니스트로서뿐만 아니라 저술가로서도 옹호한 작곡가이다.

알프레드 브렌델이 보기에 슈베르트는 모든 작곡가 가운데서도 듣는 이의 마음을 가장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훗날 자신이 고백한 바에 따르면, 초기에 연주자로서 그가 슈베르트의 세계에 대해 취했던 접근방식은 진부하고도 소심한 것이었다. 슈베르트의 <즉흥곡>이나 <방랑자 환상곡>, <악흥의 순간>같은 곡은 대단한 작품이지만, 동시에 누구나 아는 곡이기도 하다.

브렌델이 진정한 슈베르티안으로 거듭났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그가 빈의 브람스 홀(Brahms-Saal)에서 슈베르트 독주회를 열어 <소나타 C단조>나 <소나타 B장조> 등 당시만 해도 거의 연주되지 않고 있던 작품들을 소개했을 때였다. 이 레퍼토리에서 명연을 남긴 다른 위대한 피아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브렌델 역시 독주 피아노곡에만 매달리지 않고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가곡들과 실내악곡, 교향곡에도 심오한 이해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실제로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서법 중 상당수는 성악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슈베르트의 독특하고도 대담한 구성이 보여주는 교향악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그의 피아노 텍스처가 보여주는 명백하게 관현악적인 성격도 강조하려고 노력했다.

알프레드 브렌델은 정력적이고도 엄격한 사색가였다.

또한 그만큼 의미를 중시하는 인물이자 그만큼 지적인 연주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학구적이거나 교육자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또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역사적 정확성을 기하겠노라 서약한 무미건조한 음악학자도 결코 아니었다. 그는 작곡가의 악보에 적힌 지시보다는 악상 그 자체나 감정을 더 중시했으며, 슈베르트의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그가 추측했듯이 슈베르트는 아마도 다른 피아니스트가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작곡에서 불가결한 실제적 관점을 어느 정도는 결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고본이나 스케치 등에 기초한 브렌델의 꼼꼼한 연구는 학구적인 수준은 아니며 단순히 작곡가를 좀 더 잘 알기 위한, 즉 슈베르트의 의도가 어떤 식으로 작용했으며 목표는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다듬어졌는가를 알기 위한 수단이었다. 모든 음표에 대한 브렌델의 조사와 분석, 폭넓은 개관은 지나칠 정도로 세부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위대한 예술가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그의 탐구는 끝이 없었다. 그의 해석은 결코 기념비적인 진실로 고착되는 일이 없었으며, 어디까지나 고무적이고 헌신적인 가설로 남았다. 그 누구도 브렌델만큼 복잡하고도 극적인 강렬함을 지닌 슈베르트의 음악적 혹은 심리적 성격을 두드러지게 보여주거나 이 작곡가를 특징짓는 독창성과 매력적인 논리를 명료하게 드러내지 못했다.

- 출처 : 알프레드 브렌델의 슈베르트 후기 소나타 내지 발췌 -

자료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