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노 발터(Bruno Walter, 1876 - 1962)
독일 태생의 미국의 지휘자.
1962년 2월 17일,미국 로스엔젤레스 베버리힐즈의 자택에서 브루노 발터가 심장마비로 향년 85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가 죽음으로써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밤하늘을 아름답고 밝게 수 놓았던 지휘자들의 한 시대가 끝났다.

푸르트벵글러, 토스카니니, 멩겔베르크 등과 더불어 활약한 거성(巨星)들 중의 마지막 별이 떨어진 것이다.

신세기를 앞두고 월간 <객석>에서 20세기 클래식 음악계의 위대한 연주자와 지휘자를 10명씩을 선정하는 기획 기사를 만든 적이 있었는데 그때 브루노 발터 편의 서두에 이런 글이 실려 있었다. 한 오케스트라 단원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두 발의 총알이 든 총이 있고 당신 앞에는‘지휘자’와 ‘히틀러’와 '스탈린’이 서있다. 당신이 누구든 두 사람을 골라 마음대로 쏠 수 있다면 누구와 누구를 쏘겠는가?”
단원은 서슴없이 답했다. "지휘자! 지휘자에게 두 발 다 쏜다."

위와 같은 농담은 물론 카리스마의 극단을 치달은 20세기의 지휘자들을 비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단원들의 지휘자에 대한 존경심 없이 좋은 음악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브루노 발터.
이 지휘자야말로 앞서 말한 두 발의 총알을 피해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는 항상 감사와 겸손과 존경의 마음으로 음악을 만들어갔다. 단원들의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온 것은 두말할 나위없었다.

서정적이고 시적인 음악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지휘자가 바로 브루노 발터이다. 조금도 거칠지 않고 방약무인 하지 않았던 발터의 음악은 그와 동시대를 살았 던 사람은 물론, 그 이후의 세대들에게도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의 명연으로 남아 있다.

브루노 발터는 1876년 9월 15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모두 유태인이었으며, 아버지는 실크가게에서 50년 이상 근무한 경건한 유대교도였고, 모친은 슈테른 음악원을 나온 재능있는 피아니스트였다.

발터는 1885년 어머니가 다녔던 슈테른 음악원에 들어가 로베르토 라데케에게 작곡을, 하인리히 에리히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처음의 지망은 피이니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0세 때 공개연주회를 가졌고, 13세 때 베를린 필하모니와 협연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러던 중에 한스 폰 뵐로우(Hans von Bulow)가 지휘하는 연주를 듣고 지휘자가 될 결심을 하였다.
발터는 그 뒤로 많은 시간을 지휘 공부를 위해 소비하였다. 그리고 그 결실로 1894년 18세 때 쾰른 시립가극장에서 로르찡(Gustav Albert Lortzing, 1801 - 1851)의 <칼 대장장이, Der Waffenschmied>를 지휘함으로써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그 뒤로 함부르크, 브레슬라우, 프레스부르크, 리가 등, 각 시립가극장에서 지휘 경험을 쌓고, 1900년 베를린 궁정 오페라극장 부지휘자가 되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카알 무크(Karl Muck)의 조수로 있었다. 이듬해인 1901년 구스타프 말러가 음악감독으로 있던 빈 궁정가극장(지금의 국립 가극장)의 초청을 받고 악장으로 취임했다.

발터는 빈으로 가던 해에 리가 시대부터 사귀었던 엘자 코르넷과 결혼하였다.
악장생활은 1912년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동안에 발터는 말러로부터 음악, 예술, 사상, 철학 등에 걸쳐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하여 그 뒤 발터로 하여금 뛰어난 말러 연주가로 만든 소지가 닦여졌다.

그는 1901년부터 1912년까지 빈궁정 가극장 악장으로 지내면서 음악 총감독 구스타프 말러,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밑에서 가극장과 빈 필하모니의 지휘를 맡았다.

말러와의 만남은 발터의 인생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말러가 함부르크 가극장의 지휘자로 있는 동안 발터는 부지휘자로 일하기 위해 말러를 처음 만나게 된다. 말러는 그에게 "당신은 피아노를 잘 치나요."라고 물었고, 이에 답해 발터는 때 마침 연습 중에 있던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을 피아노로 연주해 답해주었다.

며칠 후 말러는 발터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고, 발터는 용기를 내 "당신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냐"라고 묻자 이번엔 말러가 피아노에 앉아 자신의 교향곡1번을 피아노로 연주해 주었다.

이날 이후 발터는 말러 예술의 최고 해석자가 되었고, 말러는 말년에 이를 때까지 발터를 끔찍이 아껴 주었다.
발터의 본명은 브루노 발터 슐레징거(Bruno Walter Schlesinger)였는데, 말러를 따라 빈 필의 부지휘자로 가게 되면서, 1911년 말러의 충고로 슐레징거라는 유태계 성을 버렸고, 국적도 오스트리아로 변경했다. 웬만하면 홀로서기를 해도 좋았을 때가 되어서도 그는 끝까지 말러를 진심어린 애정과 존경으로 대했고, 말러의 죽음 뒤에도 평생토록 그를 가슴에 새겨두었다.

1913년 뮌헨 오페라극장, 1925년 베를린 시립오페라극장, 1929년엔 푸르트벵글러의 후임으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되면서 브루노 발터는 독일에서도 가장 인정받는 지휘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시대는 그에게 시련을 던진다.
1933년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면서 유태인인 그의 활동을 금지시켜 버린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독일에서의 활동을 접고, 1936년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이 무렵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전통을 일구는 한편 빈 필하모니를 계속 지휘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되면서 그마저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쫓기는 망명자의 몸이 되어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였고, 영국, 이탈리아, 미국 등지에서 지휘 활동을 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스위스에 있었지만 결국 오토 클렘페러,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아르투르 토스카니니 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고, 발터는 1940년 미국에 귀화했다.

1930년부터 1941년까지 10년간 2만 5천명의 예술가, 음악가, 작가, 과학자, 인문학자들이 나치를 피해 독일과 유럽을 탈출해 미국을 찾았다. 또 몇 천명은 영국을 마지막 피난처로 택했다.

발터의 미국시대는 1939년(63세)에서 62년(85세)까지의 22년간이다.
그는 로스엔젤레스 교외의 비버리힐즈에 정주 하면서 NBC 교향악단, 메트로폴리탄 가극장, 그리고 뉴욕 필하모니를 비롯한 전미 국 각지의 일류 교향악단에 초빙되었다. 전후에는 1947-1949년에 걸쳐 뉴욕 필하모니 의 조언자 겸 상임지휘자로 있었다. 1949년에는 11년 전에 헤어진 빈 필하모니를 지휘하여 에딘버러 음악제에도 출연했다.

1956년 80세 때 은퇴를 발표했으나 그를 위해 특별히 CBS가 조직한 콜럼비아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많은 레코딩을 했다. 이때 레코드계는 스테레오 시대로 크게 전환하고 있었으므로 발터가 남긴 이때의 연주는 참으로 귀중한 유산이 되었다.

콜롬비아 교향악단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 소개해보면 미국의 대표적인 작곡가 아론 코플란드에게 어느날 사람이 와서 콜롬비아 교향악단의 지휘를 부탁했다. 그는 그런 악단의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는데 갑자기 사람이 와서 그런 악단의 지휘를 부탁한 것을 대단히 무례한 부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단 악단 자체가 궁금해서 콜롬비아 스튜디오를 방문하기로 했다.
스튜디오에 들어선 코플란드는 놀라움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막상 지휘대에 올라서서 단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제1바이올린부터 모든 단원들이 유럽의 유명한 현악4중주 멤버들이거나 아니면 유명한 독주자들로 짜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럽에서 나치의 손길을 피해 망명한 연주자들로 구성된 악단이 바로 콜럼비아 교향악단이었고, 이 교향악단은 '콜럼비아'사가 세계적인 지휘자 브루노 발터와 레코드 녹음을 하기 위해 만든 오케스트라였다.

그와 당시 고통을 겪어야 했던 망명자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오늘날 지휘의 거장 브루노 발터의 예술을 접할 수 있게된 것은 콜럼비아 교향악단의 덕분이다. SP시대로부터(그의 첫 녹음 작업이 이루어진 것은 1900년이었고, 카르멘 전주곡 등 3곡을 녹음했다고 하는데 현존하지 않는다) 스테레오 LP 시대에 이르기까지 브루노 발터는 많은 녹음을 했지만, 그의 음반 중 녹음 상태가 좋은 것은 대개 이 시절 콜럼비아 교향악단의 녹음들이다.

첼리비다케가 이미 비슷한 지적을 했지만 음악이란 예술 장르는 시간에 의한 예술이며, 감성의 에너지이므로 음반에 담긴 음악은 통조림 음식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미 죽은 고인들의 음악, 혹은 현존하는 대가의 음악일지라도 결국 음반을 통하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다. 그러므로 좀더 나은 음질을 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음악은 예술이기 때문에 단지 음질의 좋고 나쁘고만을 따질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그가 미국에서 남긴 음반들의 음질이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럽에서 남긴 음악을 음악적으로는 더 높게 평가한다. 혹자는 이를 미국의 물질문명이 그에게서 꿈과 낭만을 빼앗은 탓에 미국 오케스트라 즉 콜럼비아의 녹음에서는 차가운 인상이 느껴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말에도 일리가 있긴 하지만 이미 음악적 완숙기를 넘어선 당시 브루노 발터의 연령을 고려해볼 때 낯선 분위기의 이국에서 말년을 보내야 했던 망명자의 고단함까지 고려한다면 지나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만년에 녹음한 음반과 전성기의 음반의 차이는 우열의 차이라기 보다는 힘과 결, 세기와 구조적 짜임새의 차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할 듯하다. 1957년 1월 레코딩을 위한 첫연습이 이루어질 무렵 그의 나이는 어느새 80세였고, 건강도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위해 모인 콜롬비아 교향악단의 단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이번 겨울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더욱 깊이 사귈 수 있게 되었군요. 나는 우리가 참 좋은 가족으로서 일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만년(제3기)의 녹음 작업들을 시작하게 된다.

1960년 말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 때, 발터는 병구를 이끌고 빈에 가서 그립던 빈 필 하모니를 마지막으로 지휘했다. 이때 그가 지휘대에 오르자 청중은 일제히 기립하여 박수로 맞았다. 빈에서는 일찌기 없었던 일로서 발터에게 보내는 최대의 경의였던 것이다.

그 뒤 발터는 1961년 봄까지 계속 레코딩을 하다가 이듬해 두 번 째 심장발작을 일으켜 미국 베버리힐즈의 자택에서 85세로 영면했다.

발터는 시인적인 지휘자였다.
그는 어떤 곡에서도 시적인 정서를 뽑아내며, 그 아름다움에 스스로 감동하면서 노래한다. 그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따스해 지며 행복감에 충만된다. 그곳에서는 선의와 자애에 넘치는 인간미가 서리어 있는 것이다.

발터가
"음악은 순수하게 인간을 매혹하고 즐겁게 하며 풍요하게 하는 동시에 사람들에 대해서 일종의 윤리적 호소를 한다"

고 말했는데, 이 말은 그대로 그의 연주와 통한다. 그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면 어느덧 작곡가를 잊고 곡명도 악기도 잊어버린 채 지순하고도 따뜻한 감정이 살아남을 느낀다. 그것은 발터에게 음악적인 인간성과 더불어 윤리적 인간성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인간성에 감동하고 그가 이끄는 대로 음악과 융합될 수 있다. 이토록 인간적인 지휘자는 발터의 죽음과 함께 다시는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생애 동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고, 한 번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망명 생활까지 해야 했던 브루노 발터는 이렇게 말한다.
"비록 오늘날 뮤즈의 신이 지쳐버린 듯 보이고 차가운 가을을 맞아 영혼의 꽃도 열매도 멈춘 듯 여겨지나, 비록 오늘날의 모든 재능과 수고가 물질주의와 기술주의로만 치닫고 있으나, 비록 우리 시대의 영적인 기후가 마치 지구 기후의 변화처럼 치명적인 형태로 변해 버렸으나, 나는 확신한다.
인류는 마땅히 이 질병에서 회복되어야 한다. 영적이고 도덕적인 힘들이 고결한 샘물처럼 다시 흐르게 해야 한다."
이런 글을 읽고 나면 그에 대하여 계급적 한계 운운한 것이 부끄러워진다. 그는 그런 계급적 이해관계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인간존중의 마음은 그의 글과 그의 음악 곳곳에서 묻어난다.

그의 이런 면모를 특히 잘 보여주는 음반이 바로 <연주의 탄생(The Birth of a Perfomance)>이다.
모차르트의 교향곡 <린츠>의 연습광경을 무단으로 녹음하여 그의 허가를 받고 음반으로 발매했던 레코드인데, 대지휘자의 리허설을 레코드로 낸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는 일이다.

그가 모차르트를 해석하면서 오케스트라에게 특히 강조하는 것은 "노래하라!"는 것이다.
그는 음악이란 정서와 결부될 때 비로소 인간의 영혼에 호소할 수가 있다고 말하면서 모든 음악의 주제는 남성적인 면과 여성적인 면을 동시에 갖추고 있으며 이 두 요소를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때 '언제나 노래하기 쉽게 하는' 성격을 부여할 수 있다고 한다.

브루노 발터의 이런 인간적인 면모들에 대한 일화는 차고 넘칠 만큼 많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표현한 최고의 격한 발언은 침묵이었다고 회고한다.

발터는 자신이 관심을 갖고 이해하기 시작한 작곡가들을 순서대로 나열하면서 베토벤, 슈베르트, 바그너 등을 열거한 다음 마지막으로 모차르트를 언급했다. 그리고 그는 어째서 모차르트가 가장 늦게 이해되기 시작했느냐는 질문에
"미를 이해하는 데는 성숙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오늘날 정격연주가 일반화되면서 발터의 연주에 대한 비판도 있긴 하지만 브루노 발터 역시 자신의 스승이었던 말러의 모차르트 연주를 규범으로 삼으면서도 그의 해석을 지나친 강조와 우아한 연주를 강조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오히려 이와 반대로 좀더 아카데믹하고 무미건조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한 것을 생각해보면 정격주의자들의 비판은 그저 시대의 흐름에 묻어둘 일인지 모른다.

브루노 발터의 모차르트 해석은 오늘날까지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매력적인 유산으로 남아 있다. 그가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매우 인간적인 지휘자였다는 말은 그가 단원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적당히 넘어가는 지휘자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온화한 품위와 인격을 통해 단원들의 애정과 존경을 받았다.

단원들을 통솔함에 있어 늘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조성해 연주자들의 긴장을 풀어 주었지만 집중력만큼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는 연주자들 위에 군림하는 지휘자가 아니라 공감해주는 협력자였고, 그의 이런 재능은 특히 높은 난이도를 필요로 하는 모차르트와 말러의 교향곡들에서 빛을 발했다.


앞으로도 얼마간은 그의 음반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행복감에 젖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세상을 떠난 거장의 그늘 속에서 느끼는 평안함을 위한 것일 게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너무 한꺼번에 가지고 싶어 한다. 때로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과 희망이 우리를 살게 만드는 힘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사람들은 소유라는 절대반지의 욕망에 허물어지고 마는 것이다.

혹자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러다가 불의의 사고로 끝끝내 그 음악들을 못 들어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신학자 카알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다지 않은가.
"천사가 신을 찬미하려고 바하의 음악을 연주할지 어떨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모였을 때 모차르트를 연주하고 또 그러면 신도 기꺼이 그 음악을 경청하리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라고 말이다. 거기에 내가 굳이 몇 마디를 보탠다면 아마 지휘는 브루노 발터가, 피아노는 클라라 하스킬이 맡지 않겠는가.


Bruno Walter, Arturo Toscanini, Erich Kleiber, Otto Klemperer, Wilhelm Furtwangler, Berlin, In 1929

■ 앨범

01. Brahms - Symphony No. 1; Haydn Variations; Academic Festival Overture
         Columbia Symphony Orchestra,
         Bruno Walter, Conductor


02. Beethoven: Symphonies Nos. 3 "Eroica" & Nos. 8
         Columbia Symphony Orchestra,
         Bruno Walter, Conductor



03. Beethoven - Symphony No. 9 "Choral"
         Columbia Symphony Orchestra,
         Westminster Choir,
         Bruno Walter, Conductor,
         Nell Rankin, Emilia Cundari, Albert da Costa


04. Dvorak - Symphonies Nos. 8 & 9
         Columbia Symphony Orchestra,
         Bruno Walter, Conductor


05. Mahler - Symphonies No. 1 & No. 2; Lieder eines fahrenden Gesellen
         Columbia Symphony Orchestra,
         New York Philharmonic,
         Westminster Choir,
         Bruno Walter, Conductor
         Emilia Cundari (Soprano)
         Mildred Miller (Mezzo Soprano)
         Maureen Forrester (Contralto)r


06. Mahler - Symphony No.5 / Bruno Walter, New York Phil
         New York Philharmonic,
         Bruno Walter, Conductor


07. Mahler - Das Lied von der Erde / Bruno Walter
         Philharmonic-Symphony Orchestra,
         Bruno Walter, Conductor
         Richard Lewis (tenor),
         Maureen Forrester (Contralto)


08. Bruckner - Te Deum ; Mozart - Requiem / Bruno Walter
         New York Philharmonic,
         Westminster Choir,
         Bruno Walter, Conductor
         Mack Harrel, Mack Harrell, William Warfield,
         Martha Lipton, Frances Yeend, Ingrid Seefried,
         Irmgard Seefried, David Lloyd, Leopold Simoneau


09. Wolfgang Amadeus Mozart - Requiem in D minor KV 626 / Bruno Walter
         Wiener Philharmoniker,
         Bruno Walter, Conductor,
         Wilma Lipp, Soprano,
         Hilde Rssel-Majdan, Alto,
         Anton Dermota, Tenor,
         Otto Edelmann, Bass


10. Mozart - Symphonie KV 183; Requiem KV 626
         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Vienna State Opera Chorus,
         Bruno Walter, Conductor
         Lisa Della Casa (Soprano)
         Ira Malaniuk (Alto)
         Anton Dermota (Tenor)
         Cesare Siepi (Bass)
         Franz Sauer (Organ)


쟈료 출처 : 음악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