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 - 1957)
이탈리아의 지휘자.
20 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지휘자라면 우선 토스카니니를 손꼽아야 한다.
그는 자기가 지휘하는 모든 악곡의 원전을 면밀히 검토하여, 자칫하면 19 세기 후반의 명인적(名人的)인 지휘자들이 작곡가의 지시를 자기들 마음대로 고쳐서 연주하는 태도에 철퇴를 가한 인물이었다.
작곡가가 악보를 통하여 알리고 싶었던 것을 엄격히 재현하려고 했던 지휘자였다.
그리하여 하나의 객관적인 입장에서 지휘하는 태도의 문을 열었다. 따라서 20 세기 초엽에 등단한 지휘자로서 많든 적든간에 토스카니니로부터 배우지 않은 지휘자는 거의 드물었다.
토스카니니의 생애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고, 또 그의 긴 생애에는 소설적인 사건이나 에피소드가 많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에게 성실했던 인간의 행동으로서 평가할 때 비로소 정당한 평가가 내려질 것이다.
토스카니니는 1867 년 3 월 25 일 이탈리아의 파르마에서 양복공의 아들로 태어나, 1957 년 1 월 16 일 뉴욕에서 사망할때까지 그의 생애는 음악예술에 몸바친 과감한 투쟁의 일생이었다. 토스카니니는 그 열혈적인 기질을 부친에게서 이어받은 것 같다. 부친 클라우디오는 젊었을 때 정치에 흥미를 가지고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기수였던 가리발디의 운동에 참가했던 행동적인 사람이었다.
토스카니니가 소년시절부터 민주주의와 정의의 이념에 눈을 떠, 뒤에 파시즘과 나치즘에 대해 한평생 변함없는 저항을 표명했던 것은 분명히 부친의 영향임에 틀림없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과 남다른 기억력을 나타냈는데, 1876 년에서 1885 년까지 9 년 동안 파르마 왕립음악원에서 배웠다.
그는 첼로, 피아노, 작곡을 배웠는데 그 동안 틈만 있으면 묵묵히 스코어 공부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러한 공부의 성과가 졸업한 이듬해인 19세 때 전설적인 데뷔로서 나타났다.
1886년 6월 30일, 이탈리아 로시 오페라단과 그 오케스트라가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아이다>를 공연했다.
막이 오르기 직전에 지휘자와 악단 사이에 언쟁이 일어났고 화가 난 지휘자는 오케스트라를 떠나 버렸다. 할 수 없이 부지휘자가 대신해 보려 했으나 관중들의 야유 속에서 물러나야 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흥행주에게 몇몇 단원이 말했다.
"혹시 가능하다면 우리 젊은 첼리스트에게 지휘를 맡겨보는 게 어떨까요?
저 친구는 악보란 악보는 죄다 외우고 있거든요."
19살의 젊은 첼리스트가 졸지에 지휘대에 서게 되었다.
관중들은 이번에도 야유나 퍼부어야겠다고 생각 하면서 다시 객석에 앉았다.
그런데 이 왜소한 첼리스트는 보면대에 놓인 악보를 걷어버리고서 거침없이 지휘를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관중들은 넋을 잃어갔고 결국 1막이 끝나자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다. 거장 중의 거장, 토스카니니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브라질에서 느닷없이 지휘자로 데뷔한 후 이탈리아로 돌아온 젊은 토스카니니는 그해 토리노에서 카탈라니의 오페라로 지휘자의 길을 시작, 맹렬히 질주했다. 그는 로시 오케스트라의 정지휘자가 되었고, 1898 년까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객원지휘자로도 활동하였다. 초인적 기억력을 가진 그는 어떤 곡이든간에 두 세번 연습한 뒤에는 스코어를 전부 암기해 버렸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에서의 그의 지위는 점차 굳어져 갔다.
그 동안의 주목할 만한 연주로는 1892 년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 초연, 1896 년 푸치니의 <라보엠> 초연을 들 수 있다. 또한 1898년 토리노에서 가진 43번의 연주회를 전부 암보(暗譜)로 지휘하여 전 단원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나이 서른한 살의 토스카니니는 그로 인해 스칼라 극장에 전격 기용된다. 그리고 1898 년에는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를 지휘함으로써 이탈리아 최고의 지휘자로서 자리매김 하였다.
이때부터 스칼라 극장을 떠나는 1908년 까지 토스카니니의 이탈리아 오페라 개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타협을 허용치 않는 개혁 정신은 결국 스칼라 극장을 등지게 만들었다. 1908년 토스카니니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으로 진출하여 베르디의 <아이다>로 화려하게 데뷔하였다.
1910 년에는 푸치니의 <서부의 아가씨> 미국 초연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경비를 고려하지 않고 너무 완벽한 상연을 하려는 기질 때문에 그는 메트로폴리탄마저 떠나야 했다.
이후 메트로폴리탄은 끊임없이 그를 다시 불러들이려 했지만 토스카니니는 결코 잊어버리지도 용서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메트로폴리탄의 잿더미 위에서라면 지휘하겠다.”
이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1920년 스칼라 극장으로 돌아온 토스카니니는 스칼라극장 관현악단을 이끌고 도미하여 최초의 레코드 녹음을 하기도 했는데, 이 무렵부터 교향악연주회의 지휘자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정부와 맞부딪쳤다.
1926 년에는 뉴욕 필하모니를 지휘하여 동 악단과 인연을 맺었다.
한편 오페라에서도 그해 4 월에 푸치니의 <투란도트> 미국 초연을 지휘하였고, 7 월에는 바이로이트에 데뷔하는 등 주목할만한 활동이 계속되었다.
이 시점, 그러니까 1898년 스칼라 입성에서 1929년 뉴욕 필로 옮기기까지의 시기가 토스카니니의 오페라 개혁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그의 개혁 내용을 살펴보자.
우선 레퍼토리 면에서 그는 레온카발로 같은 이탈리아의 리얼리즘 작곡가나 바그너, 베를리오즈, 드뷔시 등의 외국 작품들도 과감히 상연했다.
세계 초연을 했던 오페라로는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1892년 5월 21일, 스칼라 극장), 푸치니의
<라 보엠>(1896년 2월1일, 토리노 레조 극장), 푸치니의 <서부의 아가씨>(1910년 12월 10일, 메트로폴리탄 극장), 조르다노의 <몽유병의 여인>(1915년 1월 25일, 메트로폴리탄 극장), 보이토의 <네로네>(1924년 5월 1일, 스칼라 극장), 푸치니의 <투란도트>(1926년 4월25일, 스칼라 극장)등이 있다.
그 밖에 보수적인 이탈리아 오페라 계에 당시의 새로운 작품을 소개한 공로도 대단하다.
그는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 <지크프리트>, 차이코프스키의 <예프게니 오네긴>,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등을 이탈리아에서 초연했다. 그리고 토스카니니는 당시 하나의 사교장으로 전락해 있던 오페라 하우스를 현대의 살아 있는 예술의 거처로 변모시키려 했다.
레퍼토리에서 그치지 않고 연출은 물론, 조명, 미술, 극장과 오케스트라 운영 등이 일체가 된 종합 예술 로서의 오페라를 추구하여 근대적 오페라 스타일을 확립했다.
1923년에 그가 현대 무대 예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놀드 아피아를 초빙하여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연출, 미술을 담당하게 한 것은 오페라사의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 밖에도 그는 여성들이 모자를 쓴 채 관람하는 것을 허용치 않았고 오페라 상연을 발레로 매듭짓는 관습도 폐지했다.
막도 위에서 내리는 것을 고쳐 좌우에서 단번에 개폐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무엇보다도 그때까지의 오페라 공연이 작곡자보다 가수 중심으로 공연되는 것에 반발하고 나섰다.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나비 부인>을 공연할 당시 소프라노 제랄딘 파라가 독재적인 토스카니니에게 이렇게 항의했다.
“나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지 마세요. 나는 스타입니다.”
그러자 토스카니니는 한마디로 몰아쳐버렸다.
“해가 빛나는 동안은 결코 별(스타)을 볼 수 없을 거요.”
여기서 해는 물론 토스카니니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공연의 일관된 흐름을 위해 그는 앙코르도 원칙적으로 없앴다.
당시에는 오페라 중간에라도 관중이 앙코르를 외치면 그 대목을 다시 한 번 불러 답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극의 흐름을 중요시 하는 토스카니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러한 토스카니니의 개혁은 생각보다 심각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다혈질적 이기로 유명한 시칠리아 사람들과 토스카니니가 맞붙은 사건은 유명하다.
시칠리아의 팔레르모 공연에서도 그는 역시 ‘앙코르’의 함성을 무시해 버렸다. 이에 화가 난 시칠리아 사람들은 토스카니니를 습격하려고 몰려들었다. 이 사건은 다행히 토스카니니의 용기를 마음에 들어 한 마피아 두목이 나서서 중재한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1903년 3월 11일, 토스카니니는 스칼라 극장에서 <가면무도회>를 지휘했다.
당시 조반니 제나텔로라는 가수는 인기를 한 몸에 누리는 유명한 테너였다. 그의 절창에 대해 청중들이 앙코르를 요구했다. 그러나 토스카니니는 역시 앙코르를 거절했다.
청중의 요구는 좀 더 거세게 계속되었고 결국 대소동이 일어났다.
화가 난 토스카니니는 결국 2악장에서 지휘봉을 내 던지고 극장을 뛰쳐나왔으며 다음날 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나 버렸다.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서도 스칼라 극장으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겨우 설득되어 스칼라 극장에 복귀한 것은 3년이 지나 화를 삭이고 난 후인 1906년이었다.
그는 작곡자와 그의 악보 외에 다른 쪽으로 박수를 보내는 것을 참을 수 없어했다.
푸치니가 <투란도트> 완성직전에 숨지자, 그 제자 알피노가 작품을 완성하여 1926년 4월 25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하게 되었다.
객석에는 무솔리니 수상도 와 있었다.
지휘를 맡은 토스카니니는 오페라의 마지막 부분에서 연주를 중단시키고는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푸치니가 작곡한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는 음악에 타협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비타협적인 개혁은 보수적인풍토, 가수들의 나쁜 버릇, 제작비를 절감하려는 극장 운영 측과 당연히 충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복합적인 이유로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거봉인 리코르디 가문과도 반목하게 되었다. 1929년, 결국 그는 이탈리아를 등지고 미국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토스카니니는 모든 명예가 연주자가 아닌 작곡가 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리허설 때면 입버릇처럼 고함쳤다.
“이 포르티시모를 원하는 것은 내가 아니야. 바로 베토벤이란 말이다.”
이런 입장에 대해 지휘자 빌렘 멩겔베르크가 토스카니니에게 몇 마디 충고를 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토스카니니의 반응은 이랬다.
“그는 베토벤의 <코리올란 서곡>을 예로 들면서 적합한 독일적 지휘 방식에 대해 장황하게 떠들어댔지.
무지하게 심각한 어조로 베토벤 직계 지휘자에게 들은 사실 이라고 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내가 한마디 해줬지. 나는 베토벤 자신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말이야.바로 그의 악보에게서.”
토스카니니는 슈트라우스, 뷜로, 니키슈, 말러, 바인가르트너로 내려오는 낭만주의적 지휘 스타일을 20세기 적인 객관성의 영역으로 바꾸어놓은 사람이다.
그는 이전 세대가 ‘표현’이라는 이름하에 작품을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에 질색했다. 유동적인 템포, 자의적인 강조 등은 지휘자의 자기표현욕일 뿐 작곡가의 의도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때까지 관습으로 내려오던 낭만적인 현의 포르타멘토나 슬라이드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대신 정확하면서도 엄청나게 넓은 다이내믹으로 음악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이런 점에서 토스카니니는 기존 지휘계의 혁명을 몰고 온 사람이었다.
코플랜드는 그의 저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에서 토스카니니의 음악성을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정열적인 것이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항상 선이었고 전체로서의 구성이었다.
결코 세부나 특정 소절을 떼 내어 강조하는 일이 없었다. 음악은 그 자체를 위하여 움직이며 그자신의 힘으로 살아가 우리가 음악의 모습을 차분히 볼 수 있는 행운을 안겨준다.”
물론 이러한 생각을 이루기 위해서 오케스트라를 엄청나게 닥달한 것도 사실이다.
음악 평론가인 윈스럽 서전트는 당시 토스카니니가 주는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카네기 홀 벽에는 불같은 모습의 토스카니니의 초상화가 걸려있는데, 처음 카네기 홀을 찾는 사람들은 칭얼대는 아이들에게 그 그림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곤 한다. 말 안 들으면 저 사람이 잡아간단다.
어쨌거나 토스카니니가 뉴욕 필에 부임한 덕택에 단원들은 이때 까지 안하던 일을 하게 되었다. 악보를 집에까지 가져가서 죽자고 연습해야 되는 그런 일이다. 분명히 토스카니니에겐 탁월한 능력이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는 단원들로 하여금 모든 리허설과 공연을 ‘계속되는 위기의 심정’으로 임하게 만드는 재주였다.”
토스카니니는 1936년에 그는 뉴욕 필을 떠났다. 당시 예순아홉 살의 나이였기에 모든 사람들은 이제 토스카니니가 은퇴하려나 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1937년에 NBC 방송국의 데이비드 사르토프가 밀라노에서 쉬고 있는 그에게 손짓을 했다. 내용인 즉 토스카니니만을 위한 새로운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그 연주를 전국에 라디오 방송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계획에 마음이 움직였고 마침내 1937년 12월부터 다시 지휘 활동을 시작했다.
이 악단은 기존의 NBC 방송국 오케스트라에서 서른한 명을 선발하고 나머지는 세계 각지의 유명 연주가들이 일반 공모하여 끌어 모았다.
최종적으로 아흔두 명으로 편성된 오케스트라가 결성되었다.
12월 25일, 70세가 된 토스카니니의 지휘봉이 다시 움직였다.
이날 라디오를 통해 이 전설적인 연주회를 청취한 사람은 이천만 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1948년부터 1952년에 걸친 10회의 연주회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다. 그는 실로 마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훗날 NBC 교향악단 바이올린 주자였던 오스카 셤스키는 토스카니니의 영향력이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를 떠났다고 말할 정도였다.
“내가 알고 있는 한 토스카니니는 의심할 여지없이 훌륭한 음악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의 영향력은 너무 강해져서 단원들은 마치 최면에 빠진 듯 그의 마력에 빨려들고 만다. 음악에 관한 한 그는 우리의 능력과 영혼 그리고 사고까지 소유해 버린다. 그래서 그의 곁을 떠났다.”
RCA 레코드사의 자료를 보면 일생 동안 그가 다룬 레퍼토리는 53명의 작곡가가 남긴 17개의 오페라와 175명의 작곡가가 남긴 480개의 관현악곡으로 집계되었다. 토스카니니의 작업을 지켜본 지휘자 피에르 몽퇴는
“한사람의 머릿속에 그만큼의 양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라고 말한바 있다.
푸치니의 표현을 따르자면 토스카니니는 ‘기적과 같은 사람’이었다. 토스카니니의 천재성을 얘기할 때면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그의 신비로운 암보 능력이다. 1889년 그의 데뷔 사건 때부터 1954년 마지막 공연 때까지 그의 암보력은 항상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1908년 그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공연을 맡았는데 당시 그는 일곱 시즌 동안 29개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다. 물론 암보였다.
당시 보스턴 잡지 <트랜스크립트>는 토스카니니를 소개하면서 약 60여개의 오페라를 암보로 지휘할 줄 안다고 했다. 60개라는 이 숫자는 이어서 160개로 늘어났다. 나중에 그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토스카니니가 대략 250개의 교향곡과 100여 개의 오페라, 그 밖에 수많은 실내악, 성악곡을 외우고 있었다고 전했다.
1942년에 그는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욜란타>를 지휘했는데 이는 그가 1885년 이후로 전혀 연주하지 않았던 곡이었다.
그럼에도 40년이 더 지난 시점에서 그는 서곡을 제외한 전곡을 그대로 기억해 내어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작곡가 볼프 페라리는 이렇게 감탄했다.
“정말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나의 오페라 <호기심 많은 여인들>까지도 외우고 있다.
정작 나 자신도 못 외우고 있는데 말이다.”
1954년 4월 4일, 87세 생일을 막 넘긴 날, 그의 마지막 공연이 있었다.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방송되는 이 공연에서 <탄호이저>의 한 부분을 연주하는 도중 갑작스레 그 정확하던 지휘봉이 멈춰버렸다.
순간적인 의식 장애였다. 통제실에 앉아 있던 그의 제자 귀도 칸텔리가 엔지니어에게 방송중지와 함께 브람스의 음악을 틀라고 했다.
다행히 30여 초가 지난 후 토스카니니는 기력을 찾아서 다시 연주를 이어갔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 누구보다도 토스카니니에게 충격적이었다. 평생을 통해 완벽을 추구했던 토스카니니는 결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87세의 이 열혈한은 결국 그 유명한 고별사를 끝으로 지휘대를 떠났다.
“본의 아니게 지휘봉을 놓고 나의 오케스트라와 작별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될 슬픈 순간이 왔습니다.”
지휘대를 떠난다면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57년 1월 16일 뉴욕에서 그는 역사 속으로 잠들었다. 90세를 두 달 앞둔 시점이었다. 그의 시신은 밀라노 성당으로 옮겨졌다. 베르디의 <레퀴엠>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토스카니니는 단 한 명의 제자도 배출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귀도 칸텔리가 있었지만 서른여섯 살로 요절했다. 그러나 그가 심어준 악보의 중요성과 명확하고 힘 있는 리듬은 많은 작은 토스카니니들을 만들어냈다.
그가 죽자 17년간 활동해 온 NBC 심포니도 자진 해산했다. 이 악단은 어디까지나 토스카니니를 위한 악단이었던 것이다. 이후 이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심포니 오브 더 에어’라는 이름으로 재결성하여 순회공연을 마쳤는데 그때도 지휘대는 공석으로 비워두고 공연했다. 토스카니니만한 지휘자는 없다는 뜻에서였다.
흔히 토스카니니는 동시대를 살았던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와 비교되곤 한다.
이탈리아 태생의 토스카니니와 독일 태생의 푸르트벵글러는 모두 베토벤을 장기로 하고 브람스를 사랑했고 바그너에 열성적이었지만 두 사람은 음악성도 생애도 대조적이어서 금세기 전반의 지휘계를 음악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양분하고 있다. 그 중간쯤에 브루노 발터가 있다고나 할까?
푸르트벵글러가 유명한 고고학자를 아버지로, 화가를 어머니로 둔 것에 비해 토스카니니는 가난한데다 바람둥이인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나 먹는 것조차도 곤란을 받던 사람이었다. 어릴 적에 어머니의 키스 한번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다고 그는 회고했다.
푸르트벵글러가 어려서부터 가정교사를 통해 고도의 치밀한 교육을 받았고 그리스,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 하면서 견문을 넓힌 지적 교양인이었던데 비해 토스카니니는 전적으로 공적인 교육에 의존했으며 일개 첼리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혼자서 이루어가야 했다. 여기에 독일인과 이탈리아 인이라는 기질상의 차이도 더해진다.
푸르트벵글러의 음악이 시대의 고뇌를 한 몸에 짊어진 듯 깊고 화성적인 음악 만들기에 열중한 것이라면 토스카니니는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면서도 거대한 스케일을 창조해 냈다. 그는 거짓말 이라곤 못하는 성격에다가 도덕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가 반파시스트, 반나치주의자가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언젠가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일생동안 민주주의자였다. 그러나 음악에 있어서는 독재자였다.”
무솔리니정권이 그에게 파시스트 당가인 <조바네차>를 연주하라고 했을 때 그는
“이 따위 노래는 음악이라 할 수 없다.”라면서 의연히 거부했다.
1933년 바이로이트 공연 이후 독일에서의 공연도 거부했다.
나치가 유태인을 박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1938년에는 잘츠부르크음악제에서 <탄호이저>의 상연을 계획했으나 그즈음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토스카니니가 불같이 화내던 모습은 잘 전해온다. 그 합병 날 토스카니니는 꾹 참고서 무대 연습을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 1분도 못되어 지휘대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대기실 책상을 마구 걷어차다가 선반에 놓여있던 악보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길길이 뛰었다. 실내가 난장판이 되어도 그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것이 잘츠부르크와 마지막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토스카니니의 비타협적인 성격과 음악적 완벽주의는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마틴 번스타인은 한때 뉴욕 필의 더블베이스 주자로 활약한적 있다. 그는 토스카니니의 한 일화를 이렇게 전한다.
"1926년의 추운 겨울날 아침 열시에 뉴욕 필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리허설을 가졌습니다.
토스카니니는 극장에 도착하여 한 마디 말도 없이 지휘봉을 들고서 느닷없이 ‘스케르초’라고 외쳤어요.
그러나 몇 명의 주자가 여전히 튜닝을 하고 있었죠. 그는 또다시 ‘피아니시모’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다시 시작했는데, 그는 이탈리아어로 더 크게 고함을 질러댔어요.
결국 그는 지휘봉을 부러뜨리며 무대에서 내려와 한바탕 소동을 벌였죠. 그때 시간은 불과 열시 오 분이었으며, 그 리허설은 그렇게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메트로폴리탄 공연 당시 <뮤지컬 아메리카>의 평가는 좀 더 극렬하다.
“어떤 이들은 그의 천재성을 존경하고 오늘날 최고의 오페라 지휘자로 여긴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의 탁월한 재능과 무대 효과 등의 배면에는 리허설 내내 아티스트들에게 쏟아내는 그 공포스러울 정도의 성급한 기질과 욕설이 있다는 것을.”
요컨대 그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열혈한이었다. 여든 살의 나이에도 계단을 두 칸 씩 밟고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성미였다.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는 잠을 자지 않았으며 한 번도 큰 병에 걸린 적이 없었으며 정히 아플 때는 혼자 몰래 치료를 받았고 죽을 때까지 무엇인가에 몰입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인간이었다.
그 역시 자기성격의 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여든 살의 토스카니니는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나는 노인이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은 열일곱 살 소년의 피로 나를 괴롭히는 것일까?”
토스카니니의 데뷔 레코딩은 1920년, 그의 나이 쉰셋에 시작되었다.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의 미국 순회 연주 도중이었다. 이로부터 토스카니니는 뉴욕 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BBC 심포니, NBC 교향악단 등과 함께 레코딩을 남겼다. 토스카니니의 레코딩은 대부분 RCA 레이블에 있다. RCA 는1992년 초 토스카니니의 125주년을 기념하여 82개의 디지털 리마스터링 된 컴팩트 디스크로 <토스카니니 컬렉션>을 재발매했다.
총85시간 분량의 방대한 이 전집에는 53개의 교향곡, 53개의 서곡, 7개의 오페라 전곡, 9개의 협주곡, 열 개의 무곡, 14개의 모음곡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총10시간 분량의 텔레비전 콘서트 모습도 비디오와 레이저 디스크로 발매되었다. 그의 방대한 녹음 중에서 우선적으로 꼽는 것은 베토벤의 <교향곡 전집>이다. 홀수번호의 작품에서 들리는 열기와 짝수번호 작품에서 들리는 선율미가 훌륭하다.
이와 함께 브람스의 교향곡 전집 역시 엄청난 유산이다. 토스카니니는 이탈리아의 음악가였고 칸타빌레cantabile(노래하듯이)를 사랑했다.
“노래하라, 휴지부 에서도 노래하라”는 것이 그의 유명한 말 중 하나이다.
그의 악보중심주의를 두고서 기계적 이라든가 차갑다고 말하는 사람은 토스카니니가 지휘한 베를리오즈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사랑의 장면"이나 멘델스존의 <교향곡 4번> 2악장 같은 부분을 들어보기 바란다.
오페라는 베르디와 바그너가 그의 장기였다. 전곡으로 남아있는 베르디의 <오델로>와 <팔스타프>, 몇 개의 바그너 오페라 발췌 녹음 등은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왠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푸치니의 오페라도 생각보다 괜찮다.
<라 보엠>같은 경우에서 토스카니니의 특징은 확연히 드러나는데, 그는 감상적인 푸치니를 배재하고 엄숙하면서도 아름다운 인간 드라마를 완성해 놓았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토스카니니의 유산 중에서 레스피기의 교향시 <로마 3부작>을 들 수 있다.
이탈리아인의 피가 끓어 넘치는 토스카니니 특유의 색채감과 조형미를 한껏 느낄 수 있다.
협주곡을 듣고 싶다면 그의 사위가 된 명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의 역사적 연주 실황을 꼽을 수 있다. 1943년 4월 25일 카네기 홀 실황 녹음인 이 음반에서는 77세의 토스카니니와 40세의 호로비츠의 불꽃 튀는 명연이 펼쳐진다. 물론 토스카니니의 생존기가 레코드 역사의 초, 중반기였기 때문에 음질만큼은 현재의 쟁쟁한 디지털 사운드와 비교할 수 없다.
1. 슈베르트 교향곡 제9번 <그레이트>
지금까지 토스카니니의 슈베르트 교향곡 제9번 <그레이트>는 필라델피아 관현악단과의 레코드(RCA, 1941년 녹음)를 비롯하여 네 가지(1936년, NYP/1947년, NBC)가 있다. 이 NBC 교향악단과의 1952년 2월 7일 실황 녹음은 역시 토스카니니 특유의 전진성이 강한 연주이다. 치밀한 오케스트라와 투명하고 아름다운 선율은 대리석을 다듬어 놓은 듯 눈부시다.
넘치는 열기, 거대하고 확고한 교향적 구성력, 발랄한 약동감도 그전과 다름없다. 단 RCA 반보다 10여 년 뒤의 음이므로 단연 음질이 뛰어나 토스카니니의 음악을 보다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함께 수록된 베버의 <오리안테> 서곡 역시 귀중한 NBC 교향악단과의 1951년 11월 3일 실황 녹음이다.
2. 멘델스존 교향곡 제4번 <이탈리아>, 제5번 <종교개혁>
두 곡(제4번, 제5번)다 토스카니니가 남긴 유일한 멘델스존 교향곡이다(최근에 교향곡 제3번과 <핑갈의 동굴>의 방송 녹음이 발견되어 이탈리아의 ATRS 에서 레코드가 나오기는 했다).
<이탈리아> 교향곡의 레코드 중 최고의 명연주로 꼽히는 이 토스카니니 지휘 반은 1954년 모노럴녹음이다. 그러나 밸런스가 잘 잡힌 뛰어난 음향을 들려주어 감상하기에 조금도 불편함이 없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단단한 조형(造型), 힘차고 장려(壯麗)한 다이내미즘, 빠른 템포로 치달아 오르는 숨 막히는 박력, 그러면서도 선율은 그지없이 아름답게 다듬어 섬세한 표정을 부각시킨다. 즉 로맨틱한 채색(彩色)이나 달콤한 과장 따위를 피하여 명쾌하고 직선적으로 곡을 유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토스카니니의 <이탈리아> 교향곡은 한마디로 ‘강렬한 색채와 명확한 윤곽으로 그려 낸 눈부신 유화(油畵)의 풍경화’라고 할 수 있다. 제1악장의 활기 넘치는 약동감(躍動感), 제 2악장의 맑고 산뜻한 가락, 제3악장 교묘한 템포, 제4악장의 압도적인 박력과 아득히 비상(飛翔)하는 정신의 고양(高揚)등 토스카니니만이 해낼 수 있는 역사적 명연주이다.
<종교개혁> 교향곡도 이탈리아인인 토스카니니 예술의 곡에 대한 동질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치밀한 구성미(構成美)와 위엄(威嚴)으로 가득 찬 연주는 압도적이다. 그의 지휘로 들으면 이 교향곡이 지니는 온갖 요소가 손에 잡힐 듯이 명쾌한 표정으로 부각 된다.
토스카니니는 곡을 다이내믹스의 유동(流動)으로 파악하고, 템포도 지나치게 빠르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장엄한 곡상(曲想)을 유감없이 발휘 하고 있다. 그렇다고 일부러 애써 하모니의 아름다운 뉘앙스를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특히 제3, 4악장이 뛰어나며, 제3악장은 투명하게 흘러넘치는 멜로디의 아름다움, 제4악장은 코다에서 터져 나오는 코랄 선율의 격렬한 다이내미즘과 팀파니의 강타, 템포를 뚝 떨군 표현 등으로 그가 이 곡을 얼마나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그 깊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가를 헤아릴 수 있다.
3. 드뷔시 <목신의 오후 전주곡>
토스카니니의 만년의 기념비 적인 명연주―토스카니니보다 다섯 살 위인 드뷔시는 생전에 자기 곡의 최고 연주자로 그를 꼽았다고 한다. 토스카니니가 86세 때(1953년)의 NBC 방송실황 녹음인 이 연주는 윤곽이 선명하고 명석하여 단 한군데의 애매한 점도 없는 완벽한 구도를 지닌다.
다른 지휘자에 비해 너무 명석하므로 드뷔시적인 면이 부족하다고 불평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회화성(繪畵性)이나 독특한 향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묘하게 변화하는 음악의 색채감과 다이내믹스(강약법)가 드뷔시의 문양을 보다 분명하게 살려 내고 있다. 또 NBC 교향악단의 탁월한 앙상블은 그토록 치밀하고 오묘할 수가 없다.
토스카니니 만년의 연주이지만 그의 나이가 전혀 의식 되지 않는 역사적 명반이다.
4. 레스피기 <로마의 분수>, <로마의 소나무>, <로마의 축제>
토스카니니의 ‘로마 3부작’ 레코드 ― ‘로마 3부작’ 연주 중 반드시 들어야 하는 것이 토스카니니 지휘의 레코드이다.
곡이 지니는 빛나는 효과를 그만큼 충분히 발휘한 지휘자도 드물다.
토스카니니의 표현은 다이내믹한 동력감(動力感)과 엄격한 조형성(造形性)을 뒷받침으로 하여 레스피기의 원색 적인 관현악의 빛도, 부드러운 시적 환상의 아름다움도, 쉴 새 없이 밀어닥치는 피날레의 박력까지도 모두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실감케 해준다. 비록 모너럴 녹음 이지만 전체적으로 팽팽하고 육중한 표현이 잘 포착되어 있고 다이내믹레인지도 넓다.
독주 악기의 음향이 생생하게 살아 있으며 세부의 디테일은 선명하다. 특히 <로마의 소나무> 제2부 끝 부분의 나이팅게일의 울음소리 녹음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면서도 혼연일체의 앙상블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다.
연주 면에서도 토스카니니는 템포가 뛰어날 뿐 아니라 표현이 풍성하고 남구적(南歐的)인 분위기가 돋보인다. 화려 하고 장중하며 리드미컬한, 칸타빌레의 요소를 골고루 갖춘, 빈틈없는 명연주가이다.
가령 <로마의 소나무> 제4부를 예로 들어보자.
피아니시모에서 크레센도 하는 행진리듬의 고양(高揚)은 교묘한 아첼레란도로 뛰어난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부분은 그저 절묘하다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또 <로마의 축제> 연주도 14 종류의 타악기에 하프와 오르간, 만돌린까지 사용하여, 소용돌이치는 음향을 정말 놀라울 정도로 명확하게 처리 하여 눈부신 색채감을 발휘한다.
웅장 화려하게, 혹은 지극히 고요한 행복의 경지를 자아내면서 신선하고 섬세한 연주를 전개한다.
제1부 팡파르의 충격 적인 음향, 이에 대비하여 순교자가 찬미가를 부르는 부분의 처절한 상황으로부터 차츰 승화되어가는 숭고한 아름다움, 제2부의 서정적인 선율 그리고 또 이토록 무드의 변화가 심한악곡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놀라울 정도로 다이내믹하게 연주 하면서도 조금도 겉치레가 없이 맑고 투명하게 뛰어난 조형미로 다듬어 놓은 예를 다른 연주에서 들어 본 일이 없다.
제3부의 만돌린이 매혹적인 세레나데의 정서를 섬세하게 펼쳐주는 보드라움과, 제4부의 토스카니니만이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소용돌이치는 축제의 엄청난 음량의 대범람 이라는 극적인 대비는 토스카니니의 턱없이 크고 엄청난 표현의 폭을 여실히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NBC교향악단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력을 다하면서도 전체적으로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앙상블을 이룩한 연주에는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현도 잘 어울리지만 금관의 눈부신 빛깔은 압도적이다.
이처럼 화려하고 이만큼 완벽한 연주는 앞으로도 좀처럼 들어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 앨범
01. Toscanini Conducts Brahms - Serenade No 1 & 2, Piano Concerto No 2, Etc
New York Ladies Choir,
New York Philharmonic,
Arturo Toscanini, Conductor,
Robert Casadesus, Piano
02. Historical - Arturo Toscanini Rehearses Die Walkure
NBC Symphony Orchestra,
Arturo Toscanini, Conductor,
Rose Bampton (Soprano - Sieglinde)
Set Svanholm (Tenor - Siegmund)
03. Toscanini Conducts Mozart And Vaughan-Williams
NBC Symphony Orchestra,
Arturo Toscanini, Conductor,
04. Beethoven - Symphonies No 3 & 5 / Toscanini, NBC So
NBC Symphony Orchestra,
Arturo Toscanini, Conductor,
05. Historical - Verdi: Un Ballo In Maschera / Toscanini, Nelli
NBC Symphony Orchestra,
Robert Shaw Chorale,
Arturo Toscanini, Conductor,
Virginia Haskins (Soprano - Oscar)
George Cehanovsky (Baritone - Silvano)
Nicola Moscona (Bass - Samuel)
Norman Scott (Bass - Tom)
John Carmen Rossi (Tenor - Judge)
Jan Peerce (Tenor - Riccardo)
Herva Nelli (Soprano - Amelia)
Robert Merrill (Baritone - Renato)
Claramae Turner (Mezzo Soprano - Ulrica)
06. Beethoven - Missa Solemnis, Violin Concerto / Toscanini
NBC Symphony Orchestra, Westminster Choir,
Arturo Toscanini, Conductor,
Jussi Bjorling (Tenor), Zinka Milanov (Soprano)
Bruna Castagna (Mezzo Soprano),
Alexander Kipnis (Bass)
07. Complete Collections - Beethoven: 9 Symphonies / Toscanini
NBC Symphony Orchestra,
Robert Shaw Chorale,
Arturo Toscanini, Conductor,
Eileen Farrell (Soprano)
Nan Merriman (Mezzo Soprano)
Jan Peerce (Tenor)
Norman Scott (Bass)
08. Arturo Toscanini - The Farewell Concert At La Scala
09. Tchaikovsky, Beethoven - Piano Concertos / Toscanini, Horowitz
NBC Symphony Orchestra,
RCA Victor Symphony Orchestra,
Fritz Reiner, Arturo Toscanini - Conductor,
Vladimir Horowitz, Piano
10. Berlioz - Romeo And Juliet, Etc / Toscanini, NBC So
NBC Symphony Chorus, NBC Symphony Orchestra
Arturo Toscanini, Conductor,
Gladys Swarthout (Soprano)
John Garris (Tenor)
Nicola Moscona (Bass)
Mack Harrell (Bass)
11. Debussy - Iberia, La Mer, Etc / Toscanini, NBC Symphony
NBC Symphony Orchestra,
Arturo Toscanini, Conductor
쟈료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