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프게니 므라빈스키(Evgeny Mravinsky, 1903 ~ 1988)
러시아 태생의 지휘자.
에프게니 므라빈스키(Evgeny Mravinsky)는 러시아(구 소련) 지휘자의 장로격인 인물이었다.

무려 반세기동안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을 이끌었고 고집스런 카리스마로 당대를 풍미했던, 어느덧 전설이 되어버린 이름이다.

에프게니 므라빈스키(Evgeny Mravinsky).
음악을 향한 이 마에스트로의 열정과 강단은 현대의 '제트족 지휘자들'이 영원히 깰 수 없는 오직 그만의 신화가 되었다. 모스크바 솔로이스트를 창단했고, 1981년까지 지휘를 맡았던 레프 마르키츠는 에프게니 므라빈스키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므라빈스키는 무시무시한 폭군이었다. 모두가 그를 두려워했다. 오케스트라의 전단원들은 예정된 리허설보다 한 시간 일직 나와 악기를 조율했고, 30분 뒤에는 리허설 준비를 완전히 끝마쳤다. 그리고 므라빈스키가 건물 입구에 나타나면 단원들은 '포즈두크(Fozduch)'라고 속삭였는데, 이 말은 대략 '적이 온다. 준비해!'와 같은 뉘앙스였다."

마르키츠는
"므라빈스키의 리허설은 엿듣는 일이 철저히 금지돼 있었지만, 나는 언젠가 기둥 뒤에 숨어 그의 리허설을 본 적이 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미 수없이 브람스의 교향곡 2번을 연습했으면서도 아직 여덟 번이나 더 리허설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끊임없는 연습으로, 그는 악보의 가장 작은 세목(細目)까지도 완벽하게 표현하려는 것이었다."
라고 회고했다.

1938년부터 1988년 사망할 때까지 무려 40년 동안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던 카리스마적인 지휘자, 에프게니 알렉산드로비치 므라빈스키.

요즘 나온 음반들에서 특정 지휘자의 개성이나 카리스마, 그만의 음악적 지향점을 찾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기량으로는 별로 흠잡을 데 없는 정상급이되, 그것을 넘어선 '어떤 것'은 찾아볼 수 없는 몰개성의 시대라고나 할까. 그래서 므라빈스키의 연주들은 더욱 두드러진다.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성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므라빈스키와 그가 이끄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소리는 모두 그와 같다. 광야를 거침없이 질주하는 야생마의 힘과 에너지. 므라빈스키는 처음부터 일도양단하듯 곡의 핵심을 향해 돌진한다.

오케스트라 단원들 또한 잘 조련된 정예군처럼 신속하고도 효율적으로 적을 향해 내닫는데, 그들의 연주는 일견 덜 다듬어진 듯하고 거친 맛을 주지만, 실제로는 치밀하게 정제되어 있어서 흔한 표현대로 '한치의 오차 없는' 일사불란한 합주력을 과시한다.

쇼스타코비치의 <제5번 교향곡>은 수많은 지휘자들에게 난공불락처럼 여겨진다.
수많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들이 5번에 도전했지만, 대부분 '그저 그런' 연주를 들려주는데 그쳤다. 그 안에 담긴 굴곡 깊은 정서와 압도적인 에너지를 제대로 소화해 들려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엄청난 '과속연주'를 들려주는 번스타인의 녹음에 비해, 므라빈스키는 과속이 주는 스릴과 힘을 고스란히 뽑아내어 보여주는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두 교향곡(제4번, 제6번)에 관한 한 므라빈스키는 최고의 귄위를 자랑한다.

실제로 많은 비평가들이 그의 연주를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연주의 '전범'으로 삼고 있기도 한다. 므라빈스키는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들을 통해 '가장 슬라브적인' 해석을 보여준다.

강약의 뚜렷한 대비, 힘차면서도 정밀성을 잃지 않는 현의 앙상블, 생기 넘치는 금관의 약동... 므라빈스키의 차이코프스키는 뜨겁게 용솟음치는 피의 힘, 슬라브 민족의 기백을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므라빈스키는 그만이 들려줄 수 있는 '가장 러시아적인' 차이코프스키를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므라빈스키는 1938년 모스크바의 전 소련연방 지휘자 콩쿨에서 1위를 한 인연으로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을 이끌기 시작하여 반세기 동안 한 오케스트라를 조련하고 이끌었다.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오늘은 유럽에서, 내일은 미국에서, 이 악단과 저 악단을 오가기 바쁜 오늘날의 소위 '제트족 지휘자들'로서는 앞으로도 영원히 깰 수 없는 기록이기도 하다. 자신만의 소리, 자신만의 음악을 일관되게 들려준 지휘자였기에 므라빈스키의 음반들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에프게니 므라빈스키는 1903년 6월 4일, 러시아 성 페테르스부르크(현재의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1920년에 레닌그라드대학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중퇴하고, 후에 유명한 배우가 된 체르카소프와 함께 마린스키 극장에 잡역으로 들어갔다. 이 마린스키 극장은 현재의 레닌그라드 국립 아카데미 오페라 발레 극장의 전신인데, 그가 들어갈 당시는 표도르 샬리아핀, 이반 아르체프스키, 이반 에르쇼프 등 러시아 오페라의 지보라 할 수 있는 명가수들이 있어서 바로 가까이에서 그 예술에 접할 수가 있었다.

그 후 레닌그라드 발레 학교의 피아니스트로서 채용되어 유명한 지휘자와 무용수들의 연습 광경을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1924년 그는 정식 음악 교육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입학하여 체르노프에게 작곡을, 가우크와 마르코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1930년에 작곡과를, 1931년에는 지휘과를 각각 졸업하였는데, 그보다 전인 1929년에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지휘를 경험했다.

1931년 레닌그라드 오페라 발레 극장의 부지휘자로 임명되었고, 1932년에는 당시 아직 신인이었던 가리나 브라노바가 주연하는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음악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지휘하면서 데뷔하였고,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어서 국립 키로프 극장의 지휘자가 되어 6년 동안 그 지위에 있었다.

므라빈스키가 소련 악단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38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 소비에트 지휘자 콩쿠르에서 1등상을 수상하고 나서였다.

그 결과 그의 이름은 소련 내에 널리 알려졌고, 동시에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의 정지휘자로 발탁되는 행운을 잡게 되었다.

이때 35세의 젊은 나이로 지휘자로서의 경험이 몇 년밖에 되지 않았던 그가, 소련 최고의 오케스트라의 책임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얼마나 그의 장래가 촉망되고 있었나 하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처음에는 이 관현악단의 고참 멤버들로부터 '오케스트라의 생도'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지만, 그동안 급속도로 두각을 나타내고 곧 권위있는 지휘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침체 상태였던 레닌그라드 필하모니를 육성하고 세계적인 유명 오케스트라로 높인 공적으로 1946년에 레닌 상을 수상하였으며, '사회주의 노동 영웅', '소비에트 연방 인민 예술가'의 칭호를 받는 등 소련 음악계의 국보적인 존재였다. 그는 또한 레닌그라드 음악원 시기에 친구가 된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을 비롯하여 러시아 및 세계 각국의 현대음악을 소개한 공적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후에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원장을 겸하면서 후진들의 교육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

므라빈스키는 러시아의 정통적인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그것을 완벽할이만큼 다듬어서 건강하고 명쾌한 연주 스타일로 정비한 거장이었다. 그는 1956년과 1960년에 레닌그라드 필하모니를 이끌고 유럽 연주여행을 했는데, 그때 유럽 악단은 입을 모아 그의 탁월한 지휘를 격찬했다.

므라빈스키는 오늘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대지휘자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다만 당시 소련의 정치사정과 시대상, 그리고 므라빈스키 자신의 병약함으로 인해 광범위한 객원지휘를 하지 못하므로 서방세게에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3월 6일, 므라빈스키는 마지막 연주회에서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8번 - 미완성>과 브람스의 <교향곡 제4번>의 연주를 끝으로 무대뒤로 사라졌다. 그리고 1988년 1월 19일, 레닌그라드에서 향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므라빈스키의 지휘는 토스카니니를 연상케 하는 정도로 격렬한 힘에 넘치는 것으로서, 스케일이 큰 표현에는 거장다운 품격이 스며나오고 있다. 레퍼토리는 바흐, 하이든에서 현대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매우 넓었다. 하지만 그 중심이 되는 것은 역시 러시아 작품으로서, 그 중 차이코프스키,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연주는 천하일품이라 할 수 있다.

므라빈스키는 쇼스타코비치의 최대의 이해자로서 정평이 나 있어서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의 정지휘자가 되기 바로 전년에 손을 댄 <교향곡 제5번>을 비롯하여 <교향곡 제6번>, <교향곡 제8번>, <교향곡 제9번>, <교향곡 제10번>, <교향곡 제11번>, <교향곡 제12번>, <숲의 노래>,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등 쇼스타코비치의 주요한 작품 거의 모두를 초연하였다.

그가 남긴 레코드는 차이코프스키와 쇼스타코비치의 것들이 대단한 명연주이다. 거의가 레닌그라드 필하모니를 지휘한 것인데, 대지휘자치고는 그 수는 매우 적다. 우선 러시아 작품에서 명반들이 많은 데, 차이코프스키에서는 <교향곡 제4번>, <교향곡 제6번>(이상 그라모폰), 쇼스타코비치에서는 <교향곡 제5번>, <교향곡 제7번>, <숲의 노래>(이상 멜로디아) 등이 녹음은 오래되었지만 레코드 사상에 길이 남을 모범적인 연주라 하겠다.

특히 챠이코프스키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두드러지는 금관악기의 포효속에서 절망의 애수보다는 정열의 고양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어쩌면 구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차이코프스키의 절망을 거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1965년 2월에 실시된 연주회의 실황 녹음에 의한 <모스크바 음악원 연주회장의 므라빈스키>라는 일련의 레코드(멜로디아)는 므라빈스키의 원숙한 예풍을 알 수 있다는 데서 귀중하다. 그 중에서도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제7번>과, 글린카의 오페라 <루슬란과 루드밀라> 서곡 외에 소품을 수록한 한 장이 각각 경청할 만한 것이다.

또, 그는 1978넌의 빈 예술 주간의 라이브 녹음에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5 번>,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5번>, 브람스의 <교향곡 제2번>과 그 밖의 것을 수록한 앨범(멜로디아)에서는 실연다운 긴박감과 박진감이 넘쳐 흐르는 열렬한 연주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만년의 므라빈스키의 예술 경지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명반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으로 <현악 세레나데>, <이탈리아 기상곡>, 스크랴빈의 <법열(法悅)의 시(詩)>가 좋다. 협주곡 연주로는 피아니스트 리히터의 독주에 의한 챠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이 명연이고, 러시아 작품은 아니지만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 힌데미트의 <세계의 조화>, 바르토크의 <현과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이 명연으로 정평이 높다.


쟈료 출처 : 음악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