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클렘페러, Otto Klemperer (May 14, 1885 - July 6, 1973)
독일 태생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음악애호가들은 19세기 음악예술에 특히 향수를 느낀다.

낭만파 음악의 태동과 함께 다양함과 극치를 이루었다는 점도 있겠으나 무엇보다 음악을 통한 무한한 감동의 세계를 맛불 수 있었던 시대가 바로 19세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음악의 현장을 직접 체험하고 함께 호흡해 온 19세기 지휘자들의 전설적 지휘는 두고두고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비록 디스크로 듣는 것이긴 하지만 창작과 연주가 완전한 일체감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오토 클렘페러, 그도 역시 지금은 이 세상에 없지만 초연한 예술의 멋과 낭만을 지니고 있는 짙은 내음을 우리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준 거장이요, 위대한 지휘자였다.

1973년 8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박진감에 넘치는 정열과 거인적 표현력으로 관중을 압도했다.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 만의 예술이었고 일생을 통해 비단 음악뿐만 아니라 인간적 시련을 거뜬히 이겨낸 지휘자로서도 유명했다.

오토 클렘페러는 1885년 5월 14일 당시 프러시아의 브레슬라우(Breslau, 현재 폴란드의 브로츠와프)에서 태어났다.
곧 그의 가족은 함부르크로 이사갔으며 그는 그곳에서 중학교를 마쳤다. 16세 때 프랑크푸르트 고등 음악학교에 들어갔는데 다시 베를린의 슈테른 음악원으로 옮겨 피아노를 제임스 크바스트에게, 작곡을 필립 샤르벵카와 한스 피쯔너에게 사사했다.

1905년 오프 스테이지 무대에서 말러의 <제2번 교향곡-부활>을 연주하면서 그를 만났고, 그후 1907년 말러의 추천으로 프라하의 도이취 가극장 지휘자가 됨으로써 화려하게 출발했다.

1910-14년에 함부르크 시립 가극장 지휘자, 1914-16년에는 슈트라스부르크 극장 감독을 겸했고, 1917-24년에는 쾰른 가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것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1924년에는 비스바덴 및 베를린 국립가극장 음악 총감독이 되었다. 이 시기의 활약으로 그의 명성은 확고한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1927년에는 베를린 크롤 가극장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이때가 그의 가장 정력적인 활동시기였는데 국립가극장의 에리히 클라이버, 시립 가극장의 브루노 발터와 더불어 명성을 날렸고, 그곳을 현대음악의 메카로 변모시켰다.

그는 정통적인 곡목들과 함께 즐겨 새로운 작품들을 채택하였는 바, 야나체크의 오페라 <죽음의 집, From the House of the Dead>, 쉔베르크의 오페라 <행복한 손>, <기대(期待), Erwartung>,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음악 <병사(兵士)의 이야기>, 오페라 <오이디푸스 왕, Oedipus Rex>, 힌데미트의 오페라 <카르디약(Cardillac)>, <오늘의 뉴스> 등을 연주하였다.

그리하여 크롤 가극장은 전세계의 주목을 끌었고 가장 활기찬 곳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로 이 새로운 시도는 반대에 부딪혔다. 클렘페러의 인기는 올라갔으나 극장은 적자를 내어 1931년에 폐쇄되었고, 그는 베를린 가극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클렘페러는 그곳에서도 같은 시도를 계속하였으나 보수적인 힘의 저지를 받았다.

1933년 그는 독일 문화에 공헌한 공로로 힌덴부르크 대통령으로부터 괴테 메달을 수여 받았다. 그러나 수주일 후에 나치스에 의해 그 지위를 해제당했고, 유태계였던 그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스위스로 망명했다. 이때부터 그의 고통스럽고 힘든 해외생활이 시작되었다.

1933년 클렘페러는 로스엔젤레스 교향악단 상임지휘자가 되어 이 악단을 높은 수준까지 끌어 올렷으나, 이상할 정도로 비평가들은 그에게 냉담했다. 1937년에는 피츠버그 교향악단 상임을 겸하면서 이 악단을 재건했으나 그곳도 1년 후에 그만두어야 했다. 연주 도중에 지휘대에서 떨어져 타박상을 입은 것이 원인이 되어 결국 1939년 뇌종양수술을 받아야 했으며, 간신히 생명은 건졌으나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다. 그런 이유로 클렘페러는 1940년 로스엔젤레스 필하모니 상임의 지위를 사임하고 요양에 들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그는 유럽으로 다시 돌아갔다.

황폐한 유럽이었지만 미국에서보다 희망이 있는 듯 싶었다. 그리하여 1948년 부다페스트 가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하여 3년 동안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그의 경력을 다시 갈고 닦았다.

1948년에는 15년만에 베를린 필하모니의 지휘대에 올라 절찬받았고, 비인 교향악단을 연속 지휘하여 호평을 거두었다.

1951년에는 런던에서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을 지휘하여 대 성공을 거두었다. 푸르트뱅글러가 별세했고, 발터가 미국에 잇는 상황에서 그는 두터운 신망을 받으면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렇게 그의 앞길이 순탄하게 열리고 있을 때, 캐나다의 몬트리올 공항에서 트랩을 내려오다가 떨어져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

1954년과 55년에 두차례의 대수술을 받고 모짜르트의 <돈 죠반니>의 방송을 지휘하던 중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더우기 이 무렵에는 클렘페러는 전설적인 거인이 되어 있었다. 음악제와 연주회의 스케줄이 꽉 짜였고 잃었던 영광이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1959년에 다시 사고를 당하였다.
파이프를 문 채 잠을 자다가 시트에 불이 붙어 큰 화상을 입었다. 재기불능인듯 싶었지만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나 필하모니아 관현악단 및 합창단의 종신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수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고 1963년 고혈압으로 다시 쓰러졌으나 다시 재기, 결국 1973년까지 10년 동안이나 더 일을 하였다. 그리고 몇달 후, 오토 클렘페러는 1973년 7월 6일 스위스 취리히의 자택에서 잠을 자다가 향년 8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가 1973년 타계하기까지 불굴의 의지로 연주와 녹음을 병행한 것은 오늘날의 음악팬들에겐 커다란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말년에 이르러 모든 곡에서 지극히 느려진 템포가 ‘악취미’라는 평도 있지만 그의 음반을 들어보면 그 가공할 흡인력에 할말을 잊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힘든 벼랑을 기어 오르는 등반가같이’ 만들어낸 음악은 정상에 올라선 순간의 환희를 준다.

클렘페러의 연주가 그렇다.
첫 화음이 열리는 순간부터 마지막 화음이 스러질 때까지 전체의 구도는 하나로 잡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광활한 정신의 환희가 느껴지는 것이다.

바흐의 미사 B단조(EMI), 브루크너, 말러의 교향곡 등 그의 음반 중에는 절대적인 완성도를 가진 것이 수두룩하다.

클렘페러가 지휘자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21세 때 베를린에서 당대의 지휘자요, 작곡가였던 말러를 만나 크게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클렘페러 자신이 기술한 "내가 어떻게 지휘자가 되었는가?"에 대한 글을 보아도 말러와의 첫 대면에서 말러의 교향곡 "부활"을 피아노로 쳐 크게 칭찬을 들었고 부르노 발터와 마찬가지로 말러의 영향 속에서 지휘자로 대성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말러와의 교류는 그로 하여금 말러 음악의 최고 해석자로 남게 했다.

실제로 1963년 78세 때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그리고 소프라노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 등과 엔젤에서 녹음 발매한 말러의 교향곡 <제 2 번 교향곡-부활>은 명반으로 꼽히고 있다.

19세기에 태어나서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며 우리들에게 음질 좋은 스테레오 디스크까지 남겨준 클렘페러의 명반에서는 75세의 생일기념으로 1960년 5월 런던의 킹스웨이홀에서 녹음한 바그너의 서곡과 전주곡집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이미 폴란드 음악제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를 지휘, 크게 성공을 했었고 더욱이 이때의 연출은 바그너의 친손자인 빌란트바그너가 했었기 때문에 바그너 지휘자로서 명성을 높이고 있었다.

또한 런던의 5대 교향악단 중의 하나인 필하모니아가 쓰러져 갈 때 클렘페러는 이 오케스트라를 다시 세계 정상으로 끌어 올렸고 이름도 앞에다 뉴(New)를 붙이어 뉴 필하모니아라 불렀다. 그래서 레코드를 보면 필하모니아와 뉴 필하모니아 등으로 되어 있는데 같은 오케스트라이며 클렘페러의 분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클렘퍼러는 본디 섬세하고도 감성적인 낭만주의자였다.
클렘퍼러는 독일 후기 낭만파 음악에 그 고향을 두고 있다.

바그너, 브루크너, 말러야말로 그의 음악세계이다.
그는 정서를 소중히 여기나 조형의 밸런스에 역점을 두었으며, 음악의 표정과 앙상블의 통솔에 있어서 강력한 의지의 힘으로 엄하게 다룬다.

독일인 특유의 무뚝뚝함이 때로는 거칠은 음을 느끼게도 하지만, 클렘페러는 발터와 같은 부드러운 서정의 지휘자는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브람스와 같은 북독일적인 야인적 성격의 음악가이다.

초기시대의 그의 녹음을 들어보면 낭만적인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다.
그러나 그처럼 모진 아픔을 견디어 낸 그의 후기 녹음들을 들어보면 무엇과도 타협을 거부한 채 영원을 향해 돌진하는 무한한 힘의 원천을 실감케 된다. 특히 현악기군과 관악기군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오묘한 분위기는 클렘페러 예술의 절정이다.


<Bruno Walter, Arturo Toscanini, Erich Kleiber, Otto Klemperer, Wilhelm Furtwangler, Berlin, 1929>

오토 클렘페러!
6척 거구에 무뚝뚝한 표정은 언뜻 예술가라는 느낌이 들지 않지만 내재된 예술적 정열과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힘은 또 하나의 위대한 지휘자상을 느끼게 한다.

그의 지휘에서 특히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은 정평이 있으며 바그너, 브람스, 말러, 브루크너 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명연주를 남기고 있다. 지금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당당하고도 대하와도 같은 흐름이 들어 있는 그의 음악은 우리에게 엄청난 감동이 아닐 수 없다.



■ 앨범

01. Beethoven - Symphony No 9 / Klemperer, Giebel, Ludwig, Et Al
Philharmonia Orchestra & Chorus,
Otto Klemperer, Conductor,
Agnes Giebel (Soprano)
Christa Ludwig (Mezzo Soprano)
Richard Lewis (Tenor)
Walter Berry (Baritone)


02. Mahler - Symphony No 2 / Klemperer, Vienna Po, Et Al
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Otto Klemperer, Conductor,
Galina Vishnevskaya (Soprano)
Hilde Rossl-Majdan (Alto)


03. Brahms - Symphonies & Ein Deutsches Requiem / Klemperer, Philharmonia Orchestra
Philharmonia Orchestra,
Otto Klemperer, Conductor


04. Beethoven - Missa Solemnis / Klemperer, Soderstrom, Et Al
New Philharmonia Orchestra,
Otto Klemperer, Conductor,
Elisabeth Soderstrom (Soprano),
Marga Hoffgen(Alto),
Waldemar Kmentt (Tenor)
Martti Talvela (Bass)


05. Wagner - Orchestral Highlights / Klemperer, Philharmonia Orchestra
Philharmonia Orchestra,
Otto Klemperer, Conductor


06. Bruckner - Symphony No 4; Strauss / Otto Klemperer, Et Al
Cologne West German Radio Symphony Orchestra,
Otto Klemperer, Conductor


07. Wagner, Brahms, Mahler, Beethoven / Ludwig, Klemperer
Philharmonia Chorus,
Philharmonia Orchestra,
Otto Klemperer, Conductor,
Christa Ludwig (Mezzo Soprano)


08. Beethoven - Egmont Overture; Brahms - Symphony No 1; Mahler - Kindertotenlieder
Cologne West German Radio Symphony Orchestra,
Otto Klemperer, Conductor,
George London (Baritone)


쟈료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