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 - 1989)
오스트리아 태생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유럽 음악계의 제왕(帝王)"으로 통하는 20세기 최고의 지휘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베를린 필하모닉 관현악단의 종신 상임지휘자로서, 그리고 비인 악우협회합창단의 종신 상임지휘자를 겸하였다.
또한 잘츠부르크 음악제 프로듀서, 잘츠부르크 부활제 음악제 및 카라얀 재단의 최고 책임자로서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런 모든 것들은 카라얀이란 인물이 불세출의 지휘자라는 데에 귀일하며, 이는 그 누구도 의심치 못할 사실이다.
카라얀은 1908년 4월 5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부친인 외과 의사 에른스트 폰 카라얀과 슬로바키아 출신인 어머니 마르타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카라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바로 그의 형이었다.
카라얀은 유난히 작은 몸집이었기에 큰 덩치의 형에게 항상 열등감을 가졌으며 음악을 시작한 계기도 형에게 피아노를 뒤지지 않겠다는 단순한 경쟁의식에서 시작되었다.
그가 스스로 인터뷰에서 터 놓은대로 그는 어릴 적부터 친구를 사귀기 힘들어하는 성격이었으며, 누구에게도 자기의 본심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런 그의 고독감은 바로 음악이라는 도피처에 미치도록 몰입하게 만들었다. 비록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교육을 받고 있었지만 카라얀은 형을 따라 공대에 입학했는데 자신의 재능이 부족함을 일찌감치 깨닫고 결국 포기하였다.
이후 그는 피아니스트로서의 길을 가려 했지만 이 분야에서도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던 차 8세부터 10년동안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콘서바토리에서 음악 교육을 받을 때부터 은사였던 파움가르트너 (Bernhard Paumgartner)의 조언으로 마침내 지휘자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카라얀은 1929년까지 1년반동안 빈에서 집중적으로 지휘 공부를 하게 되었고, 이때 부터 그에게 행운이 많이 따랐다.
당시 빈 국립가극장의 건물 관리자 겸 감독관이었던 사람이 바로 카라얀의 숙부였는데, 그는 조카인 헤르베르트에게 유명한 지휘자의 연주회나 비공개 연습을 들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시 국립가극장에서는 수석 지휘자인 브루크너의 제자 프란츠 샬크를 비롯하여 리하르트 슈트르우스,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클레멘스 크라우스 등이 자주 연주회를 열었기에 지휘 공부중인 카라얀으로서는 하늘이 내린 행운이었다.
마침내 1928년 12월 27일 분델러 교수의 클라스의 연주회에서 카라얀은 롯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 연주회를 통해 그는 지휘가 자신의 천직임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빈 아카데미를 졸업한 카라얀은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돌아와서 가족과 파움가르트너등 지인들을 총 동원해 1929년 1월 22일 모차르트테움 대강당에서 데뷔 연주회를 열었다.
아직 만 21세도 채되지 않은 지휘자가 이날 택한 곡목은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돈 주앙>이었다.
이 날 공연을 지켜보던 독일의 지방도시 우름(Ulm) 시립극장의 지배인 디트리히는 카라얀의 재능을 인정하여 연습 지휘자의 자격으로 카라얀을 우름에 채용하였다. 이런 이유로 카라얀의 지휘 경력의 출발점은 우름이 된것이다. 이 지방의 허름한 오페라 극장의 악조건은 카라얀으로 하여금 역경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기르게 해주었다.
우름에 취임한 3개월 후인 1929년 5월에 그는 빈으로 가서 국립가극장에서 토스카니니가 이끄는 밀라노 스칼라좌의 초청공연을 듣게 되었다. 이 때 연주 작품은 베르디의 <팔스타프>와 도니제티의 <람메르모르의 루치아>였으며, 당시 최고의 전성기에 있던 토스카니니는 카라얀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편 여름휴가 기간에는 잘츠부르크의 음악제을 참관하여 당대 최고의 지휘자들의 음악을 피부로 접하였다.
또한 1930년부터 2년간 토스카니니가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에 초대되어 바그너의 오페라를 지휘하게 되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카라얀은 오토바이를 타고 바이로이트로 가서 이 공연을 관람하였다.
다시 한번 토스카니니가 카라얀에게 끼쳤을 영향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1930년대초부터 독일은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1933년 4월 8일, 독일에 거주하는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박해가 시작되고 1주일후, 카라얀은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당(나치)에 입당하게 되었고, 같은 해 5월 1일 확인적 행위로서 두번째로 나치에 입당 절차를 밟았다.
카라얀의 공식적인 입장은 2년뒤인 1935년에 입당한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는 조금이나마 늦게 입당해서 얼마간 연합국의 판결에서 형이 가벼워지기 위한 술책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1934년 봄 카라얀의 우름에서의 계약은 끝이 났다.
당시 독일은 수많은 실업자가 있었으며 카라얀도 그 중 하나에 불과하게 됐던 것이다.
직업을 구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상경한 카라얀은 수개월간을 궁핍하게 지내다가 마침내 아헨(Aachen)에서 제 1지휘자를 모집하는 것을 알고 지인을 통해 지휘 시연을 할 기회를 잡았다.
결국 초반에 나이 많은 단원들의 카라얀이 너무 젋다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누군가 카라얀을 강력히 추천하여서 결국 아헨의 교향곡과 오페라 부문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의 나치경력에 대해 카라얀은 이때 아헨의 지휘자가 되기 위해서는 당원이어야한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입당했노라고 말하지만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미 2년전부터 카라얀은 나치당원이었다.
더구나 당시는 많은 실력있는 유태인 음악가들이 추방되고 있던 터라 독일내에서 카라얀은 쉽사리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마침내 카라얀은 1935년 27세의 나이로 독일내 최연소 음악 총감독에 취임하였고, 이후 카라얀은 기꺼이 나치를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1938년 7월에 카라얀은 아헨에 와서 알게된 미모의 오페레타 가수 엘미 호르가레프와 첫번째로 결혼하였다.
그녀는 카라얀보다 11년 연상이었고 4년후 카라얀이 두번째 결혼한 후에도 재혼하지 않았다.
이 당시 카라얀은 당대 독일 최고의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와 라이벌 관계로 발전되가고 있었는데 마침내 이해 4월 8일 처음으로 베를린 필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 첫 만남에서 언젠가 이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카라얀은 키웠다고 한다.
또한 이때부터 독일 그라모폰과 함께 음반작업도 시작하였다.
카라얀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참석한 가운데 <엘렉트라>를 연주하는 등 지휘자로서도 승승장구하게 된다. 이후 카라얀은 아헨의 수석 지휘자 자리를 그만 두게 되는 1942년 이혼녀 아니타 귀터만과 재혼하였다. 그녀는 카라얀보다 9세 젊고 유태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카라얀은 후에 이 이유로 해서 나치당에서 탈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카라얀은 끝까지 나치당원이었다는 자료가 남아 있다.
좀 더 정확한 진실은 그가 전시중 제국의 노선에 충실히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징집명령을 받게 되었다가, 국립가극장의 지휘로만 활동이 제한되어 종전까지 활동이 뜸해지는 정도이다. 이 때는 바로 푸르트벵글러가 나치 정권으로부터 최고의 대우를 받던 때인데 카라얀의 친구의 증언에 의하면 푸르트벵글러의 연주를 카라얀은 종종 와서 물론 사람들이 보지 않도록 조심해 하면서 어디선가에서 듣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푸르트벵글러 역시 토스카니니 못지 않게 그에게 영향을 줬다고 할 것이다.
다만 카라얀은 베를린 필의 선임자였던 푸르트벵글러와 음악 외적인 라이벌일 수 밖에 없었다.
카라얀은 나치의 덕택으로 출세를 손에 넣었지만 결국 1945년 5월 독일이 패망하자 결국 나찌의 희생물이 되었다.
카라얀 부부는 종전시에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감금된 상태로 지내게 되었고, 아내 아니타가 통역일로 생계를 꾸려나갔으며 카라얀 자신은 스코어(오케스트라 총보)를 공부하는 것에만 전념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런 궁핍한 가운데서도 카라얀은 대지휘자로 변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Trieste)에서 전후 처음으로 지휘봉을 잡아 보지만 같은 해 9월 말 난민 수송차에 실려 조국 오스트리아로 보내졌다.
그후 연합국측의 지휘자로서의 활동 금지 때문에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카라얀은 공중의 눈에 띄지 않는 일은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뒤에서 도와주기도 했고, EMI의 프로듀서 발터 레게를 만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음반 녹음을 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지휘활동의 금지는 1947년 10월에 해제되었고, 카라얀은 빈 필과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을 지휘하게 된다.
그토록 오랜 동안 기다리던 지휘자로서의 활동이 허락되었기에 1948년이후 카라얀은 정력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카라얀은 빈 필에 가려있던 빈 심포니를 맡아 1953년까지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육성하였다.
1948년과 이듬해에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1949년에는 루체른 국제 음악제에도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를 끝으로 1957년까지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출연하지 않고 빈 필과도 관계가 끊겼는데 카라얀을 경원시 하던 연로한 푸르트벵글러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쫓겨난 카라얀은 바이로이트로 옮겨 갔다.
1950년 여름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해서 1951년에는 바그너의 <마이스터징거>와 <니벨룽의 반지>를, 1952년에는 빌란트 바그너가 연출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이 공연이 바이로이트로와의 빠른 결별을 가져 왔는데, 이유는 연출가 빌란트 바그너와의 비낭만적인 신연출에 카라얀이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954년 11월 푸르트벵글러가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드디어 카라얀에게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될 기회가 왔다.
푸르트벵글러 생전에 베를린 필은 그와 함께 독일의 문화사절단의 자격으로 미국 투어에 나설 예정이었으나 결국 카라얀에게 그 기회가 주어졌고, 카라얀은 이를 무기로 삼아 종신 지휘자로서의 계약을 맺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11월 13일 베를린 필은 만장일치로 카라얀 찬성의 뜻을 표명하였다.
정식 계약은 성공적인 미국 투어후 1956년 4월에 맺어졌고, 카라얀으로서는 남은 인생 전체가 보장되는 중요한 계약이었다.
바로 이듬해 학생시절 숙부덕에 많은 명지휘자들의 연주를 접할 수 있었던 빈 국립가극장의 예술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미 빈 악우협회의 종신 콘서트 감독이었기 때문에 지휘자로서 유럽 최고의 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다.
1958년 카라얀은 모델 출신 금발의 프랑스 여성 엘리에트 무레와 세번째로 결혼하였고, 무레는 카라얀에게 두 딸을 낳아주고 마지막까지 그의 아내로 남았다.
1959년부터는 카라얀/베를린 필이 DG와 레코딩 계약을 맺고 녹음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1963년에는 전쟁으로 파괴됐던 베를린 필하모니 홀이 카라얀의 입김에 의해 마치 서커스장을 연상시키는 지휘자가 가장 부각되는 모양의 홀로 새롭게 태어났다. 빈에서의 그의 권력은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빈이란 도시가 가지는 특수성도 있었고 카라얀의 자기 중심적인 극장운영에도 문제가 있어서 카라얀과 빈 국립가극장 사이는 점점 벌어졌다.
결국 8년만인 1964년 빈 국립가극장의 예술감독직을 내놓면서 조국인 오스트리아에서는 일체의 활동을 중지하겠다는 선언을 한 후 빈을 떠났다. 빈을 떠난 후 카라얀은 본격적으로 레코딩및 영상물 제작에 정열을 기울였다. 레코드와 영상물을 통해 불멸의 존재로 남고 싶어했던 카라얀은 스테레오(60년대), 4채널(70년대), 디지탈(80년대)과 같은 음향 기술과 나란히 반복 녹음을 행하면서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연주에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고향 잘츠부르크는 카라얀이 빈을 떠나자 쌍 손을 들고 그를 환영하였다.
잘츠부르크에서 카라얀의 정열이 집중되면서 4년뒤 카라얀 자신이 모든 음악과 연출을 감독하는 베를린 필에 의한 음악제, 잘츠부르크 부활제 음악제를 바그너의 <발퀴레>를 시작으로 탄생시켰다. 마치 바그너가 그의 작품을 위해 바이로이트 축제를 만들었듯이 카라얀은 그가 꿈꾸어오던 바그너 작품의 공연을 위해 부활제 음악제를 만든 것이다. 이는 그가 남은 여생동안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열심이었던 레코딩 작업들도 이 축제를 위한 자금원으로 쓰였고, 레코딩은 축제가 행해지기 전에 완벽한 리허설 차원에서 공연에 앞서 행해졌다. 카라얀의 이런 선녹음 후공연의 패턴은 그후로도 계속된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전곡을 차례차례 잘츠부르크 부활제 음악제에 올린 카라얀은 1970년에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그 후 계속해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마이스터징거>, <로엔그린> 등을 다루었다. 이때가 그의 경력에 가장 높은 정점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카라얀 자신의 음악제는 1976년 10주년 기념의 해에 불협화음이 불거져 나온다.
테너 르네 콜로가 카라얀과의 불화로 <로엔그린>의 주연에서 물러나게된 것이다. 르네 콜로는 이미 EMI에서 발매된 <로엔그린> 전곡반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바 있었다. 콜로는 카라얀과 예술적인 견해차이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견해 차이를 대화로 풀지 않고 일방적인 명령으로 처리하는 카라얀의 태도에 만족할 수 없으며 인간적인 유대 없이 노래부를 수 없다고 했다.
그후 하인리히 왕 역의 베이스 가수 카를 리더부슈 역시 음악제 참가를 거부하게 되었고, 이 두 가수와의 신경전에 카라얀은 3개월간 병원 신세를 질 만큼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 때 위험한 척추수술도 하게 되서 이후 그의 활동은 중요한 일로만 제한됐다.
카라얀은 1977년 5월, 13년간 떠나 있던 빈의 국립가극장에서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를 공연함으로써 화려하게 돌아왔다.
그 후 카라얀은 부활제 음악제와 성령강림제 콘서트에서 베를린 필을 지휘하였고,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빈 필을 지휘하는 정도로만 활동범위를 줄이는데 이는 앞선 척추수술후 1978년 9월에 연습중 지휘자용 의자에서 보면대위에 발을 올려놓고 쉬고 있다가 굴러떨어져서 2개의 신경을 다치게 된 것도 큰 이유가 되었다. 이후 그는 걷는 데 불편을 느끼게 된다.
카라얀의 베를린 필과의 관계가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반 부터로 전해지고 있다.
이미 1970년대 중반에 당시 베를린 학술 평의원 슈테른이 카라얀에게 오케스트라와 잘 되어 가냐고 물었을 때 그는
"녀석들은 내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답했다한다.
카라얀은 단원들에게 인자하게 대하였고 협력자로서 충분히 대우해줬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의 적이 아니라는 것이 뚜렷할 때에 한했다. 구시대 지휘자가 그러하듯 카라얀은 오케스트라의 자율적인 결의를 존중하지 않았으며 교사가 학생을 대하듯 굴욕감을 주기도 했다한다. 결국 1982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베를린 필과 카라얀의 28년의 관계를 파탄으로 이끄는 사건이 벌어진다.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당시 23세의 여류 클라리넷 주자 자비네 마이어를 카라얀이 추천했으나 베를린 필의 단원들이 이를 거부한 것이다. 더이상 카라얀에게 단원들은 동지요 협력자가 아니었으며 카라얀은 그들에게 위협적인 태도로 돌변하게 된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과의 일체의 활동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결국 사태는 마이어의 채용을 1년 동안의 기간에 한해 인정한다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지만 카라얀과 베를린 필간에는 돌이킬 수 없는 감정의 골이 생겨버렸다. 결국 만년의 카라얀은 베를린 필 보다는 빈 필과 더 많은 활동을 갖게 되었고, DG에서의 만년의 녹음들은 대부분 빈 필과 행해졌다.
1985년 6월 29일,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행해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에서 빈 필과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를 연주하였고, 그가 스스로의 영상물을 위해 창설한 텔레몬드리알에 의해 녹화됨은 물론 전세계 TV로 중계되기도 했다.
1987년 1월 1일, 빈 필의 신년음악회를 지휘하기도 했으며 그의 나이 80이 되는 1988년에는 그의 아내가 음반 표지를 그린 100장의 기념음반이 DG에서 기획되기도 했다. 그해 4월엔 예정된 연주회를 최소하고 베를린 필과 함께 일본, 같은 해 10월엔 마지막 유럽 순회 공연을 떠난다.
1989년 2월에 빈 필과 함께한 미국 공연은 그의 마지막 공식 연주가 되었다. 그해 7월 16일 잘츠부르크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 무도회"의 오전 리허설을 끝낸 카라얀은 자신의 별장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100회 기념일
■ 앨범
01. Brahms - Symphony no 1; Schoenberg - Verklarte Nacht Op. 4 / Karajan, Berlin PO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02. Beethoven - Symphony no 4; R. Strauss - Ein Heldenleben / Karajan, Berlin PO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03. Beethoven - Fidelio / Karajan, Zaccaria, Zampieri, Goitz, Edelmann, Jurinac, Et Al
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Walter Berry (Bass Baritone), Otto Edelmann (Bass)
Sena Jurinac (Soprano), Waldemar Kmentt (Tenor)
Erich Majkut (Tenor), Paul Schoffler (Baritone)
Nicola Zaccaria (Bass), Giuseppe Zampieri (Tenor)
04. Debussy - La Mer, Etc; Ravel - Bolero, Etc / Karajan, Et Al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05. Mozart - Requiem, "Coronation" Mass / Karajan, Et Al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Vienna Singverein,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Anna Tomowa-Sintow (Soprano),
Agnes Baltsa (Mezzo Soprano)
Werner Krenn (Tenor), Jose Van Dam (Bass)
06.Bach - Mass In B Minor / Karajan, Janowitz, Ludwig, Et Al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Vienna Singverein,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Gundula Janowitz (Soprano),
Christa Ludwig (Alto)
Peter Schreier (Tenor), Karl Ridderbusch (Bass)
Robert Kerns (Baritone)
07. Donizetti - Lucia Di Lammermoor / Karajan, Callas, Zaccaria , Et Al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Milan Teatro alla Scala Chorus,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Maria Callas (Soprano - Lucia)
Giuseppe Di Stefano (Tenor - Sir Edgardo di Ravenswood)
Rolando Panerai (Baritone - Lord Enrico Ashton)
Nicola Zaccaria (Bass - Raimondo Bidebent)
Giuseppe Zampieri (Tenor - Lord Arturo Bucklaw)
Luisa Villa (Mezzo Soprano - Alisa)
Mario Carlin (Tenor - Normanno)
08. Mendelssohn, Bruch - Violin Concertos / Mutter, Karajan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Anne-Sophie Mutter, Violin
09. Mozart - Le Nozze Di Figaro / Karajan, Schwarzkopf, Et Al
Milan Teatro alla Scala Chorus,
Milan Teatro alla Scala Orchestra,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Mario Petri (Bass - Count Almaviva),
Luisa Villa (Soprano - Marcellina)
Mariella Adani (Soprano - Barbarina)
Elisabeth Schwarzkopf (Soprano - Countess Almaviva)
Rolando Panerai (Baritone - Figaro),
Irmgard Seefried (Soprano - Susanna)
Sena Jurinac (Mezzo Soprano - Cherubino), Silvio Maionica (Bass)
10. Puccini - La Boheme / Karajan, Freni, Raimondi, Et Al
Vienna State Opera Chorus,
Vienna State Opera Orchestra,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Mirella Freni (Soprano - Mimi), Gianni Raimondi (Tenor - Rodolfo)
Rolando Panerai (Baritone - Marcello), Giuseppe Taddei (Baritone - Schaunard)
Hilde Gueden (Soprano - Musetta), Peter Klein [Tenor] (Tenor - Benoit)
Ivo Vinco (Bass - Colline), Siegfried Rudolf Frese (Bass Baritone - Alcindoro)
11. Schubert - Symphonies No 5, 6, 8 & 9 / Karajan, Bpo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12. Wagner - Die Walkure / Karajan, Suthaus, Rysanek, Frick, Hotter, Nilsson, Ludwig, Et Al
Milan Teatro alla Scala Chorus, Milan Teatro alla Scala Orchestra,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Margareta Sjoestedt (Voice), Rosette Anday (Alto), Gottlob Frick (Bass)
Judith Hellwig (Soprano), Hans Hotter (Baritone), Christa Ludwig (Mezzo Soprano)
Leonie Rysanek (Soprano), Lotte Rysanek (Soprano), Hilde Rossl-Majdan (Alto)
Gerda Scheyrer (Soprano), Ludwig Suthaus (Tenor), Birgit Nilsson (Soprano)
Martha Rohs (Mezzo Soprano), Jean Madeira (Mezzo Soprano)
13. Wagner - Tristan Und Isolde / Karajan, Vinay, Modl, Stolze, et.al
Bayreuth Festival Chorus, Bayreuth Festival Orchestra,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Ramon Vinay (Tenor - Tristan), Hans Hotter (Bass Baritone - Kurwenal)
Martha Modl (Soprano - Isolde), Ludwig Weber (Bass - King Marke)
Hermann Uhde (Baritone - Melot), Ira Malaniuk (Alto - Brang?e)
Gerhard Stolze (Tenor - Steersman), Werner Faulhaber (Bass - Sailor)
Gerhard Unger (Tenor - Shepherd)
쟈료 출처 : 음악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