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슈미트 이세르슈테트,Hans Schmidt Isserstedt (1900 - 1973)
독일 태생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한스 슈미트 이세르슈테트는 1900년 5월 5일, 독일의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는 베를린 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슈레커(Franz Schreker)에게 사사하였다.
졸업할 때 모짜르트의 오페라에 관한 <모차르트 초기 오페라에 있어서의 악기 용법에의 이탈리아의 영향>이란 제목의 논문(論文)으로 음악미학(音樂美學)의 박사학위를 땄다.
졸업과 함께 지휘자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독일 각지의 오페라 극장에서 두루 수련을 쌓았다.
그뒤 1935년부터 함부르크 가극장 수석지휘자가 되었고, 1943년부터는 베를린 도이취 오페라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2차대전 후인 1945년에 새로 창설된 함부르크의 북도이취 방송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부임하여 이 악단의 육성에 진력하였는데, 1972년까지 그 지위에 있었다.
1972년 이후에는 명예 지휘자로서 이 악단과 인연을 맺고 있다.
슈미트 이셰르슈테트는 북독일 방송교향악단의 연주 수준을 세계적으로 높이는데 기여했으며, 오케스트라 트레이너로서는 다른 사람이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수완을 보였다.
그러는 한편 베를린 필하모니, 빈 필하모니 등 훌륭한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했고, 빈과 함부르크에서 레코딩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그는 북독일 방송교향악단과 함께 파리를 비롯한 에든버러, 미국 등지로 연주 여행을 다니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도 1955년부터 1964년까지 스톡홀름 필하모니의 수석 상임 지휘자를 겸하기도 했다.
물론 그 밖의 다른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도 많이 했는데, 120개 이상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슈미트는 특히 북부 독일에 많은 팬이 있었으며, 그의 이름이 레코드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베를린시절인데, 그 무렵에는 주로 파퓰러 뮤직의 소품을 많이 녹음했다.
슈미트 이세르슈테트는 파퓰러한 명곡들을 모범적으로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의 학력으로도 알 수 있듯이 보통 스타일의 지휘자는 아니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후의 함부르크 시절에 독일에서 비교적 냉대를 받았던 바르토크, 스트라빈스키, 힌데미트 등의 음악 보급에 주력했다.
슈미트가 제일 사랑한 것은 모차르트의 오페라였으며, 모차르트의 관현악곡, 베토벤과 브람스의 교향곡을 자주 연주했다.
슈미트의 음악은 격렬한 열기를 내세운다기보다는 정리, 정돈된 것으로서 언제나 온화한 격조를 지니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 하겠다.
그의 착실하면서도 무겁고 두터운 울림은 참으로 독일 감성이 주류를 이루는 지휘자란 느낌을 주었다.
녹음은 196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두드러지게 의욕적인 활동을 보였는데, 표현에도 적극성을 보인 점이 특징이라 하겠다.
그의 연주는 독일 전통적인 스타일에 바탕을 두면서 아주 견실하고 치밀하며 빈틈이 없다.
스케일은 결코 크지 않지만 내면적인 깊이가 있는 그 음악성을 높히 평가받을 만하다.
특히 만년에 이르러 아주 원숙한 솜씨를 보여 1973년에 별세하기까지 수 많은 우수반들을 남겼다.
그가 남긴 레코드로는 뭐니뭐니 해도 피아니스트 박하우스와의 협연과 빈 필하모니 교향악단을 지휘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전집>, 역시 빈 필하모니를 지휘한 베토벤의 <교향곡 전집>을 손꼽아야 할 것이다.
이것들은 다 분매(分賣)도 되고 있는데, 협주곡은 전곡이 박하우스의 명연주로 불후의 명반으로 길이 빛나고 있으며, 교향곡 가운데서도 <제4번>, <제6번 - 전원>, <제8번>은 칼 뵘을 상기케 하는 견고한 리듬의 순(純)독일적인 명연이다.
그밖에 바이올리니스트 쉐링의 협연과 런던 교향악단 연주에 의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역시 런던 교향악단을 지휘한 모짜르트의 <교향곡 제39번>, <교향곡 제41번 - 쥬피터> 결합반이 호연이다.
북도이취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것으로는 브람스의 <교향곡 제4번>, 챠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6번 - 비창> 등이 있다.
< Jiri Tancibudek et Hans Schmidt-Isserstedt, 1956, Sydney>
쟈료 출처 :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