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도 칸텔리(Guido Cantelli, April 27, 1920 ? November 24, 1956)
이탈리아 태생의 지휘자.
귀도 칸텔리(Guido Cantelli)는 완벽한 조각미남의 얼굴과 토스카니니를 반하게 했던 빼어난 실력을 갖춘 지휘자였다. 하지만 신께서 질투했던, 그래서 너무도 일찍 자신의 곁으로 데려간 또 하나의 요절한 천재 음악가였다.

아마도 그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칼 뵘(Karl Bohm),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을 뛰어넘는 당대 최고의 지휘자가 되었을 것이라 평가되고 있다. 그만큼 그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귀도 칸텔리는 20세기 지휘자의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요절한 천재 지휘자였다. 그의 음악세계는 토스카니니처럼 정확하고 명쾌한 해석과 동시에 불꽃같은 정열과 아름다운 생동감이 살아 꿈틀거리는 놀라움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이들은 아마도 칸델리가 요절하지만 않았다면 20세기 중후반의 시대에 토스카니니, 푸르트벵글러의 뒤를 잇는 최고의 마에스트로가 되었을 것이라 입을 모은다.

2차대전 이후에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와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aengler)의 노쇠화로 강렬했던 두 태양의 빛이 사그러들고 있을 때, 귀도 칸텔리는 바로 이 두 사람의 뒤를 이어 최고의 지휘자가 될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푸르트벵글러의 사후, 세계 최고의 베를린 필을 누가 맡을 것인가 하는 후계자 문제가 큰 관심을 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보에는 칸텔리, 카라얀,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의 3인으로 압축이 되고 있었는데, 이 중에서 바로 귀도 칸텔리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점쳐졌다. 카라얀은 이들 중에서 가장 낮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운명의 장난일까?

칸텔리는 1956년 비행기 사고로 안타깝게 요절하고 말았고, 첼리비다케는 푸르트벵글러가 없었던 시절에 베를린 필 재건에 일등공신이었으나 불같은 카리스마와 꼬장꼬장하기만한 그의 성격이 단원들의 반발을 사서 쓸쓸하게 변방의 무대로 퇴장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영예로운 자리는 바로 가장 가능성이 낮았다고 평가받았던, 생전에 푸르트벵글러가 그토록 경원시했던 카라얀이 물려받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카라얀은 그때부터 그 자신의 불멸의 역사를 새기기 시작한 것이다.

귀도 칸텔리는 1920년 4월 27일, 이탈리아 피에몬테주 노바라(Novara, Italy)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밴드 지휘자였던 관계로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소년시대에는 천재적인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나이 14세 때에는 피아노 리사이틀을 열기도 하였다.
그후 밀라노 음악원에 들어가 페드롤로(Pedrollo), 죠르지오 게디니(Giorgio Ghedini), 안토니오 보토(Antonio Votto) 등으로부터 피아노와 지휘법을 배웠다.

베르디 음악원을 졸업한 칸텔리는 1942년 노바라 코치아극장(Theatre Coccia)의 지휘자 및 예술감독으로 취임하였고, 그는 거기서 베르디의 곡을 지휘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던중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징집영장이 날아오자 그는 이탈리아 군복을 입고 폴란드 전선에 참전하였다가 추위와 기아로 쓰러져 후송되었고, 군병원의 병상에서 종전을 맞았다.

칸텔리는 세계대전 이후 가장 촉망받는 지휘계의 총아였다.
1945년 다시 활동을 시작할 때, 세계 음악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칭찬에 인색한 토스카니니가 그의 연주를 듣고 한 눈에 반했고, 바로 그 토스카니니의 제자가 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유수한 교향악단의 지휘를 맡으며 지휘계의 초신성(supernova)으로 떠올랐다.

1945년 7월, 귀도 칸텔리는 올림피아 극장에서 스칼라 오페라단의 연주를 지휘했는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가 그의 연주를 듣고, "그의 지휘는 내가 이 콘서트를 지휘한 것과 같다."라는 유명한 발언을 함으로서 칸텔리는 하루아침에 세계 언론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렇게 토스카니니의 인정을 받아 1949년에는 뉴욕에 건너가 토스카니니가 창설한 NBC교향악단과 계약하였고, 그 후 칸텔리는 1954년까지 NBC심포니의 객원 지휘로 활동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귀도 칸텔리는 평탄한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리고 바로 보스턴, 필라델피아, 시카고 등 미국의 빅 오케스트라들을 모두 정복하였다. 또한 30대의 나이로 발터(Bruno Walter), 미트로풀로스(Dimitri Mitropolos) 등 당대의 거장들과 뉴욕 필하모니의 지휘대에 섰다.

이후 칸텔리는 매년 겨울 미국을 방문해 보스턴, 필라델피아, 피츠버그,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등지에서 연주회를 가졌고, 동시에 뉴욕 필아모닉 무대를 지휘하는 횟수도 점점 늘어났다.


1950년 귀도 칸텔리는 에든버러 페스티벌 무대를 통해 영국 데뷔를 하였다.
이 공연은 매우 큰 성공을 거뒀고, 이로 인해 칸텔리를 런던으로 데려와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와 함꼐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을 녹음시키려는 EMI의 계획에 더욱 박차가 가해지게 되었다.

1951년 칸텔리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처음으로 지휘하게 되었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5년 동안 콘서트홀과 녹음 스튜디오를 넘나들면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되었다. 지휘자로서 칸텔리는 악단원들과 자기 자신에게 엄청나게 높은 기준을 요구하곤 했다. 리허설 전부터 관현악 총보의 판본 선택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악센트와 운궁법도 꼼꼼히 체크했다.

칸텔리는 일단 리허설에 들어가면 최고를 추구하는데 있어 조금의 양보도 없었다. 레코딩 세션에서는 표현력이 넘치는 교묘한 기교와 완벽한 오케스트라 밸런스를 향한 그의 노력으로 인해 악단원들의 집중력과 인내력이 끊임없이 시험대에 올라야만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뉘앙스와 음색이 절묘하게 조화된 최고 수준의 앙상블 연주로 나타났다.

1956년 칸텔리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첫 번째 오페라 무대를 가졌다. 그는 이때 무대 제작과 지휘의 1인 2역을 통해 모차르트의 <코지 판 투테, Cosi Fan Tutte>를 무대에 올렸다. 이때의 성공은 라 스칼라 오페라의 상임지휘자 임명으로 이어졌다.

이탈리아의 밀라노 스칼라극장은 이탈이아의 자랑할 만한 신예 칸텔리를 독일이나 미국에 빼앗길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1956년 칸 텔리를 라 스칼라 음악감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라 스칼라 오페라의 상임지휘자로 임명된 지 일주일 후, 토스카니니 자신이 격찬했고, 그의 유력한 후계자로 주목받던 귀도 칸텔리는 불과 36세의 나이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1956년 11월 파리 근교의 오를리 공항에서 동행했던 부인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토스카니니는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귀도 칸텔리의 죽음을 몰랐다고 한다.)

칸텔리의 지휘는 이탈리아인답게 열정적이고 격렬하며 생동감이 넘쳤다. 그러면서도 뛰어난 분별력으로 자신의 정열을 절제할 줄 알았다. 그는 비록 이탈리아인지만 독일 음악에도 아주 뛰어난 해석을 보였다. 특히 베트벤과 브람스, 멘델스존 같은 독일 고전 낭만 음악에는 독특하고 견실한 지휘로 독일계 음악인들을 능가하는 명연주를 선보였다.

그의 음악은 대단히 생동감이 넘치고 날카로운 맛이 느껴진다. 또한 토스카니니의 후계자답게 대단히 정확하고 명쾌한 음악에 대한 해석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선율을 명확히 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싱싱한 표현을 보여주는 그의 연주는 작은 토스카니니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너무도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에 그가 남긴 음반은 그다지 많지 않다.
작곡가별로 구분해도 전곡을 레코딩한 적이 없다. 차이코프스키의 <3대 후기 교향곡>과 브람스의 <교향곡 1, 3번>이 있고, 모짜르트의 <교향곡>과 베토벤 <교향곡 5, 7번>이 남아있는 음반중에 유명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발디의 협주곡을 시작으로 하이든, 모짜르트의 고전음악부터 베토벤,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의 낭만파를 거쳐 라벨, 바르토크와 스트라빈스키의 현대 작곡가에 이르는 대단히 넓은 폭의 음악세계를 구축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뉴욕 필하모니를 지휘한 베르디의 <레퀴엠>의 유동감 넘치는 신선한 연주는 언제나 싱싱하다. 많지 않은 녹음을 남긴 그의 요절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만일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수많은 교향곡 전집과 오페라의 명반들을 남겼을 것이란 기대감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토스카니니조차 '칸텔리의 지휘는 마치 나와 같다'며 감탄했던 지휘자 칸텔리. 그는 36세라는 나이에 요절하면서 세인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지만 그가 남긴 브람스의 <교향곡 1번, 3번>과 멘델스존의 교향곡 녹음은 해석의 명료함과 가장 적당한 낭만성으로 신선함을 느끼게하는 불멸의 걸작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쟈료 출처 :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