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그 쿨렌캄프(Georg Kulenkampff, 1898 - 1948)
독일의 바이올리니스트.
20세기 초 독일을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쿨렌캄프는 깊이있는 내면성을 갖은 연주자로 정평이 나있다.
1898년 독일의 브레멘에서 태어난 쿨렌캄프는 6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하여 벤델 교수를 사사하였고, 1913년 베를린고등음악원에 들어가서 명교수 헤스(W.Hess 1859-1939)를 사사했다.
헤스는 독일 바이올린악파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 요아힘((Joseph Joachim 1831~1907)의 제자이다. 곧 쿨렌캄프는 요아힘-헤스로 이어지는 독일의 전통적인 음악계보 선상에 있는 바이올리니스트인 것이다.
그는 18세에 브레멘 필하모니 오케스크라의 콘서트마스터가 되었고, 후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콘서트마스터가 되었으나, 곧 독주가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1923년에는 베를린고등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3년동안 재직했으며, 나치스 정권 하에서도 계속 독일에 머물러 활약했다.
그의 이름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나치스의 유태인 추방에 의한 독일 음악계의 쇠퇴기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그는 독일 정통파의 바이올린 주법을 아돌프 부쉬와 함께 계승하고 있었는데, 나치스에 비판적이던 부쉬는 미국으로 떠나고 쿨렌캄프만이 솔리스트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1937년에 발견된 슈만의 바이올린 협주곡 초연자로서 20세기의 연주사(史)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나치스는 독일 초연의 이 방송을 전 세계에 중계했다.
전후에는 스위스로 이주하여 루체른 음악제의 바이올린 마스터 클라스를 담당했다.
녹음은 상기한 슈만의 협주곡(독일 텔레풍겐)이 대표적인 것이다.
1935년 그는 피아니스트 에드빈 피셔(Edwin Fischer), 첼리스트 엔리코 마이나르디(Enrico Mainardi)와 함께 Trio를 구성하여 1948년 죽기 전까지 활발한 연주활동을 했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볼프강 슈나이더한(Wolfgang Schneiderhan)이 대신 바이올린 파트를 맡아서 계속한다.
쿨렌캄프 연주의 특징은 스케일 큰 구성력과 매우 청순한 음색에 있다.
그는 표현에 있어서 비르투오소적인 화려함은 없다.
그러나 그의 연주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 내면에 깊이 담긴 소박성으로, 그것은 독일 음악의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아힘-헤스로 이어지는 독일 바이올린 계보의 전통이 이러한 음악적 해석에서 드러난 것이다.
쿨렌캄프의 대표적인 음반으로는 시미트-이세르시데트 지휘, 베를린 필하모니에 의한 슈만의 <바이올린 협주곡>, 같은 콤비에 의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솔티와 협연한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제2번, 제3번>, 피아니스 빌헬름 캠프와 협연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9번 크로이쩌> 등이 대표반이다.
그는 1948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나이 50에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쟈료 출처 :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