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angler, 1886 - 1954)
독일 태생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19세기말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가 된 한스 폰 뵐로는 신적인 권위를 가진 지휘자 상을 정립한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20세기로 접어들며 작곡에서의 거장의 시대가 저물고 바야흐로 20세기는 지휘의 시대가 되었다. 그 시기를 열어젖힌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한스 폰 뵐로였다.

그 위대한 지휘자의 세기인 20세기에서도 가장 위대한 지휘자가 바로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이다. 뵐로의 대를 이은 아르투르 니키쉬(Artur Nikisch), 그리고 다시 그것을 이어받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독일 후기 낭만주의의 전통을 정점으로 끌어올렸다.

그런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아르투르 토스카니니였다.
즉물주의로 함축되는 그의 지휘 철학에 있어서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은 단지 '알레그로 콘 브리오(빠르고 쾌활하게)'일 뿐이었다. 그는 주관성과 연주장에서의 감정 이입 같은 것은 철저히 배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악보의 해석에 골몰했다.

토스카니니의 이런 해석은 당시로서는 커다란 찬반 양론의 격론을 불러일으켰고, 독일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지휘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미국의 NBC 방송국은 그를 위해 오케스트라를 조직해 주기까지 했다 어쨌든 이 두 사람은 세계 지휘계를 양분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어느날 푸르트벵글러가 토스카니니를 우연히 만나 나의 연주를 듣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토스카니니는 "나는 악보에 적혀 있는 것을 그대로 소리로 옮기고 있다"고 대꾸했고, 이 말을 들은 푸르트벵글러는 "그렇다면 나는 악보 뒤에 숨어 있는 음표들을 찾고 있다"고 응수했다. 이 두 거장의 음악관을 알아차릴 수 있는 유명한 일화이다.

이처럼 푸르트벵글러는 소리 뒤에 숨어 있는 정신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함으로써 실제의 연주는 물론 레코드를 통해서도 정신을 느끼게 하는 명반을 많이 남기고 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angler)는 1886년 1월 25일 베를린에서 베를린대학의 고고학 교수 아돌프 푸르트벵글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인문학적인 소양을 쌓을 수 있도록 어린 빌헬름을 그리스나 이탈리아 여행에 데리고 다니며 유럽의 여러 예술을 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빌헬름 또한 예술과 인문학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부모는 특별히 음악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음악에 대한 애정만큼은 남달랐다.
그의 아버지 아돌프는 베를린필의 연주회에 빠지지 않을 만큼 음악애호가였고, 어머니 아델라는 피아노 연주를 즐겼다. 아버지를 따라 자주 오페라나 콘서트에 참석했던 빌헬름은 어릴 적부터 음악가로서의 꿈을 키워 나간다. 그의 부모는 아들의 음악적인 재능이 남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어린 빌헬름에게 음악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오르가니스트이자 작곡가 조셉 라인베르거(Josef Rheinberger)에게 작곡의 기초를 배우고, 지휘자이자 작곡가였던 막스 폰 쉴링스(Max von Schillings)의 제자가 된 후로 지휘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나이 18세 때 젊은 빌헬름은 실링스의 천거로 뮌헨에서의 한 연주회에서 대리 지휘를 맡으면서 지휘의 세계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20세가 되던 1906년 그는 뮌헨의 카임관현악단을 지휘하며 정식 지휘자로 데뷔하였다. 이때 그가 택한 데뷔곡은 브루크너의 <교향곡 9번>이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 젊은 지휘자의 이름은 빠르게 전유럽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독일과 스위스, 프랑스 등 유럽의 여러 무대에서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며 경험을 쌓게 되었다.

그는 1915년 29세의 나이로 만하임 오페라와 만하임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5년 동안 활동하며 지휘자로서의 자기 주관을 확립해가기 시작한다. 1922년 1월 23일 당시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였던 니키쉬가 죽게되자 푸르트벵글러는 이 거장의 서거를 추모하는 그해 2월 9일의 연주회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과 브람스의 <4개의 엄숙한 노래>를 베를린 필과 연주하게 되었다.

이 공연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베를린 필은 만장일치로 푸르트벵글러를 지지하였다.
그는 니키쉬의 유언에 따라 니키쉬가 맡고 있던 오케스트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도 맡게 되었다.

1924년 5월 결혼 후에 신혼여행을 겸한 이탈리아 데뷔 콘서트, 같은 해 런던에서의 로열 필하모닉과의 성공적인 데뷔 이후 그는 자주 런던으로 초청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일에는 뉴욕 카네기 홀에서 미국 데뷔 콘서트를 열었다. 이날 그는 청중들뿐만 아니라 단원들까지 감동시켜 뉴욕 필의 상임이 되어달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27년 그는 빈 필의 상임 지휘자가 됨으로써 유럽 최고의 오케스트라들을 석권하며 바야흐로 제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맡았던 여러 오케스트라의 상임 자리를 포기하고 베를린 필에만 전념하기로 한다. 그의 이상을 가장 잘 반영해줄 오케스트라로 베를린 필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활동반경을 줄이게 된 데에는 독일의 하늘에 전체주의의 그늘이 낮게 드리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하며 독일 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많은 유태계 독일인들은 하나둘씩 추방되기 시작했고, 그것은 베를린 필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단원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탄압의 손길을 다소 늦추는 정도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모든 자리를 사임하고 오직 베를린 필 연주에만 임한다. 하지만 히틀러는 순수 아리안계 혈통의 세계적 거장인 푸르트벵글러의 정치적 선전효과에 주목하였다. 히틀러 자신이 바그너를 숭배하는 인물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도 푸르트벵글러가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나치스는 1933년 7월 그를 프로이센 추밀원 고문으로 임명해 버렸다.

그가 카라얀과 달리 나치 당원이 아니었음에도 종전 후 전범으로 몰리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모노 시대의 지휘자들이 어떤 형태이던지 시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당시에 비해 스테레오 시대의 지휘자들은 상대적으로 시대를 고민하는 부담은 적었다. 하지만 푸르트벵글러의 시대는 조국과 음악 중 어느 한 가지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기였다. 푸르트벵글러는 자신의 조국에서 음악을 하기로 결심하였고, 그런 그의 순수한 마음을 히틀러와 나치는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그가 다른 예술가들처럼 미국으로 망명했다면 그에게는 평온한 생활 속에 각광받는 마에스트로로서 생애를 보낼 수 있었고, 상대적으로 더 오래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나치의 억압된 체제와 전쟁의 공포 속에 시달리는 자신의 동포들을 버릴 수 없었다.

"나치 통치하의 독일보다 베토벤의 음악이 더 절실하게 필요한 곳이 어디있겠는가?"라는 그의 말이 이를 증명해준다.

1934년 푸르트벵글러는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의 신작 오페라 <화가 마티스>의 초연을 베를린 국립가극장에 올리겠다고 발표한다. 힌데미트는 유태인은 아니었지만 유태인 아내를 두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오페라의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1524년에 있었던 독일 농민전쟁을 배경으로 오페라가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나치가 보기에 이 내용은 불온했고 너무나 선동적이었기 때문에 공연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음악적인 면에서의 결정권은 오로지 자신에게 있으며 정치가 예술에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공연을 강행했고, 이 사건은 대중의 열렬한 호응 속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이 소식은 곧 히틀러에게 알려졌고 그는 특별지시를 내려 힌데미트의 오페라를 금지하였으며 힌데미트는 국립음악학교장의 지위를 버리고 망명해버렸다. 푸르트벵글러는 이에 항의하여 모든 공직을 사임한다. 그의 사임은 받아들여졌고, 망명할 수 없도록 출국을 금지당하였다.

결국 이듬해 4월 푸르트벵글러는 다시 독일에서 지휘를 하게 되지만 예전처럼 나치에 항거할 수 있는 힘은 그에게 남겨져 있지 않았다. 아니 나치 정권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히 관리하기 시작했고, 지휘할 음악과 장소를 모두 나치의 규제하에 두었다. 이것은 후에 푸르트벵글러가 나치에 굴복했다는 식으로 전세계에 알려진다.

그 자신은 나찌에 협력할 의사가 없었으나 정치는 그를 철저히 이용하여 선전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베를린에서 히틀러 탄생 축하 연주를 지휘해야만 했고, 1945년까지도 그는 폭격 속에서도 베를린 필과 연주를 계속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해 1월 22일 연주회 도중 연합국의 공습으로 연주는 중단되었고, 그는 곧 빈으로 갔다가 스위스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패전이 확정될 무렵까지 음악이 필요한 독일 동포들에게 음악을 들려주었고, 많은 이들이 그의 음악을 통해 삶의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

독일의 패전으로 베를린은 미·영·프·소의 4개국 점령하에 분할 통치에 들어갔다.
이때 전쟁 중 녹음된 귀중한 음원들이 소련군에 의해 소련으로 건너갔다가 1991년에야 정식으로 독일에 송환되었다. 종전 후 푸르트벵글러는 전범으로 몰렸으나 나치 집권시절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도와준 유태인 음악가, 반체제 인사들의 구명운동 덕에 1947년 1월 무죄 판결을 받고 다시 연주해도 좋다는 연합군의 허가를 받았다.

"모두가 망명을 떠난다 해도 나는 고통받는 독일인을 위해 베를린 필을 지휘하겠다"던 그의 진심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

푸르트벵글러와 베토벤은 앞서도 말한 것처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런 그가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일명 <합창>의 절대 명연, 불후의 명반을 남긴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할 수밖에 없다.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인류에 대한 화합과 사랑을, 새 시대를 맞이하는 환희를 노래한 작곡가와 온갖 굴욕 속에서도 지휘봉을 놓지 않고 사랑을 실천한 푸르트벵글러. 이 두 사람의 만남이 빚어낸 연주의 환희는 어떤 지휘자라 할지라도 다시 재현해낼 수 없는 감동일 수밖에 없다.

베토벤 9번 교향곡은 두 장의 역사적 명반이 있다. 한 장은 1942년 3월의 베를린 실황 연주를 녹음한 것이고, 다른 한 장은 바이로이트 축제 실황 연주를 녹음한 것이다. 두 장의 음반 모두 모노 시대의 녹음이며 스튜디오 녹음을 혐오했던 푸르트벵글러답게 실황 녹음이다. 그러나 이 두 음반의 의미는 단순히 그 연주가 명연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이 음반들이 담고 있는 역사적 의미가 또한 크기 때문이었다.

1951년 바이로이트 축제가 다시 재개되었다. 전쟁의 상처가 아직 여기저기 그대로 나뒹굴고 있을 당시 푸르트벵글러는 개막 공연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을 선택하였다. 패전의 상처와 대학살의 범죄자로 낙인찍힌 독일국민들에게 그는 전인류에 대한 사랑과 화합을 노래한 <환희의 송가>를 통해 다시 한 번 독일 국민들에게 희망과 삶의 보람을 일깨줘주는 명연을 들려준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장의 음반이 있다. 당시 독일 전국토는 연합군의 공중폭격에 노출된 상태였고 함부르크와 쾰른, 브레멘 등에서 대규모 폭격으로 인해 잇따라 숱한 민간인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던 시기였다. 베를린 상공 역시 언제 연합군 공군의 폭격이 시작될 모르는 상황에서 푸르트벵글러는 독일 국민을 위해 지휘봉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전쟁의 공포와 히틀러의 잔인한 통치 아래 신음하는 독일 국민들에게 푸르트벵글러는 삶의 위안이었고, 인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이 두 장의 음반을 듣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의 위대한 힘이 인간을 정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현해낸 인물이 바로 푸르트벵글러였다.
푸르트벵글러는 종전 후 첼리비다케에 넘겨주었던 베를린 필의 상임 자리를 1952년 베를린 필 창립 70주년에 다시 복귀한다. 그러나 66세의 푸르트벵글러는 이미 몸이 쇠약해져 가고 있었고, 폐렴이 도져 결국 1953년 빈 필과의 연주 중 실신하고 만다. 푸르트벵글러는 요양을 위해 바덴바덴으로 옮겨갔으나 1954년 11월 30일 68세의 이른 나이(다른 거장 지휘자들이 80을 넘기며 장수한 것에 비해)에 운명하였다.

종전 후 10년이 지나 1954년 베를린 필은 미국으로의 첫 연주여행을 계획하게 된다.
물론 푸르트벵글러가 이 연주여행의 지휘자가 되어주기를 기대했지만 1955년 2월 워싱턴에서 있었던 베를린 필의 미국 데뷔 연주는 푸르트벵글러가 경원시했고, 출세를 위해 나치당원이 되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카라얀이 맡게 된다.

불후의 명반으로 손꼽히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베토벤 교향곡 제9번 - 전후 녹음이다.
최근들어 그의 전시 녹음도 역시 절대 명연으로 추증되었다. 이외에도 그의 연주 중 명반으로 손 꼽히는 연주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몇 년도 녹음이냐에 따라 그의 해석 방식도 달라진다.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 특히 3번 ‘영웅’ (52년), 5번 ‘운명’(54년), 6번 ‘전원’(52년), 7번(50년) 등 EMI 스튜디오 레코딩과 푸르트벵글러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라이브 레코딩인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의 3번(44년)과 5번 (47년), 그리고 EMI 레이블의 유명한 바이로이트 실황 9번 ‘합창’ (52년) 등이 그것이다.

한편 슈만의 교향곡 4번(DG, 51년), 브람스의 교향곡 1번(DG, 52년), 3번(EMI, 49년), 4번(EMI, 48년) 등도 명반이다.


자료 출처 :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