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클라이버(Erich Kleiber, 1890 - 1956)
오스트리아 태생의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는 1890 년 8 월 5 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태어났다.

언어학자였던 부친이 프라하로 부임했기 때문에 유년시절을 프라하에서 보냈다.
그러나 1895 년과 그 이듬해에 걸쳐 잇따라 양친을 잃고 프라하의 비인의 친척집에서 성장했다.

그는 먼저 비인에서 기초교육을 받은 뒤 프라하 음악원에서 피아노, 오르간, 타악기, 지휘법 등을 공부하였고 이어 대학에서 철학, 역사, 예술사를 이수했다.

1911 년에서 이듬해에 걸쳐 프라하 극장의 연습 및 합창지휘자가 된 것이 음악활동의 시작이었다. 그뒤 다름쉬타트 궁정가극장 악장으로 1919 년까지 있었고, 1919-21 년에는 부퍼탈 가극장 제 1 악장으로 있으면서 연주회 지휘자로 데뷔했다.

그뒤 1922-23년 뒤셀도르프를 거쳐 1923 년 8 월 베를린 국립가극장 음악 총감독으로 취임했다.
그 오페라 극장은 지휘자 레오 블레흐(Leo Blech, 1871-1958)를 경쟁관계에 있던 오페라 극장에 빼았기고 오토 글럼페러나 브루노 발터, 체믈린스키같은 더 잘 알려진 지휘자들과의 협상마저 결렬된 상태였다.

극장관리인은 떠나는 블레흐를 대신하여 막 떠오르는 에리히에게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지휘할 기회를 주었고, 에리히는 빠르게 극장의 가수들과 관리인을 장악했다. 에리히는 오페라극장과 컨서트홀에서 영역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능력을 보여줌 으로서 베를린에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는 모짜르트의 당시에는 덜 알려졌던 곡들을 프로그램에 추가했으며(당시에는 모차르트 작품중 대여섯개의 곡들만이 자주 연주되는 레파토리였다.) 현대음악도 고전음악과 같은 비중으로 다루었다. 1924년 그는 야나첵의 <야누파>를 성공적으로 되살려 내었다.

이듬해에는 알반 베르그의 기념비적인 <보이첵>을 137번의 리허설을 통해 세계초연 하였다.
그리고 크세네크의 <오레스트의 생애>, 다리우스 미요의 <크리스토퍼 콜룸부스> 등을 초연하여 전 세계에 명성을 떨쳤다.

현대음악 외에도 그는 <마탄의 사수, Der Freischutz>, <피델리오, Fidelio>, <피가로의 결혼, The Marriage of Figaro>으로부터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이르는 순수 독일곡들의 기념비적인 연주를 하게 된다.

또한 베를린국립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서 그는 레코딩에 있어서도 중요인물 이었다.
그의 첫 녹음은 지금은 없어진 Vox/Kristall 레이블로 1923년에서 1926년사이에 베를린국립오페라와 함께 서곡들과 짧은 관현악곡을 연주 함으로서 이루어졌다.

레코딩기술이 차츰 발전함에 따라서 그는 경쟁관계이던 베를린필을 포함한 다른 오케스트라와도 녹음하기 시작했고, 보다 규모가 큰 곡들을 음반에 담게되었다. 그리고 그의 교향곡 전곡녹음은 1928년에 이루어 졌으며, 그후 몇년간 더 많은 교향곡들을 레코딩 했다.

베를린에서 명성을 얻게 되자 그는 객원지휘를 위해 중유럽부터 남미까지 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1926년 에리히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구(舊) 콜론대극장(Teatro Colon in Buenos Aires)에서 6주동안 컨서트를 하였다. 그 첫 여행에서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재미국대사관 직원인 기혼녀 루스 굿리치(Ruth Goodrich)를 만나게 된다. 그후 거의 4반세기에 걸쳐서 그는 매년 콜론극장에서 오라토리오, 오페라 등을 해마다 두 달동안 연주하였다.

1929 년무렵 에리히는 유럽의 주요한(초연) 지휘자가 되어 있었다.(잘 알려진대로 그의 4명의 경쟁적 동업자 들중 3명, 발터, 클렘페러, 푸르트벵글러가 베를린의 서로 다른 공연장에서 같은날 밤 동시에 연주를 가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가 개인적 그리고 직업적 성공가도를 달리던 중에 정치적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경제공황이 나치집권의 빌미를 제공했던 것이다. 나치는 집권하자 예술, 문화단체에 대한 간섭을 포함한 선전선동을 시작했다.

에리히는 계속 현대음악과 소위 '타락한' 음악들, 즉 1930년에 그는 다리우스 미요의 야심작 <크리스토퍼 컬럼버스, Christophe Colombe>를 세계초연했고 몇년뒤에는 알반 베르그의 <룰루>를 초연할 계획을 세워 두었다.

그러나 1935년에 <룰루>가 국립가극장에서 연주되는것을 정치세력이 방해할 것임이 분명해졌다. 다른사람에게 명령을 받지 못하는 에리히는 나치스의 문화정책을 반대하여 그 자리에서 물러나 독일을 떠났다.

에리히는 다름슈타트에서 7년, 베를린에서 12년동안 일을 했었다.
그는 그 후 20년의 여생동안 한 자리에 그토록 오래 머문일이 없었다.
그는 예술적방랑자가 되어 벨기에, 영국, 스위스등지에서 지휘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객원지휘자의 자리를 얻으면서 정착하게 되었다.

매 시즌마다 열열한 환영을 받으면서 아르헨티나는 그의 새로운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유럽의 정상급 가수들과 연주자들이 전직 '베를린국립오페라 지휘자'와 공연하기 위해 아르헨티나를 찾게 된다. 에리히는 어린아들 카를로스를 포함한 가족들을 아르헨티나로 이주시켰고, 쿠바에서 칠레에 이르기까지 남미 전역에서 연주를 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서는 그다지 많이 지휘를 하지 않았다. 6-7주의 기한을 가지고 1930년과 1931년에 뉴욕필과 뉴욕 심퍼니를 지휘하여 오케스트라로부터는 호평을 받았으나 비평가들로 부터는 호응을 얻지 못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산업화된 미국음악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불굴의 완벽주의자였던 에리히는 미국 오케스트라가 통상적으로 가지는것 이상의 리허설시간을 원했던 것이다. 1946년 토스카니니가 그로 하여금 라디오방송을 위한 연주시리즈에 자신의 전설적인 NBC심퍼니를 지휘하도록 초청한 1946년 까지 미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1946-1947겨울에도 NBC의 초청을 받은 일이 있었으나 다시는 북미에 가지 않았다.


에리히는 1948년 2월 유럽으로 돌아와 코벤트가든 오페라하우스에서 기념비적인 공연을 했고 런던필도 지휘했다. 같은해에 그는 데카와 독점적 관계를 맺고 런던필과 첫 녹음 이후 다른 당대의 일류 오케스트라와도 녹음을 했다. 그는 또한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도 컨서트와 오페라를 지휘 하였고 1951년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그 때 그는 전후 베를린의 소련관할지역에 위치한 전쟁후 폐허가 된 구베를린국립오페라를 재건하기로 계약해 놓았지만 정치권으로 부터의 간섭이 또다시 시작했다. 그의 국립오페라에서의 동베를린과의 관계로 인하여 1952년 7월 베를린필(서베를린에 위치함)을 지휘하려던 계획이 방해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베를린국립오페라의 재개관도 음악적행사가 아니라 정치선전의 색채를 강하게 띠자 1955년 재개관 일정이 6개월 남은 시점에서 그는 국립오페라를 떠나 버렸다.

이러한 정략과 술수에도 불구하고 에리히는 독일 라디오 오케스트라, 고향 비엔나의 국립오페라 그 밖에 다른 단체들을 활동적으로 지휘했다. 그는 데카와 진일보한 기술을 이용한 녹음작업도 했고, 비엔나 국립오페라와 <장미의 기사>, <피가로의 결혼> 등의 명반을 만들었으며 컨서트헤보 오케스트라와 베토벤의 5번교향곡도 레코딩 했다. 베토벤의 <장엄미사>와 <피델리오>의 녹음계획도 있었으나, 1956년 1월 27일(우연히도 모짜르트의 200회 생일날) 취리히에서 그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에리히 클라이버는 말과 리듬과 오페라의 연출효과에서 천재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써 오페라 지휘에서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고, 또 그러한 양식을 연주회 방면까지 넓혔다. 에리히의 음악은 언제나 노래하고 있는 것이 커다란 특색이며, 또한 그것이 언제나 궤도를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에리히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형식과 내용이 언제나 잘 균형을 이루고 있다.


부전자전으로 그의 아들 카를로스 클라이버도 지휘자로서 일세를 풍미하였다. 에리히가 남긴 레코드로는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명반중의 명반이다. 소프라노 귀덴, 델라-카사, 베이스 시에피 등의 가수진을 기용하여 1955 년에 녹음되었는데 지금까지 이 오페라의 대표반으로서 그 발군의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그밖에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관현악단을 지휘한 베토벤의 <교향곡 제 3 번-영웅>, <제 5 번 교향곡-운명>, <제 7 번 교향곡>, 비인 필하모니를 지휘한 베토벤의 <교향곡 제 6 번-전원>, <제 9 번 교향곡-합창> 등이 빼어난 명연이다.

자료 출처 :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