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Christoph von Dohnanyi, 1929년 9월 18일 ~ )
독일 태생의 지휘자.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Christoph von Dohnanyi)는 1929년 9월 8일 독일 베를린에서 당시 저명한 법률가였던 아버지 한스 폰 도흐나니(Hans von Dohnanyi)와 어머니 크리스티네 본회퍼(Christine Bonhoeffer)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가 바로 헝가리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작곡가였던 에르노 도흐나니(Ern? Dohnanyi, 독일식 표현으로 에른스트 폰 도흐나니(Ernst von Dohnanyi))이다.
그의 형 클라우스 폰 도흐나니(Klaus von Dohnanyi)는 독일의 정치가로서 함부르크 시장을 역임하였고,동서독이 통일된 후 '만프레드 슈톨페 사건'이라는 것이 이슈화되었을 때,슈톨페 목사를 정면으로 변호하고 나선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어린 시절,나치스의 어두운 그림자가 전 유럽을 어둠속으로 내몰고 있을 당시,그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가족들은 나치즘에 반대하여 독일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송환되었고,그가 15살 되던 해인 1945년 아버지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특히 그의 외삼촌이면서 루터교 목사이자 신학자,윤리학자였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는 뮌헨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1948년 피아노,작곡,지휘를 공부하기 위하여 뮌헨 국립음대(Hochschule fur Musik und Theater in Munchen)로 전학하여 공부를 계속하였다.
1951년 뮌헨 시의 지휘자 검정시험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상( Richard Strauss Prize)을 받고 합격하였다.
이후 그는 당시 미국에 망명하고 있던 조부 에른스트 폰 도흐나니를 찾아가서 플로리다 주립대학(Florida State University)에서 작곡을 공부하였고,레너드 번스타인으로부터 지휘도 배웠다.
1953년 유럽으로 다시 돌아 온 그는 프랑크푸르트 오페라(Frankfurt Opera)에서 게오르그 솔티(Georg Solti)의 어시스턴트로서 발레와 오페라의 코치로 일하였다.
1957년부터 1963년까지 약관 27세의 나이에 독일 최연소 음악감독으로서 뤼베크 오페라(Lubeck Opera)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카쎌 주립오페라(Staatsorchester Kassel)의 음악감독 겸 수석지휘자로 취임하였고,또한 1964년부터 1969년까지 쾰른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도 겸직하게 되었다.
이 당시 도흐나니는 현대음악 초연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고,1965년 베를린에서 한스 베르너 헨체(Hans Werner Henze)의 오페라 <젊은 귀족(Cerha's Baal)>을 필두로 1966년 잘츠부르크에서 <바쿠스의 무녀(Die Bassariden)> 등 여러 작품들을 초연해 주목을 끌었다.
1968년 솔티의 뒤를 이어 프랑크푸르트 오페라의 음악감독 겸 지휘자로 1977년까지 이끌었다.
1977년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는 호르스트 슈타인(Horst Stein)의 후임으로 서독의 3대 오페라 극장의 하나로 손꼽히는 함부르크 슈타츠오퍼(Hamburg Staatsoper)의 음악감독 겸 수석지휘자로 일하다가 1984년 사임하였다.
특별히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20년 가까이 지휘하였다.
그는 1981년 처음으로 클리블랜드 관현악단을 객연하였고,1984년 로린 마젤이 빈 국립오페라 음악 감독으로 옮겨간 뒤에 상임지휘자의 직책을 이어받았다.
2002년 그는 프란츠 벨저-뫼스트(Franz Welser-Most)에게 물려주고 사임하였으며 이후 '계관 음악감독'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는 1984년부터 2002년 사임할 때까지 18년 동안 클리블랜드 관현악단을 이끌었으며,1970년대 조지 셀(George Szell)이 지휘자로 있으면서 이룩해 놓았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영광을 다시 이루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1997년에는 주세페 시노폴리(Giuseppe Sinopoli)의 사임으로 3년간 공석이었던 런던 필하모니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하여 악단을 이끌었고,2008년 에사-페카 살로넨(Esa-Pekka Salonen)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사임하였으며 현재는 명예지휘자로 남아 있다.
1998년에는 세미온 비슈코프(Semyon Bychkov)의 뒤를 이어 파리 관현악단의 음악고문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2000년 크리스토프 에센바흐(Christoph Eschenbach)에게 물려줄 때까지 일하였다.
2004년에는 독일 함부르크로 돌아와 거주하면서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NDR Symphony Orchestra)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여 현재까지 재직하고 있다.
이밖에도 보스톤 심포니,뉴욕 필하모닉,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시카고 심포니,로열 콘서트헤보우,피츠버그 심포니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를 객연하였고,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빈 필하모닉과 광범위한 녹음을 하였다.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는 40년 이상 큰 기복없이 세계적인 지휘자의 반열에 올라있는데,특히 헝가리 음악과 독일 후기 낭만주의에 절대적인 강점이 있다.
그리고 그는 80대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북독일방송(NDR)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맹활약중인 지휘계의 거물이다.
또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베르크의 오페라들의 스페셜리스트이며,독일 낭만작곡가들의 관현악에도 정통하고,현대음악 보급에 앞장서기도 한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는 객관적인 해석으로 정평이 나있는 지휘자 가운데 한사람이다.
조지 셀이 만들어놓은 기반 위에서 클리블랜드 사운드를 한층 더 발전시킨 그는 너무도 객관적인 해석으로 비평가들로부터는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의 말러나 브루크너는 너무 딱딱하고 철저하게 분석적이어서 크게 환영받지 못하였고,더우기 최근에는 '2 for 1' 앨범으로 발매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성향은 드보르작이나 슈만에서는 크게 빛을 발하여서 많은 명반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특히 그의 진가는 현대음악 지휘에서 빛을 발하는데,예를들어 스트라빈스키의 <불새>와 <페트루슈카>,그리고 알반 베르크의 <룰루> 등은 이 분야의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발표한 음반들은 베토벤,브람스,슈만의 <교향곡 전곡>,브루크너,드보르작,말러,모차르트,슈베르트,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전곡> 등을 망라하면서 가히 눈부신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낭만파와 현대음악 작곡가들의 작품 음반도 한결같은 비중으로 미디어의 상찬을 받았다.
오페라 쪽에서는 바그너의 <발퀴레>,<니벨룽겐의 반지> 등이 유명하다.
빈 필하모니와 녹음한 디스코그래피도 만만치 않은데,베토벤의 <피델리오>,베르그의 <보체크>와 <루루>,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살로메>,멘델스존의 <교향곡 전5곡>, 칸타타 <최초의 발푸르기스의 밤(The First Walpurgis Night)>,스트라빈스키의 <불새>,<페트루슈카>(이상 London 레이블) 등이 유명하다.
1997년에 지휘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2001년 여름에 막을 올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낙소스의 아리아드네>는 당시에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외에도 피아니스트 잉그리드 해블러(Ingrid Haebler)의 협연과 빈 교향악단 지휘에 의한 모짜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18번>,<제19번> 결합반,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Claudio Arrau)의 협연과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관현악단 지휘에 의한 그리그와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결합반,피아니스트 게릭 올슨(Garrick Ohlsson)의 협연과 클리블랜드 관현악단 지휘에 의한 부조니의 <피아노 협주곡> 등이 있다.
쟈료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