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르 뮌시(Charles Munch, 1891 - 1968)
프랑스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
샤를르 뮌시는 20세기가 낳은 가장 뛰어난 음악가의 한 사람이었다. 1891년 프랑스 알자스의 스트라스부르(당시는 독일 영토)에서 태어나 1968년 미국 순회공연 중에 향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뮌시의 집안은 대대로 많은 음악가를 배출해 낸 명문이었는데, 부친 에른스트는 음악원의 교수였고, 같은 알자스 출신인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뮌시의 숙부에게서 오르간을 배웠고 나중에는 친척이 되었다.

이런 음악적인 환경에서 태어난 뮌시는 어려서 부친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스트라스부르 음악원에 들어가서는 한스 피츠너에게 사사했다. 그곳의 음악원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기 위해 파리로 갔으나 역시 음악을 버리지 못하고 파리 음악원에서 뤼시앙 카페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으로 출병했다가 부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뮌시는 다시 베를린으로 가서 카알 플레쉬에게 바이올린을 사사하였고,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콘서트마스터로 취임했다. 이때에 그는 푸르트뱅글러와 발터에게 인정을 받았고, 이 두 위대했던 스승으로부터 열심히 지휘법을 배웠다. 뮌시가 평생에 이같이 좋은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그에게 대단히 다행스런 일이었다.

뮌시는 좋은 환경에 있었지만, 점차 가혹해지는 나치스의 정책에 참을 수가 없어서 1931년 게반트하우스를 그만두고 파리로 가서 지휘자가 되고자 결심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38 세였다.

이듬해 그는 부인의 도움으로 스트랄람 관현악단을 지휘하면서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이것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파리를 비롯하여 비인, 런던, 부다페스트 등지에서 다투어 그를 초청하였다. 그의 지휘자로서의 기세는 욱일승천, 바로 그것이었다.

드디어 1937년 프랑스에서는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어, 9년 동안 그 지위에 있으면서 이 오케스트라를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로 탈바꿈 시켰다.

그러나 그 후반기는 제2차대전 중이어서 모진 고생과 혹심한 쓰라림을 겪어야 했다.
그는 전쟁으로 인한 파리 시민의 암담한 생활을 밝게 하기 위하여 프랑스 음악을 적극적으로 연주함으로써 대독(對獨) 레지스탕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출연료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전액 제공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2차대전 후에는 파리 음악원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사임하고 세계 각지에서 객원지휘를 하였는데 체코 필하모니, 이스라엘 필하모니, 비인 필하모니, 뉴욕 필하모니, 보스톤 교향악단 등을 지휘함으로써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

1948년에는 프랑스 국립방송관현악단을 이끌고 다시 도미하여 순회연주를 하였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49년 1월 쿠세비츠키의 후임으로 보스톤 교향악단의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샤를르 뮌시의 황금시대가 온 것이다.

1963년 라인스도르프에게 그 자리를 넘겨 주고 은퇴할 때까지 뮌시는 그곳에서 뛰어난 활동을 보여 주었고, 레코딩도 많이 하였다. 그 뒤에는 자유롭게 세계 각국의 오케스트라를 객원지휘했는데, 1967년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이 해체되고 파리 관현악단이 새로 탄생되자 그 초대 음악감독으로 추대되었다. 앙드레 클뤼탕스가 없고 보면 샤를르 뮌시밖에 새 악단을 키울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뮌시는 이듬해인 1968년에 창단 1주년을 맞은 파리 관현악단을 이끌고 미국 순회공연을 하다가 노드캐롤라이나주(州)의 롤레이에서 연주회를 가진 다음 날인 11월 6일 밤에 리치먼드에서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뮌시의 음악은 독일적인 구성력과 프랑스적인 감성을 아울러 갖추고 있다.
이것은 그가 문화적 이중성을 가진 알자스에서 태어났고 프랑스와 독일 양쪽의 음악문화를 흡수했던 이유때문이다. 그의 지휘 솜씨는 발랄하고 그 청신한 기우(氣宇)는 라틴적인 선명함을 지니면서 씩씩하고 건강하게 구성된다. 뮌시는 음악과 자기 성격을 항상 잘 융합시켜서 외면적인 양식을 거기서 끄집어내기 때문에 그의 음악적인 해석은 폭 넓고 다양하지만 설득력이 강하고 객관성을 잃지 않는다.

뮌시는 또한 레코드 녹음에 있어서도 아주 많은 혜택을 받은 지휘자였다.
따라서 그의 레코드 레이블은 아주 다양하고 가지수도 헤일 수 없을 만큼 많다. 또한 그는 생전에 베를리오즈 협회 회장이었는데, 꼭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베를리오즈의 작품에서는 특이한 정열을 발휘하였다.

<환상 교향곡>만 하더라도 보스톤 교향악단을 지휘한 앨범과 파리 관현악단을 지휘한 앨범이 모두 전무후무한 명반으로 아직 그것을 능가할 만한 레코드 녹음이 없는 실정이다. 보스톤 교향악단을 지휘한 <이탈리아의 헤롤드>, 동 악단의 지휘에 의한 극적(劇的)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 역시 보스톤 교향악단 지휘에 의한 <레퀴엠>, <베를리오즈 서곡집> 등이 대단히 뛰어난 명반이다.

그밖에 프랑스의 작품으로는 보스톤 교향악단을 지휘한 댕디의 <프랑스 산사람들의 노래에 의한 교향곡>, 쇼송의 <교향곡 Bb장조> 결합반, 생상스의 <교향곡 제3번>, 프랑크의 <교향곡 d단조>,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잔주곡>외, 라벨의 <볼레로>, <스페인 광시곡>외...등이 모두 제1급 연주반들이다. 독일 작품으로는 역시 보스톤 교향악단을 지휘한 슈만의 <교향곡 제1번 - 봄>외, 브람스의 <교향곡 제2번>외, 브람스의 <교향곡 제4번>외, 멘델스존의 <교향곡 제4번 - 이탈리아>외..등이 명반이다. 그밖에도 챠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4번>, <현악 세레나데>외, 파리 관현악단을 지휘한 오네게르의 <교향곡 제2번>외...등이 역시 명연반이다.


쟈료 출처 : 음악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