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 (1930 - 2004)
독일 태생의 오스트리아 지휘자.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나,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그는 말 그대로 영웅이었으며 전설이었다.
독일 음악과 오페라에 있어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었으면서도 일생 동안 어느 오케스트라에도 묶이지 않았던 그는 2004년 생을 마칠 때까지 평생토록 어느 악단에도 속하지 않고 자유로운 지휘 활동을 했다.
또한 연주에 있어서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연 직전에라도 연주를 취소할 만큼 완벽을 추구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과장된 것이기는 하겠지만, 카라얀의 말처럼 냉장고가 비어야만 지휘봉을 들었고, 그리고 햇빛이 가득한 정원에서 먹고 마시며 사랑을 하고 늙기만을 원했다는 번스타인의 말처럼... 그의 자유로운 영혼은 그 어디에도 얽매이는 것을 용납치 않았다.
살아있을 때 전설이라는 칭호를 받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예외였으며 진실로 살아서도 그는 전설이었다.
음악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가 그의 저서 ‘거장의 신화(The Maestro Myth)’에서 "클라이버는 그 자신에게조차 수수께끼"라고 적은 대로, 죽음자체도 수수께끼처럼 그는 갔다.
레코딩을 하지 않고, 라이브 연주도 그다지 많이 하지 않았던 클라이버는 카라얀과는 반대로 은둔을 즐기는 마에스트로였다.
말년에는 그가 살아 있기는 한 건지 궁금할 정도였으며, 타계 소식도 그가 죽은지 15일이나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졌을 정도로 은둔자였다.
그러나 살아서 이미 전설이 되었던 그는 죽어서도 자유로운 그의 영혼과 더불어 보석처럼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그의 음악적 유산들과 함께 전설로 남아 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1930년 7월 3일 베를린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이름은 카를이었다.
그는 독일계 아버지와 미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아르헨티나에서 성장했다.
독일과 스위스에서 음악적 역량을 쌓았으나, 음악 환경으로 친숙한 곳은 오스트리아였다.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지휘자였던 에리히 클라이버(Erich Kleiber)가 그의 부친이었는데, 당시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의 총감독이었던 에리히 클라이버는 1935년 발생했던 푸르트벵글러의 '힌데미트 사건' 때에 푸르트벵글러를 지원하였다.
이후 그는 나치스에 항의하는 뜻으로 사임하였고, 음악적 자유를 위해 가족들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그리고 그는 당시 5살이었던 아들 '카를(Karl)'의 이름을 스페인식인 '카를로스(Carlos)'로 개명하였다.
에리히 클라이버는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일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특별한 음악 교육은 시키지 않았으며, 카를로스 또한 아버지의 반대가 너무도 완강해서 청년으로 성장할 때까지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받은 일이 없었다.
음악의 열정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1950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의 나이 20살이 되어서야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1952년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돌아온 뒤, 카를로스는 부친의 뜻에 따라 음악가가 되는 것을 단념하고 스위스 취리히의 공과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였다.
그러나 스위스 유학은 오히려 아버지의 직접적 간섭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고, 그런 자유 속에서 카를로스는 지휘자에 대한 꿈을 키워 나갔다.
이후 그는 뮌헨에서 주로 오페레타를 상연하는 게르트너플라츠 극장(Gartnerplatz Theatre)에서 무보수로 견습지휘자부터 시작했다.
이 무렵에 부친 에리히 클라이버도 독일로 돌아와 뮌헨 국립오페라극장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등으로 열광적인 환영을 받고 있었다.
1954년 카를로스는 포츠담에서 카를 켈러(Karl Keller)라는 가명으로 오페레타를 지휘하면서 지휘자로 데뷔하였는데, 당시 청중들로부터 대단한 절찬을 받았다.
1956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아버지 대신 베를린 도이치오페라극장에 몸담아, 1958년부터 지휘자로서 이름을 얻기 시작하였다.
1958년부터 1964년까지 뒤셀도르프와 뒤스부르크의 도이취 오퍼(Deutsche Oper am Rhein)의 지휘자로 일하였고, 1962년부터 이듬해까지 <호프만 이야기(Coutes d’Hoffman)>를 비롯한 일련의 오펜바흐 작품을 지휘해 호평을 받았다.
1964년부터 2년간 스위스 취리히에 머물면서 취리히 오페라의 지휘자로 일하였다.
1966년부터 카를로스는 슈투트가르트 뷔르텐베르크 가극장으로 옮겨 지휘자로서 2년간의 캐리어를 더 쌓았으며, 이곳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바그너, 베르디, 베르크 등의 오페라를 지휘하여 차츰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해에 영국에 데뷔하여 1925년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가 초연했던 알반 베르크(Alban Berg)의 오페라<보첵(Wozzeck)>을 에딘버러 페스티발에서 연주하였다.
1967년 7월 빈 음악제에서 메조 소프라노 크리스타 루트비히(Christa Ludwig)와 말러의 <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를 지휘하여 국제적인 지휘 무대로 비상하게 되었다.
이 공연을 계기로 그는 에리히 클라이버의 아들이 아닌 창조적인 음악가 카를로스 클라이버로 독립하게 되었고, 바야흐로 전성기에 들어섰다.
1968년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Bavarian State Opera)의 지휘자를 지낸 뒤, 1973년에 빈 국립오페라극장을 지휘하였다.
1974년 바이로이트 음악제에 데뷔하여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를 지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코벤트가든 왕립오페라극장을 지휘하였다.
1978년 미국 무대에 데뷔해 시카고 교향악단 지휘를 맡아 격찬을 받았고, 이후 1983년에 다시 지휘하였다.
1988년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Mirella Freni)와 함께 푸치니의 <라 보엠(La boheme)>을 지휘하면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도 데뷔하였다.
1989년 카라얀이 베를린 필을 사임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에게 후임 음악감독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그리고 메트로폴리탄으로 돌아와 1990년 베르디의 <오델로(Otello)>,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Der Rosenkavalier)>를 지휘하였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1980년 오스트리아 국적을 취득하였고, 1982년에 빈 국립오페라 극장과 한시적인 계약을 맺기도 했지만 1989년과 1992년에 빈 필 신년음악회를 지휘한 것을 마지막으로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말년에는 뮌헨 근교의 산속에서 살면서 가끔 아내의 나라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2004년 7월 6일,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어머니와 아내의 고향인 슬로베니아에서 숙환으로 향년 74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7월 10일에 그보다 앞서 세상을 등진 슬로베니아 출신의 부인의 묘지 옆에 안장되었다.
클라이버는 카라얀과 번스타인 등 대가의 서거 이후 클래식 음악계에서 카리스마를 유지하고 있던 마지막 거장이어서 그의 타계는 아쉬움을 더해주고 있다.
"만약 클라이버가 어떤 악단의 상임을 맡았다면 그 악단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앙상블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플라시도 도밍고의 말이 가슴에 진하게 와 닿는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바이에른 국립오페라를 사임한 뒤에는 연주회는 물론 녹음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의 그에 대한 평가에 철처히 무관심했으며, 또한 연락이 두절되기 일쑤였고, 거처도 일정하지 않았다.
언론과의 인터뷰나 녹음도 철저하게 피하는 데다, 종종 충동적인 행동으로 정해진 연주 스케줄을 펑크내는 바람에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기인 혹은 은둔자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음악적 가치와 명성은 높아졌으며 은둔할수록 세상은 더욱 그를 원했다.
그저 그렇고 그런 흔해빠진 레코딩들, 예술성보다는 화려하게 치장한 상업성이 빤하게 보이는 연주회의 물살에 섞이지 않고 클라이버는 은둔과 사색의 만년을 선택했다.
그의 명성에 비하여 사망한지 보름 후에나 그 소식이 알려진 까닭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는 레퍼토리가 풍부하지 않고 음반도 많이 내놓지는 않았지만, 연주한 그리고 내놓은 음반마다 최고의 연주를 보여주었다.
‘레코딩을 허락하는 것은 내겐 공포에 가까운 일이다’라고 했을 만큼 레코딩을 싫어했던 클라이버는 더 많은 좋은 앨범들을 후세에 남길 수도 있었는데, 연주와 녹음에 필요이상의 만전을 기하는 완벽주의자여서 그의 녹음들은 매우 적다.
더우기 그가 남긴 베토벤 <교항곡 6번 - 전원>은 그의 아들이 한 연주회장에서 카세트테이프로 녹음한 것을 한 회사가 기적적으로 구해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녹음이다.
그의 데뷔 앨범은 소프라노 군둘라 야노비츠, 에디스 마티스, 테너 피터 슈라이어, 바리톤 라이프, 베이스 테오 아담 등 가수진과 슈타츠카펠레를 지휘한 베버의 <마탄의 사수>인데 명연으로 남아 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베토벤과 브람스의 교향곡 해석에서 탁월했다는 평판을 들었다.
1994년, 빈 국립 오페라와 가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는 역사적 명연주로 남아 있으며,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베르디의 <오델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일렉트라> 등도 걸작이다.
교향곡으로는 빈 필하모닉을 지휘한 베토벤의 <제5번 교향곡 - 운명>, <제7번 교향곡>이 걸작으로 꼽히고 있고, 바이에른 국립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베토벤 <교향곡 제4번>의 실황 연주 음반은 관객의 환호까지 녹음되어 있다.
이 3개의 연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레코딩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리고 도이치 그라모폰에 한결같이 명반으로 손꼽히는 <박쥐’>, <마탄의 사수’>, <라 트라비아타> 등 몇 곡의 오페라와 베토벤, 브람스, 슈베르트의 교향곡 레코딩이 남아 있는데, 이 음원(音源) 가운데 슈베르트 <교향곡 8번 - 미완성>과 브람스 <교향곡 4번>,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3막 ‘사랑과 죽음’을 모아 추모 음반이 만들어졌다.
<참고>
■ 카를로스 클라이버를 추억하는 헨리 포겔의 글 / 글 : 헨리 포겔 (음악 평론가, 미국 오케스트라 연맹 CEO)
돌이켜봤을 때, 나는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실제로 지휘하는 모습을 보려 했다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것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제한된 것인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정작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기회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그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이 수수께끼의 지휘자, 그러나 부인할 수 없도록 세계 음악계에 우뚝 솟은 지휘자가 지난 7월 74세의 나이로 별세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20세기 음악계에서 가장 이상한 수수께끼의 주인공이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추앙받는 지휘자가 거의 지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젊은 카를로스는 지휘자로서의 커리어 초창기부터 연주회 무대에 서는 것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았다.
연주회는 그를 소심하게 만들었다.
그는 매번 자신의 지휘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마음속에서 들을 수 있는 절대적인 완벽의 사운드, 그에 걸맞는 해석을 이루지 못하면 지휘대 위에 설 가치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카를로스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를 부친인 위대한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 탓으로 돌린다.
지휘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무정한 성격의 그는 아들의 지휘에 대해 아버지다운 뒷바라지가 부족했고, 그로 인해 카를로스의 불안정한 성격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1970년대 말에는 카를로스가 지휘하기에 앞서 구토를 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1985년, 내가 시카고 심포니의 행정수석으로 부임했을 때 클라이버는 이미 1980년대 초반을 통틀어 가장 볼만했던 두 주 동안의 예약제 콘서트(Subscription Concert)에서 지휘하고 떠난 뒤였다.
시카고 심포니의 청중들과 위원회 회원들, 행정 관리들, 그리고 연주에 직접 참여했던 오케스트라 단원들로부터 그 콘서트가 얼마나 격조 높고 훌륭했던지 듣고 또 들었다.
음반으로 만들어져 살아남은 하루분의 연주를 제외하고는 이 당시의 연주를 직접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시카고 심포니에 다시 초청한다면 소문의 명연주를 다시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결국 시카고에서의 연주(1978·1983년)는 카를로스가 미국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유일한 사례가 되고 말았다.
그때 카를로스는 연주에 만족했고 많은 지인들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 생의 20년 동안 그는 은둔하면서 세상의 모든 초대를 거부하며 살았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존재를 유일무이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의 아버지보다도 더욱더 비견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존재가 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무시할 수 없는 한 가지 요인은 그의 부친 에리히 클라이버가 음악의 거인들이 군웅할거하던 시대에 지휘했다는 점일 것이다.
토스카니니, 푸르트뱅글러, 멩겔베르크, 클렘페러, 발터, 비첨, 몽퇴, 스토코프스키, 미트로풀로스, 쿠셰비츠키, 크라우스, 크나퍼츠부쉬 등등, 당시 세계는 진정으로 위대한 지휘자들로 가득했었다.
대놓고 할 수는 없는 개인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요즘은 그 시대와는 다르다.
약 40년 전쯤부터 지금까지 거장 부재의 시대가 이어져 오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존재가 중요하게 부각됐다는 분석이다.
몇 가지 경우 그의 음악적인 접근법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나 또한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해석할 때 그가 사용하는 베버식의 접근에는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거기에 참되고 설득력 있는 음악적 개성이 존재하고 있음은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카를로스는 음악계로 비교적 서서히 진입했다.
베를린에서 태어나 아르헨티나에서 자란(나치를 피해 이주한 부모 때문이다) 카를로스는 어릴 적부터 음악을 공부했지만 1949년 취리히로 가서 화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1950년 남미로 돌아와 음악을 공부한다.
1951년 21세의 카를로스는 독일 오페라하우스의 코치가 됐고, 1954년 지휘자로 데뷔하게 된다.
이런 그의 전력과 ‘클라이버’라는 이름의 상충된 감정은 그가 데뷔할 때의 가명인 카를 켈러(Karl Keller)에서 잘 드러난다.
1950년대 후반쯤부터 카를로스는 드디어 자신의 이름으로 지휘했고, 1960년대부터는 그의 명성이 각지로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오페라극장에서 유명해졌다.
1970년대 중반, 카를로스는 바이로이트의 스타로서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 프로덕션을 지휘했다.
이 당시의 실황은 해적 음반으로 보존됐는데, 나중에 그가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녹음한 지나치게 공들인 듯한 스튜디오 레코딩보다도 훨씬 선동적이고 생기가 넘치는 해석이다.
1970년대에 클라이버의 명성은 교향악 분야에서도 드높아졌다.
그 명성은 위대한 지휘자로서, 그리고 괴벽스러운 지휘자로서, 두 가지 모두를 의미했다.
그는 장시간의 리허설을 요구했고 느닷없이 잇달아 계약을 취소하곤 했다. 그 이유는 아주 사소한 것부터 결코 예상치 못했던 것까지 다양했다.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을 때 연주에 대해 언론의 혹평이 나오자 그는 런던에서는 다시 지휘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 뒤로는 정말로 런던에서 지휘하는 카를로스를 볼 수 없었다.
1980년대에 그는 레퍼토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손에 꼽을 정도로까지 연주곡목을 줄였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베토벤 ‘에로이카’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소한 그가 유명해지고 난 뒤 전성기 때 그것을 들어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그는 베토벤을 매우 제한적으로 연주했다.
교향곡 4번, 5번, 7번 정도. 다른 작곡가들도 마찬가지였다.
클라이버가 조금이라도 연주를 했다면 그 작곡가는 행운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만했다.
도대체 그는 왜 그런 기벽과 함께 사람들로부터 달아난 것일까. 그리고 왜 세상이 그에게 지휘를 간청하도록 만든 것일까. 그 답은 간단하다. 그리고 그것은 이 글의 도입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카를로스가 지휘하던 시대, 지휘자들은 똑같은 옷을 입은 것처럼 몰개성의 연주를 보여 주었다. 그 단조로운 음악의 장에 개성적이면서 압도적인 힘과 통찰력을 지닌 음악가 클라이버가 등장한 것이다. 세계인들은 1975년에 그것을 처음 깨닫게 되었다. 도이치 그라모폰이 그의 고전이랄 수 있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발매한 것이다(빈 필과 1974년에 레코딩했다). 모든 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레코딩이었다.
나는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나는 뉴욕의 시라큐스에 위치한 클래식 라디오 방송국의 오너이자 PD로 재직 중이었다. DG에서 온 LP의 포장을 처음 뜯을 때 나는 비아냥거렸었다.
“오, 우리가 원하던 그것이군. 또 하나의 베토벤 5번이라니!”
그리고 음반을 플레이어에 걸었다.
30년 가까이 지났지만 그때 이 음반의 첫 감상은 내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이 레코딩은 여전히 동곡의 스테레오 녹음 중에서 최고 명반 중 하나이다(역시 굉장한 연주인 베토벤 교향곡 7번과 함께 커플링된 CD DG 447 400-2로 구할 수 있다).
이 레코딩이 특별한 이유를 분석하기는 쉽지 않다.
악기 간 밸런스의 디테일, 화음의 조율을 향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집중력과 명료한 텍스처, 완벽한 템포, 상쾌한 어택음과 프레이징의 호흡 등이 결합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양상들과 더불어 거기엔 악기들의 질주나 강렬함 같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단원들이 그들의 인생을 건 듯한 연주다.
현은 부지런히 활을 긋고 있으며 목관은 불타는 듯 격렬하게 음을 내고 있다.
금관은 다른 악기들이 궤도를 잃지 않게끔 배려하면서 파워풀하게 포효한다.
이 음반을 들으면 베토벤이 작곡했을 당시 초연됐을 때 청중이 받았을 충격을 함께 나누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나는 종종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클라이버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당시에 무엇이 그를 그토록 위대하게 만들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단원들은 세부까지 놓치지 않고 듣는 카를로스의 놀라운 귀에 대해 이야기했다. 현악 주자들은 무대 뒤편에 위치하고 있었더라도 카를로스는 그들이 어떻게 연주하는지를 똑똑히 듣고 있었음을 확신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은 카를로스가 현악 주자들에게 ‘자유로운 보잉’을 권했는데, 그것은 디테일을 강조하는 그의 가장 인상적인 측면이었다고 한다.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도 지휘할 때 쓴 바 있는 ‘자유로운 보잉’이란 말 그대로 활을 쓰는 방식을 연주자들 각자의 의도대로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고 그 대신 활을 올릴 때와 내릴 때 방향을 일치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스토코프스키는 한꺼번에 활을 바꾸면 음악적인 흐름이 깨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클라이버는 스토코프스키보다 한 수 위였다. 그는 자신의 ‘자유로운’ 보잉을 모두 계산해서 적어 두었다.
다시 말해 청중들에게는 활을 올려 긋고 내려 긋는 것이 단원들의 자유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기실은 클라이버가 각각의 스트링 파트에 서로 다른 보잉을 명시해 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안정되고 정확한 디테일을 끄집어내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시카고 심포니의 수석 첼리스트였던 프랭크 밀러는 이에 강력히 반발해서 악보 사서들은 첼로 파트 악보를 그로부터 지켜야 했다. 걸핏하면 클라이버의 보잉 지시를 삭제하고 과거의 전통적인 방식을 적어 놓곤 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고 클라이버는 즉시 시카고를 떠났다고 한다.
지난 50년 동안 시카고 심포니를 지휘한 모든 객원 지휘자들 가운데 시카고 심포니의 악단원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존경을 보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이 바로 카를로스 클라이버다.
위에 언급한 대로 베토벤 CD 외에도 카를로스의 재능의 전모를 드러내는 레코딩을 약간 더 찾아볼 수 있다.
골든 멜로드람 레이블에서 발매된 4장으로 구성된 세트(GM 4.0043)에는 시카고 심포니를 지휘한 실황이 수록돼 있는데 슈베르트 교향곡 3번, 버터워스의 ‘영국 목가’ 1번, 그리고 뜨거운 베토벤 교향곡 5번이 담겨 있다.
이 세트에는 또한 슈투트가르트, 쾰른, 빈 등에서의 연주도 들어 있는데, 보로딘 교향곡 2번, 하이든 교향곡 94번, 모차르트 교향곡 33번, 말러의 ‘대지의 노래’ 등이 그것이다.
DG의 베토벤 5·7번과 함께 클라이버 지휘의 관현악곡을 섭렵하는 데 필수적인 음반이다.
그는 DG에서 몇 편의 뛰어난 오페라 음반을 녹음했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음반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두 편의 오페라는 모두 라 스칼라 극장에서의 1970년대 라이브 레코딩이다.
첫 번째는 플라시도 도밍고·미렐라 프레니·피에로 카푸칠리의 ‘오텔로’(1976)이다.
도입부의 폭풍우 장면부터 불을 뿜는 연주다.
클라이버의 지휘는 저변에 깔린 운명과 비극을 의식하고 그 불가피성의 관성으로 오텔로의 죽음 장면에까지 몰고 간다.
이 연주는 뮤직 앤 아츠 등 여러 레이블에서 발매됐다(내가 가진 것은 Exclusive EX92T 08/09이다).
이보다 더 인상적인 음반은 푸치니의 ‘라 보엠’이다.
이 연주 역시 몇몇 레이블에서 발매됐다(역시 Exclusive 음반으로 가지고 있는 EX92T 01/02).
이 1979년 연주에는 파바로티, 코트루바스, 카푸칠리 등이 노래했으며, 무제타 역에는 루치아 폽이 분하고 있다.
내가 들었던 연주 중에서 가장 호화로운 캐스팅이다.
당신이 ‘라 보엠’에서 원하던 모든 것들이 여기 있다.
다정함, 유머, 깊이 있는 열정, 비탄, 고통, 모두가 있다.
라 스칼라 필은 무엇에 홀린 듯이 연주하고 있고, 클라이버는 스타 가수들을 녹여 하나의 앙상블로 만들어 내고 있다.
여기서 파바로티는 배역을 노래하는 파바로티가 아니다.
처음으로 자신이 로돌포 자체가 되고 있다.
그의 미미와 또 다른 등장인물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파바로티는 진정으로 배역과 하나가 되는 모습이다.
클라이버는 이 같은 분위기를 소중하게 유지시키며 파바로티를 향한 찬사를 대신하고 있다.
향년 74세.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죽음은 모든 음악 애호가들의 슬픔이다.
우리는 이 시대에 너무나도 드문 진정한 거인을 잃었다.
더욱 슬픈 것은 지난 20년 동안 그의 무대가 너무나 드물었고, 그로 인해 그가 남긴 유산의 폭과 범위가 더욱 축소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천재가 남긴 음악을 길이 향유할 수 있음을.
쟈료 출처 : 작은 눈 큰 세상 /이현식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