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y Shostakovich, 1906~1975)
직업 : 러시아의 작곡가.
국적 : 러시아
출생지 : 페테르부르크
활동년도 : 1906년 9월 25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 1975년 8월 9일 (모스크바)

15곡의 교향곡을 비롯해 수많은 실내악곡, 협주곡 등으로 유명하며, 그중 많은 곡들을 예술에 대한 소련 정부의 규정과 검열하에서 작곡했다.

초기생애와 작품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나 여러서 부터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에게 피아노의 기초를 배우고, 11세 때 글랴세르의 음악학교에 들어가 정규의 작곡공부를 시작하였다.

러시아 혁명 후인 1919년에는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 1923년까지 L.니콜라이에프에게 피아노를, M.시타인베르크(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사위)와 A.K.글라주노프에게 작곡을 배우고 1925년에 졸업하였다.

1927년에 바르샤바에서 개최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하여 심사위원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았지만 연주자로서 활동을 계속하지는 않았고 다만 자신의 작품만을 간혹 연주했다.

그는 바르샤바에서 피아노로 성공을 거두기 전에 이미 작곡가로서 더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교향곡 1번(1924~25)은 발표되자마자 급속도로 전세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교향곡의 양식적 근원은 매우 다양하여 차이코프스키와 파울 힌데미트, 동시대인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등 매우 다양한 작곡가들의 영향이 나타난다.

이후 몇 년 동안 그가 쓰게 되는 음악들에서 그는 더욱 많은 작곡가들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었다.

당시 소련의 문화적 풍토는 상당히 자유로워 이고리 스트라빈스키나 알반 베르크와 같은 전위음악가의 작품들도 연주되었다. 벨라 바르토크와 파울 힌데미트가 러시아를 방문하여 자신의 작품들을 연주할 정도였으며, 쇼스타코비치는 공공연하게 당시의 전위적 경향들을 가지고 실험을 꾀했다.

니콜라이 고골리의 원저를 가지고 만든 그의 풍자 오페라 〈코〉에는 서양음악의 신음악적 요소들이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작품에서부터 이미 풍자수법이 양식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이것은 전위음악 작품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랄한 풍자가 담긴 유머를 나타내기 위해 음향 자체를 왜곡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결과 다음에 작곡한 2번째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Ledi Makbet Mtsenskovo uyezda〉(나중에 〈카테리나 이츠마일로바 Katerina Izmaylova〉로 제목이 바뀜)은 더 좋은 작품이었지만 양식적인 측면에서는 퇴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당국은 이 오페라의 음악 어법이 너무 급진적이라 생각했다.


1928년 스탈린이 제1차 5개년 계획을 시작하면서부터, 소련 문화는 철저히 통제받기 시작했고, 음악에서는 직접적·대중적인 양식이 요구되었다. 전위음악과 재즈 음악은 추방되었고, 한동안 정치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던 차이코프스키조차도 탄압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는 즉시 당국으로부터 비판을 받지는 않았지만, 일단 비판을 받게 되자 그것은 아주 혹독했다.

1936년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의 공연이 난데없이 당국의 비판을 받게 된 것은 공연장에 참석했던 스탈린의 개인적인 분노 때문이었다. 그는 정부기관지로부터 신랄하게 비판당했고,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뿐 아니라 당시 아직 초연되지도 않았던 교향곡 4번(1935~36)의 연주까지도 취소되었다.

그 다음으로 탄생한 걸작인 교향곡 5번(1937)은 작곡가 자신이 '비판에 대한 한 소련 예술가(쇼스타코비치)의 응답'이라 묘사한 작품으로, 관의 규범을 잘 지켜나간 평범하고 '낙관적'인 작품일 것이라 기대되었지만 정반대로 진지하고 우울하기조차 한 애가풍의 음악이었다.

이 작품은 그러면서도 표현 방식이 매우 직접적이어서 청중들의 즉각적인 호응을 얻었으며 당국에서도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는 교향곡 5번으로 초기 작품들에서 보였던 양식의 불안정에서 벗어나 마침내 개인적 양식을 만든 셈이 되었고, 이후 일련의 작품들에 계속하여 자신의 양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교향곡 4번, 5번 모두 구스타프 말러의 영향이 분명하게 보이지만, 교향곡 5번은 기법상의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교향곡 4번이 선율적 악상들의 자유로운 증식에 기초해서 만든 다소 산만한 작품인 반면, 교향곡 5번의 1악장은 선율의 집약적 사용이 특징으로 음악의 어떤 한 부분이 음악의 기초를 제공하면서도 끊임없이 절정을 향해 유기적으로 성장해나간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다른 작품들에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푸가와 샤콘 등 바로크의 단일 주제 양식(두 양식 모두 단일한 선율 악상의 계속적인 반복에 기초하여 성장함)에 대한 그의 선호를 반영한다.

단일한 표현 재료로부터 끊임없이 무언가를 발전시켜나가는 이러한 경향은 성숙기 작품들에서 주제 악상들의 반복으로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교향곡 5번에서부터 이미 장3도와 단3도의 병치에 입각한 다양한 배합 기법이 사용되고 있으며 작곡가 자신의 이름 철자 중 첫 자들만 뽑아낸 D-S-C-H에서 음을 유추시켜 D-E-C-B(S는 Es로 발음되어 E음으로 유추되고, H는 계이름으로 B음), 이 4음을 반복시켰다.

1937년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로 임명되었고,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에도 그는 계속해서 레닌그라드에 남아 있었다.

그는 그해 가을과 겨울에 점령된 도시 레닌그라드에서 교향곡 7번을 작곡하여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것은 음악의 질 때문이라기보다는(이 작품은 종종 진부하다는 비판을 받음) 곡이 작곡되었던 상황에 대한 낭만적 해석 때문이었다.

사실 그의 작품의 질은 일관되지 못했다. 음악 외적 힘이 음악을 통제할 때면 수사적이고 양식적으로 보잘것없는 공허한 기법들을 사용하는 경우가 너무 잦았다.

1942년 쿠이비셰프로 피난한 이후 1943년 모스크바 음악원의 작곡과교수로 모스크바에 정착했으며 1945년부터는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후기생애와 작품
1940년대 중반에 쓴 작품들에는 교향곡 8번(1943), 피아노 트리오(1944), 바이올린 협주곡 1번(1947~48) 등 걸작들이 많이 있다. 이 작품들은 대체로 심각하고 음울하기까지 하여 당국으로부터 2번째 비판을 당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냉전이 시작되자 소련 당국은 더욱 강경하게 이념적인 통제를 했으며, 당시 일부 작곡가들이 사용하던 것보다 더 쉬운 음악 언어를 요구하게 되었다.

1948년에 모스크바에서는 안드레이 주다노프가 주재하는 악명 높은 회의가 열렸다. 그는 소련음악계를 주도한 음악이론가로서 쇼스타코비치를 포함한 당시 소련의 주요작곡가들을 공격했다. 그결과 소련 창작음악의 질은 이후 몇 년 동안 늪에 빠지게 되었다.

쇼스타코비치는 당국의 조치로 인해 모스크바 음악원과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의 교편 활동을 금지당하는 등 활동의 제약을 받게 되었지만, 현악4중주 4번(1949)과 특히 현악4중주 5번(1951)의 작곡을 통해 당국에 호소하여 극적으로 그의 음악 양식은 다시 당국으로부터 구제받을 수 있었다.

교향곡 10번이 작곡된 것은 스탈린이 죽은 해인 1953년이었고, 이때부터 그는 주다노프의 노선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제 16년 전에 작곡된 교향곡 5번에서처럼 작품의 질에 직접 호소하게 된 것이다.

이후 그의 전기가 작품목록으로 꽉 찰 만큼 방대한 작곡 활동으로 이어졌다. 대체로 당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서 창작 활동을 해나갈 수 있었지만, 교향곡 13번(1962)에서는 가사(시인 예프게니 예프투셴코의 시에 의한 것으로 반체제적 내용) 때문에 초연 이후 연주를 금지당하는 등 약간의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그는 더이상의 방해 없이 교향곡 14번을 작곡했다.

이 곡은 죽음을 주제로 한 11개의 연가곡을 기초로 만든 곡으로, 당국에 호소하기 위해 만든 곡이 아닌 내적으로 깊은 감동을 주는 작품이었다.

그는 1949년에 미국을 방문했고, 1958년에는 이탈리아·영국 등 전유럽으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그는 이미 로마에 있는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 국립 아카데미의 명예회원으로 선출된 상태였고,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는 명예음악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6년에는 로열 필하모닉 협회의 금메달을 받았다.

상당수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사색적인 성향으로부터 내향성을 엿볼 수 있기는 하지만, 그는 대체로 사회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1953년 프로코피예프가 죽은 뒤 그는 러시아 최고의 음악가가 될 수 있었다.

그는 공산주의자였으며 실제로 정치 회의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작곡가로서는 당국의 정치적 이념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을 거부하여 실제로 당국과의 긴장관계에 처했을 때 작곡가로서 더욱 빛을 발하곤 했다.

그의 최고 걸작들은 당국의 통제 속에서 샘솟는 창작력이 진솔한 음악 언어(관리들은 언제나 그에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요구했음)와 만남으로써 가능한 작품들이었다.





쟈료 출처 :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