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ns, 1835 - 1921)
국 적 : 프랑스
출생지 : 프랑스 파리
활동년도 : 1835년 10월 9일 - 1921년 12월 16일

프랑스의 작곡가이며 노르망디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카미유가 태어난 지 두 달 후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래서 생상은 자신도 폐결핵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평생을 남쪽의 따뜻한 나라에서 살았다. 그는 어머니와 고모의 양육을 받았다.

글자를 깨치기도 전에 이미 악보를 읽었으며 5세가 되기도 전에 작곡을 시작했고, 그 즈음에 베토벤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의 피아노 파트를 연주해냈다.

이때부터 생상스는 피아노에서 손을 때는 일이 없었고 얼마 후에는 가장 완벽한 명수의 틈에 끼이게 되었다. 죽기 전날까지 작곡을 계속했으며 그가 작곡하는 모습은 붓이 슬슬 나가는 것 같이 전혀 지루하지 않아 보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듯이 운명처럼 작품을 썼다는 것이다.

7세 때에 생상스는 스타마티에게 맡겨졌지만 그는 일찍부터 자주성을 발휘했다. 자신의 생각과 의지에 반대되는 일을 당할 때에 나타나는 고집스러운 태도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생상스는 피아노 교사 스타마티에게 자신을 말덴(Maleden)에게 보내준 일에 대해서는 감사했다. 그는 말덴을 다시없는 교사라고 단언했다.

말덴은 생상스에게 이론과 작곡을 가르쳤다. 처음으로 가르침을 받은 말덴의 특수한 방법에 의한 지도로 생상스의 자주성을 더욱 견고하게 한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1세 때 생상스는 살 플레이엘에서 최초의 연주회를 두 차례에 걸쳐서 개최했다.

1849년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브누아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1851년에 1등상을 받고 졸업했다.
그는 놀랄 만한 즉흥연주의 명수이고 리스트로부터 세계 최고의 오르간 주자라는 칭찬을 받았으며, 1851년에는 알레비에게 작곡을 배웠다.

후에 그는 로마 대상의 후보자들에게는 무서운 심사위원이 되었으나, 이 당시에는 로마 대상을 두 차례나 받을 뻔했다가 받지 못했는데, 이것은 거의 항상 성공만 했던 그의 경력 초기에 예외적인 실패의 경험이었다.

1852년 성 세실 협회는 생상스의 <성 세실리아 찬가, Ode a sainte Cecile>에 상을 수여했다. 세실 협회는 1853년에 그의 교향곡 제1번을 연주하였고 또 3년 후에는 출판하지 않았던 교향곡 제2번도 연주했다.

1853년 이후 생상스는 성 메리 교회의 오르간 주자에 임명되었으나 1858년에 그 자리를 사임했고 마들렌느 교회의 오르간주자에 재임명되었다.

1877년에 유산을 상속받음으로써 생상스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의 몸이 되었다. 1861년부터 1865년까지 그는 피아노 교수로서 니데르메이에르 음악학교에서 한때 교편을 잡았으며 학생들 중에는 포레와 메사제가 있었다.

그는 스당의 패배 이후 카스티용과 뷔신느와 함께 국민음악협회를 설립했다. 이것은 아르스 갈리카(갈리아적 예술) Ars Gallica라는 당당한 표어 아래 근대 프랑스 악파를 결속시켰으나 생상스는 1886년에 이 협회를 탈퇴했다.

간부였던 프랑크나 댕디 등과 의견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생상스는 이미 1861년 이래 그의 천부적인 재능에 의해서 바그너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 생상스의 작품

그리고 현대의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하나라고 특별히 언급했다. 생상스는 연장자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동년배들로부터, 특히 비제로부터 똑같은 칭찬을 들었다. 그것은 그들이 생상스에게서 프랑스 악파의 지도자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작곡가로서의 생상스는 종교곡이든 세속곡이든 모든 장르의 음악에 손을 댔으며 모든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아 매우 다채로운 성악과 기악의 편성을 자유스럽게 구사했다. 이상하게도 이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피아노에 바친 37곡 가운데에는 훌륭한 곡이 한곡도 없다.

그 예로 2대의 피아노를 위한 <베토벤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 Variations sur un theme de Beethoven> op. 35(1874)과 3권의 6개의 연습곡op. 52(1877), op. 111(1899), 왼손용 연습곡 op. 135(1912)등을 들 수 있다.

놀랄 만한 정확성으로 오케스트라의 음색을 다룬 생상스는 이를 오케스트라와 결부함으로써 비로소 피아노를 충분히 살려나갔다. 그것은 특히 5곡의 피아노협주곡[op. 17(1858), op. 22(1868), op. 29(1869), op. 44(1875), op. 103(1896)]에서 인정할 수 있다.

리스트의 신봉자였던 생상스는 뛰어난 기교를 통한 가능성의 탐구를 즐겨 하였으며 피아노와 마찬가지로 바이올린을 위해 <론도 카프리치오소>> (1863)와 <하바네라> (1887)는 말할 것도 없고 3곡의 협주곡[op. 20(1859), op. 58(1858), op. 61(1880)]을 작곡했다.

또 이밖에도 2곡의 첼로협주곡 [op. 33(1872), op. 119(1902)]이 있다.

생상스는 실내악의 선구자이기도 하며 36곡 이상의 작품을 썼다.
최초의 곡은 5중주곡 op. 14로서 20세 때의 작품이다.

실내악 작품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2곡의 소나타[op. 75(1885), op. 102(1896)],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2개의 소나타[op. 32(1872), op. 123(1905)], 2곡의 3중주곡[op. 18(1863), op. 92(1892)], 현악기와 피아노를 위한 4중주곡 op. 41(1875), 2곡의 현악4중주곡[op. 112[1899], op. 153[1918]], 7중주곡 op. 65(1881),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유명한 동물의 사육제 (1886) 등이 포함된다.

또한 생상스는 교향곡 쇄신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작곡한 5곡의 교향곡 가운데 2곡은 아직도 출판되지 못하고 있다.

프란츠 리스트를 기념해서라는 헌사가 있는 교향곡 제3번 op. 78(1886)은 그 오케스트라의 편성과 형식이 혁신적인 곡이다. 생상스는 리스트에 이어서 프랑스의 작곡가로서는 처음으로 교향시 부분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계속해서 <옹팔의 물레> (1872), <파에톤> (1873), 한 가곡을 토대로 한 <죽음의 무도> (1874), 헤라클레스의 <청년시대> (1877) 등을 작곡했다.

그의 많은(119곡) 가곡 중 흥미로운 것으로는 <페르시아의 노래> op. 26(1870)을 들 수 있다. 그는 신앙을 가지지 않았지만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1858), <노아의 홍수> (1875), <레퀴엠> (1878), <약속의 땅> (1913) 등을 작곡했다.

동 시대의 모든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생상스는 극장음악에 정열을 불태웠으나 그는 자신의 오페라가 예상한 것만큼 성공을 거둔 일이 한 번도 없었다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삼손과 데릴라> (1877)는 예외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역시 가치를 인정시키는 데 상당한 곤란을 겪어야 했다.

중후한 역사적 오페라에서 가벼운 오페라 코미크에 이르기까지 그는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모든 장르를 시도했으며, <동양의 공주> (1872), <은방울> (1877), <에티엔느 마르셀> (1879), 헨리 8세 (Henri VIII, 1883), <프로세르피네> (1887), <아스카니오> (1890), <프리네> (1893), <야만인> (1901), <엘렌느> (1904), <조상> (1906), <데자니르> (1911),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는 <수다쟁이 여인> (1896)을 계속 공연했다.

이런 중요한 창작활동에 추가되어야 하는 것은 M. A. 샤르팡티에와 글룩의 많은 악보에 대한 교정작업이며, 특히 라모의 전작품을 출판할 때에는 이 잊혀진 천재를 세상에 내놓으려고 가장 정열을 기울인 사람이다. 그는 또한 몇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지금도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으로는 <화성과 선율> (1885파리)과 <초상과 추억> (제3판 1909)이 있다.

■ 평가

이 탐욕스러운 연구가가 교육적인 저서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절충주의, 즉, 모든 체계주의에 대한 강박관념을 증명하고 있다. 그는 냄새만 맡아도 솜털이 일어날 정도로 체계주의를 싫어했다.

생상스의 학식은 놀랄 만한 것이었으며 그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던 드뷔시조차도 생상스는 세계에서 음악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라고 단언했을 정도였다. 이 학식과 과거의 위대한 거장들에 대한 찬탄의 능력, 그리고 비범한 동화의 재능으로 인해서 그는 영혼의 자유스러움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영감의 폭을 좁혀 버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 자신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그에게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었던 완고한 성격은 아마도 아직 어린 두 아들을 잃은 비극 때문에 만들어진 것 같다. 그는 어색함을 풀고 자기 내부에 있는 아이같은 장난스러움을 자유롭게 표출함으로써 창의적인 환상과 깜짝 놀랄 만한 쾌활성을 가지고 자신의 악상을 표현했는데, 이것은 야심적인 대작보다도 오히려 가벼운 소품 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쨌든 죽음의 무도와 동물의 사육제 처럼 신랄한 유머가 있는 작은 걸작과 많은 스케르쪼에서 생상스의 충동적인 정열이 폭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물의 사육제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는 생전에 이 작품의 출판을 거절했었다. 그 까닭은 이 작품이 너무나 자신을 닮았고 그가 쌓아온 자신의 얼굴에 대한 관념과 일치하지 않은 초상을 세상에 내놓기 싫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물질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또 자신의 속임을 당하지 않고 의연하게 이 작품을 지배하고 싶어하면서도 작품과의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가 조심하려고 해도 이 속박된 낭만주의자에게는 여기저기에서 맥박을 치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누구든지 생상스에게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교의의 가장 완벽한 구현을 보고 있었으며 그 자신도 이런 해석에 반론을 펴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에게 있어서 예술이란 형식이다.
표현과 정열, 이런 것들은 무엇보다 아마추어를 매혹시킨다. 그러나 예술가에 대해서 말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아름다운 윤곽선과 조화를 이룬 색채, 그리고 아름다운 화음의 연속에 의해서 완전히 만족하지 않는 예술가는 예술을 이해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16세기에는 그 시대를 통해서 모든 감정이 배제된 칭찬받을 만한 작품들을 썼던 것이다.
사실, 생상스는 그림을 좋아했으며 풍속화에는 탁월한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덴마크인의 변덕에서 아프리카인들의 주정까지 그는 민족적인 색채를 모았으며, 어떤 장르의 조각들을 모으고 그림 속에 장소를 설정하기 위해 화가가 그림에 첨가하는 첨가물처럼, 선법적인 음계와 동양적인 음계, 민족적인 리듬 등을 펼쳐놓았다. 그러나 그의 솜씨의 완벽성, 특히 관현악법에 대한 그의 솜씨는 그가 접촉한 모든 것에 빛을 더하게 했다. 그래서 그에게 유리하게 포레와 라벨의 찬탄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생상스는 거장으로 대접을 받았고 생전에 동상이 세워졌으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명예를 받았다. 그리고 프랑스 학사원의 회원이 되었고 마침내는 아카데믹한 전통을 재현함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그가 프랑스 음악에 기여한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다시없이 훌륭하게 묘사한 것들 가운데에서 볼 수 있는 프랑스 예술의 가장 고귀하고 가장 순수한 원천으로의 회귀 또는 경멸을 받지는 않았지만 거의 잊혀진 시기에 바흐와 라모에 대해서 그가 준 예리한 시선과 혁신적인 정열, 그리고 반대로 생상스의 조용한 예술에서 가장 떨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작곡가들, 즉 그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생상스이 청년시대에 찬양했던 리스트, 베를리오즈, 슈만, 바그너 등 고약한 작곡가들에 대해서 그가 보여준 지지의 눈길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생상스스의 연표

1835년 10월 9일 파리 출생.
1842년 피에르 말댕에게 작곡을 보엘리에게 피아노를 배움.
1845년 피아니스트로 데뷔.
1846년 10세 때 데뷔.
1848년 파리음악원에 입학. 브누아와 알레비에게 각각 오르간과 작곡 배움.

1853년 마들렌교회 오르간 연주자. 리스트로부터 <이 시대 최고의 오르가니스트>라고 격찬을 받음.
1861년 니데르메이에르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1864년 로마대상에 낙선.
1867년 칸타타 <프로메테우스의 결혼>이 세계박람회 기념 콩쿠르에서 입상.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립.
1871년 국민음악협회를 설립하여 신작 연주를 장려.
1877년 <삼손과 데릴라(Samson et Dalila)> 작곡.
1886년 협회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작곡활동. 런던 필하모닉 협회의 위촉으로 제3교향곡 <오르간>을 작곡.

1888년 어머니 사망, 이후 미국과 동양 여행.
1880년 관현악곡 <알제리 모음곡> 작곡.
1891년 <아프리카> 작곡.
1892년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 행진곡 작곡.
1896년 피아노 협주곡 <이집트의 풍> 작곡.
1921년 사랑하는 곳 알제리로 다시 찿아감. 12월 16일 세상을 떠남.

쟈료 출처 : 편안한 나의 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