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 1857 - 1934)
영국의 작곡가
대담한 선율과 충격적인 음색 효과, 대규모 형식이 특징인 19세기말 낭만주의 관현악 어법으로 작곡된 그의 작품은 영국 음악의 부흥을 촉발했다.

오라토리오 <제론티어스의 꿈>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고 준 남작(男爵)의 작위를 받았다. 후기낭만파에 가까운 작풍으로 <수수께끼 변주곡>, <팔스타프> 등의 작품을 남겼다.

에드워드 엘가는 1857년 6월 2일, 영국 우스터 근교 브로드히스(Broadheath)에서 카톨릭교회 오르간 연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 최초의 작품인 <청년의 지휘봉, The Wand of Youth>을 썼다. 한때 아버지의 권유로 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하였으나, 음악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하고 독학으로 각종 악기의 연주법과 작곡법을 습득하였다.

1877년 아돌프 폴리처(Adolf Pollitzer)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아마튜어 지휘자를 하기도 했으나, 1885년 아버지의 사후에 성 조지 교회당 오르간 주자를 계승하여 조용하고 깨끗한 생활 속에서 음악에의 정진을 계속했다. 그는 정식 작곡 수업을 받은 적이 없었으며, 1889년 캐롤린 앨리스 로버츠(Caroline Alice Roberts)와 결혼하여 우스터셔의 몰번으로 가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890년 우스터(Worcester)에서 거행된 3대 합창단에 의한 음악제에서 자작 <프로와사르, Froissart> 서곡을 연주했고, 이 무렵부터 그의 작품은 일반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곳에서 오라토리오 <생명의 빛, Lux Christi>(1896)을 포함한 여러 편의 대규모 합창곡을 작곡한 후에 1896년 관현악곡 <수수께끼 변주곡, Enigma Variations>을 작곡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 변주곡은 주제를 제시하지 않고 대신 이에 대한 대선율을 기호로 만들었는데, 엘가는 이 주제가 널리 알려진 선율이라고만 말할 뿐 그 정체를 밝히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수수께끼'라는 제목이 붙었다.

그 주제의 정체를 밝히려는 시도가 계속 있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마지막 곡을 제외한 14개의 변주 모두 엘가의 친구들을 암호와 같은 방법으로 지칭하고 있는데 예외에 속하는 마지막 곡은 엘가 자신의 음악적 자화상이다. 1899년 초연을 지휘했던 한스 리히터(Hans Richter, 1843~1916)가 극찬해서 일류 작곡가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이 곡은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자주 연주되는 곡이 되었다.

1900년 작곡한 또다른 대표작 오라토리오 <제론티어스의 꿈, The Dream of Gerontius>은 그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추기경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의 시에 기초한 이 작품은 레치타티보·아리아·합창을 교대로 등장시키는 전통적인 방법에 의존하는 대신 바그너의 음악극에서처럼 연속적인 짜임새의 음을 사용했다. 버밍엄에서의 초연에서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독일에서 갈채를 받고 난 후에 영국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3부작 교회 오라토리오를 작곡하려고 계획했으나 <사도들, The Apostles>(1903), <주의 왕국, The Kingdom>(1906) 2편만을 완성했다. 이 두 작품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대표적인 주제들은 바그너의 주도 동기 기법으로 처리되었다. 그밖의 성악곡으로는 합창 칸타타 <카락타쿠스, Caractacus>(1898)와 콘트랄토를 위한 연가곡 <바다의 그림, Sea Pictures>(1900) 등이 있다.

표제적 성격을 갖는 대표작으로는 서곡 <코케인, Cockaigne>(1901:〈In London Town〉이라고도 부름)과 '교향적 연습곡' <팔스타프, Falstaff>(1913)가 있다. 5개의 행진곡 <위풍당당한 행진곡, Pomp and Circumstance>(1901~07:1930) 가운데 첫번째 곡이 특히 유명하다. 역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작품으로는 2편의 교향곡(1908, 1911)과 현을 위한 <서주와 알레그로, Introduction and Allegro>(1905), <바이올린 협주곡>(1910), <첼로 협주곡>(1919)이 있다.

20세기에 들어 엘가는 많은 음악적인 명에를 얻었다.
그는 에드워드 8세의 대관식을 위한 곡을 작곡하도록 위임받았으며 후에는 영국의 음악계를 위한 공적으로 기사작위를 받았다. 후에 그는 남작이 되었고 King’s Music의 지휘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부인이 1920년 세상을 떠나자 작곡을 위한 엘가의 열정이 사그라져 버렸다.

1933년 10월 그의 좌골신경에 수술이 불가능한 악성 뇌종양이 발견되었다. 그는 1934년 2월 23일 세상을 떠났으며 성 불스타노 교회에 있는 아내 앨리스옆에 묻혔다.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와의 우정이 결국 그로 하여금 작곡을 계속하도록 했으며 <3번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오페라 1편을 미완성으로 남겼다.


엘가는 헨리 퍼셀(Henry Purcell)이후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최초의 영국 작곡가이며 조국의 음악을 섬나라의 고립성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는 젊은 작곡가들에게 후기 낭만주의의 풍부한 화성 자원을 남겼으며 영국의 민족음악 악파에 자극을 주었다. 그 자신의 음악 어법은 세계주의적인 것이었지만 오라토리는 영국음악의 전통에 근거한 것이었다.

특히 영국에서 엘가는 그의 음악과 20세기 영국음악의 르네상스를 예고한 그의 역할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 작풍은 청아하며 기품에 차 있고, 특히 행진곡 <위풍당당 행진곡>은 영국의 공식 모임에서 반드시 연주하는 것이 관례로 되고 있으며, 대영제국을 상징하는 곡이 되고 있다.




쟈료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