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푸르니에(Pierre Fournier, 1906 - 1986)
프랑스의 첼리스트.

“음악을 그 위대함 속에서 사랑하는 것. 그것은 위대함을 피나는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다.
낙담해 있을 때는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도전해 주는 것이다.

음악의 매력에 이끌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절대로 끊을 수 없는 강한 유대를 만들고 국경이 없는 왕국을 만들기 위해 음악에 대한 사랑을 확대해 가는 것이다.”
- 피에르 푸르니에 -

피에르 푸르니에는 카잘스 이후의 명첼리스트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프랑스파 첼리스트 - 폴 바를레즈(Paul Bazelaire)와 모리스 마레샬(Maurice Marechal)에서 시작하여 푸르니에, 토르틀리에, 나바라, 장드롱에 이르는 - 의 한 명이자, 아마 가장 유명한 사람일 것이다.

1906년 6월 24일, 파리에서 육군장성의 아들로 태어난 푸르니에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그러나 9살이 됐을 때 불행하게도 소아마비에 걸려 피아노의 페달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앉아서 연주할 수 있는 첼로를 택했다.

다행하게도 첼로 레슨은 아주 빠른 진보를 보여서 12세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 바젤레르(Paul Bazelaire)와 안톤 헤킹(Anton Hekking)에게 첼로를 배웠다.

1923년 17세의 나이로 수석 졸업한 뒤, 다음 해에 파리에서 데뷔했다. 이때 모리스 마레샬(Maurice Marechal)이라는 평론가는 "내일을 이끌어갈 첼리스트"라고 평했다.

1933년 베를린 필하모니의 초청으로 협주곡을 연주했는데, 그로 인해 푸르니에의 명성은 확고하게 되었으며 푸르트뱅글러의 협연으로 연주한 슈만 협주곡 3악장의 녹음이 남아 있다.

30년대부터 그는 실내악에도 주력했는데, 카잘스 3중주단에서 카잘스가 활동을 그만두자 그의 자리를 이어받아 43년부터는 코르토 및 티보와 연주하기도 했다. 그의 실내악에 대한 애정은 그가 연주 활동을 마칠 때까지 이어졌다.

1937-1939년에는 에콜노르말에서 첼로와 실내악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941-1949년까지 모교인 파리 음악원에서 가르쳤다.
그 이후 그는 연주 활동에 집중하여, 1948년에는 미국, 1961년 소련(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에 데뷔했고, 우리나라(세종문화회관 개관기념 음악회)와 일본까지 포함해서 전 세계를 연주여행했다.

협연한 지휘자는 푸르트뱅글러 외에 발터, 셀, 쿠벨릭, 카라얀, 클레멘스 크라우스, 첼리비다케, 마르티농, 뮌힝거 등 당대의 뛰어난 지휘자를 거의 모두 망라하며, 무대나 레코드에서 같이 공연한 파트너로는 박하우스, 켐프, 굴다, 루빈슈타인, 슈나벨, 리파티,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프란체스카티, 셰링, 시게티 등 거장들이 즐비하다.

고전음악뿐 아니라 현대음악도 좋아했던 그를 위하여 보후슬라프 마르티누(Bohuslav Martinu), 장 마르티농(Jean Martinon), 프랑시스 풀랑크(Francis Poulenc)등 여러 현대 작곡가들이 작품을 썼다.

첼로연주법에 있어서도 오른쪽 엘보를 높이 들어서 보잉하는 새로운 테크닉을 개발해서 소리를 부드럽게 내는 결과를 창출했다. 만년에는 그의 아들인 장 폰다(Jean Fonda)의 반주로 레코딩을 자주 했다.

1956년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이주했으나 프랑스 국적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피아노 연주자인 아들과 함께 가끔씩 첼로와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는 소나타를 협연했다.

제네바에 정착한 후 피아니스트인 아들 장 폰다 푸르니에의 도움으로 마스터 클래스도 열었다. 아들은 훌륭한 실내악 파트너이기도 했으며 동생인 장 푸르니에도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이름을 날렸다.

1963년 레지옹도뇌르 슈발리에, 이듬해 오피시에로 서훈되었다.
78세 때 런던의 퀸엘리자베스홀에서 독주회를 가질 정도로 노후에도 연주활동을 계속하다가 1986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88년 로열노던음악대학에서는 그를 기념하는 국제첼로페스티벌을 개최하기 시작했다.

푸르니에는 '첼로의 황태자'로 불릴 정도로 귀족적이고 우아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거기에 소탈함과 단정한 양식감, 균형감 등의 고전적 정신이 보태져 정갈한 음악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음색도 아름답고 따뜻함이 넘쳐났다.


그의 예술을 한 마디로 말하면 '곡의 우아함을 최대한으로 끌어낸다'.
그의 음과 음악의 흐름은 결코 딱딱하지 않으며, 정말 너무 잘 흘러가서 그가 연주하는 곡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에 대한 인식은 어느 새 의식에서 사라진다. 그렇다고 좋은 음색만을 추구해서 음악 전체에 대한 배려를 잃는 실수를 거의 하지 않는 점에서 중용을 잘 지키는 그의 음악성이 돋보인다.

카잘스를 들으면서는 그의 인간성과 그가 생각한 곡의 본질에 집중하는 능력에 감동하고, 로스트로포비치에서는 그의 완벽한 기교와 웅장한 스케일에 감탄하는데, 푸르니에는 곡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대한 인식을 늘 새롭게 해 준다.

카잘스 이후의 첼리스트 중 개성적인 점에서 손꼽는 두 사람을 비교하기는 다소 어폐가 있지만, 굳이 비교를 하자면 푸르니에 쪽이 레코드로 듣는 한 고전파까지의 레파토리에서는 로스트로포비치보다 더 좋다고 생각한다. 후자는 실내악에서 가끔은 위화감을 줄 때가 있지만, 푸르니에에게는 그런 문제가 전혀 없으며 본질적으로 실내악에 더 적합하다 싶을 정도로 동료들과 잘 화합하는 연주를 들려 준다.

그의 레코드는 양도 많으며, 소위 '6대 메이저 레이블'에서 모두 녹음했던 녹음 운 좋은 아티스트다.
데뷔 직후부터 50년대 중반까지는 EMI, 그 말기에는 잠시 Decca가 주축이었으며, 전성기인 50년대 말부터 60년대까지는 CBS에 조금 녹음을 한 외에는 주로 DG의 간판 첼리스트로 활약했고, 그 이후에는 RCA, EMI, Erato, Philips, Sony등 여러 곳에 프리로 녹음을 했다.


Pierre Fournier with Vaclav

성향이나 기질 등이 그와 전혀 달랐던 프리드리히 굴다는 1960년 부근에 30회 정도나 그와 같이 연주하고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을 녹음까지 했는데, 푸르니에에 대해 다음처럼 회상한다.

"그는 나보다 훨씬 성숙했으며 나보다 위였다.나는 그에게 빚이 매우 많다.
음악적으로 그에게 매우 많이 배웠으며, 그는 나를 친절하고 끈기있게 이끌어 주었다."


굴다는 푸르니에 외에는 이렇게 애정과 존경을 담아서 말한 음악가가 전혀 없다고 한다.
그리고 후에 하인리히 쉬프(Heinrich Schiff)가 굴다에게 새로 베토벤 첼로 소나타를 녹음하자고 제안했을 때, 굴다는
"내가 승낙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지 마십시오. 나는 푸르니에가 너무 버려 놓아서 내게는 불가능합니다"라 대답했다고 한다.




■ 앨범

01. Dvorak - Cello Concerto , Bruch, Bloch / Pierre Fournier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George Szell,Conductor,
        Pierre Fournier, cello


02.Les Introuvables de Pierre Fournier 4 CD
         Pierre Fournier, cello


03. Beethoven - Complete Works for Cello & Piano
        Friedrich Gulda, Piano
        Pierre Fournier, cello


04. Pierre Fournier - Aristocrat of the Cello [United Kingdom] / BOX SET
        Pierre Fournier, Cello




자료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