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ata For Viola & Piano

글링카의 비올라 소나타는 비록 미완성으로 2악장까지 밖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비올라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대표적인 곡 가운데 한 곡이다.

글링카(Mikhail Glinka)는 흔히 러시아 국민악파의 선구자적인 존재로 알려져 있다. 이는 글링카가 훗날 자신의 자서전에도 회상하고 있듯이, 어린 시절 러시아 민요를 편곡한 악단이 자신의 집에 행사가 있을 때 연주한 것을 들은 경험이 그 씨앗이 되었다고 한다.

글링카는 녹턴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존 필드에게도 잠시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필드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제자였던 칼 마이어에게 배우는 한편, 바이올린을 요셉 뵘에게 배웠다.
글링카는 말년에 교회합창곡 작곡을 계기로 유럽의 교회선법에 관심을 갖게 되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856년 베를린에 건너가 글링카에게 올바른 음악이론과 예술적 개념을 심어준 옛 스승 지그프리트 덴(Siegfried Dehn, 1799-1858)을 찾아 과거의 작품들을 깊이 연구했다.

그러나 그것이 충분한 성과를 거두기 전에 병을 얻어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이렇듯 탐구열이 깊었던 글링카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케루비니 등 고전파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도, 스스로는 고전적인 형식에 대한 연구를 늘 미흡하게 생각한 것으로 전해진다.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d단조는 글링카가 고전파의 작품에 대한 탐구에 열을 올리던 1828년 경에 작곡되었는데, 형식에 대한 탐구에서 잠시 벗어나 여유로운 마음에서 작곡된 것으로 보인다.

어렵지 않게 마음에 와닿는 주제를 피아노가 먼저 제시하고 곧이어 비올라가 그 선율을 되받아 연주해가는 1악장은 애틋한 감정으로 충만하다. B flat 장조의 2악장은 어딘지 슈베르트를 연상케하는 아름답고도 따스한 분위기이다. 피아노의 주제를 받아, 비올라가 노래를 하고 피아노가 아름답게 감싸준다.

평온한 정적을 깨는 듯한 피아노의 화음을 신호로 노래는 숨이 가빠지는 듯 애절해진다. 피아노도 더욱 섬세하면서도 역동적인 음형으로 고조되어간다. 글링카는 1828년에 이곡의 1악장만을 완성했고, 2악장은 미완성인 채로 두었다. 2악장은 보리소브스키(Borisovsky)가 완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작곡가 이야기 : 글링카(Mikhail Glinka 1804 ~1857)

러시아의 스몰렌스크주 출생. 대지주의 아들로 페테르부르크에서 F.필드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나, 음악가가 될 마음이 없어 처음에는 교통성의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26세 때 건강문제로 이탈리아와 독일로 여행을 떠나, 이 여행 중 베를린에 머문 것이 그의 생애를 결정지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화성과 작곡을 S.W.덴에게 배우고, 본격적인 작곡 활동을 개시하였다. 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와서는 푸슈킨, 주코프스키 등 문학서클의 사람들과 사귀었으며, 그들의 자극으로 오페라 이반 수사닌(1836)을 썼는데, 이것이 러시아음악의 시작이 되었다.

그후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1842) 를 비롯한 여러 작품 으로 명성을 얻었다. 1844년에 다시 외국여행을 하였으며, 죽을 때까 지 유럽 각지를 순방하였다. 그러는 동안 베를리오즈와 친교를 맺고, 에스파냐에서는 작곡을 위한 소재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그는 러시아의 첫 작곡가, 러시아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이는 19세기 러시아음악의 양식을 결정하는데 어떠한 작곡가보다도 그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며, 차이코프스키나 러시아국민악파의 음악도 이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외의 작품으로 《호타 아라고네사에 의 한 화려한 카프리치오소》(1845) 《카마린 스카야》(1848) 등의 관현악곡이 유명하다.
연주가 이야기 : 유리 바슈메트(Yuri Bashumet, Viola)

유리 바슈메트(Yuri Bashumet)는 1953년 러시아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 났으며 그가 처음에 어떤 이유에서 바이올린이 아닌 비올라를 선택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가 어려서 부터 이 악기에 대한 아무런 선입관념이 없이 비올라를 다루었고 18세에 모스코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비올라 수업을 정식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비올라 악기에 남다른 자질을 보인 그는 20세를 막 넘긴 약관의 나이에 모스코바 음악원 창립사상 최연소로 교수 자격을 받게 됩니다.
그는 이어서 뮌헨에서 개최한 국제 비올라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그 자신의 이름이 서방세계에 알려졌고 그 때부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놀라운 비올라 연주 실력은 세계의 많은 음악 애호가들을 자극하여 그들의 관심을 비올라라는 악기로 돌리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습니다.
바슈메트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비올리스트는 아닐지 몰라도 그동안 천대 받아오던 비올라의 위상을 끌어 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한 것만은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