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발라드 4곡(4 Ballades) [Vladimir Ashkenazy]
쇼팽은 발라드를 4곡 작곡했다. 이 작품들은 1831년부터 1842년 사이에 쓰여졌다. 즉, 21세부터 32세까지의 가장 화려했던 시기의 작품들이다. 발라드 4곡은 쇼팽의 걸작에 들어가는 작품으로, 그의 스케르초 4곡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창조하고 있다. 그러나 스케르초처럼 전통적인 고전 형식에 조금도 얽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폴로네이즈처럼 향토적 요소를 규정하는 음악 형식도 아니다. 발라드의 형식은 자유롭다. 다만, 4곡이 모두 3박자 계통을 사용하고 있는 점만은 공통적이다(제1번 G단조는 4분의 6박자, 나머지 3곡은 8분의 6박자). 그러나 그 이외는 형식상에 아무런 속박을 받지 않고 있다. 3박자 계통을 사용한 것은, 이 곡들이 내용 표현의 태도로서 무엇인가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를 말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이것의 서술에는 이런 박자가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종종 언급되는 것은 이 곡들이 내용상 뭔가를 "이야기하려고 한다"는 점이며, 이 네 곡의 이야기 줄거리가 쇼팽과 같은 고향 출신의 시인 미츠키에비치(Adam Mickiewics)에 의한 것이라는 것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로베르트 슈만이 쇼팽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설명하는 데서 연유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쇼팽이 과연 이 곡들을 창작할 때 미츠키에비치가 쓴 시를 고스란히 사실적으로 묘사했을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선 작품에 그 시들의 프로그램(표제)이 전혀 나타나있지 않으며, 또한 쇼팽의 음악 자체가 그런 객관적 묘사와는 아주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미츠키에비치의 정신세계와 공통된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그의 음악 속에 추상적으로 토로한 정도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발라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Ballade No.1 in g minor Op.23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 1836년 쇼팽이 20 때의 작품인데, 미키에비치의 시 [콘라드 와젠로트]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 되었다. 슈만은 이 작품에 대하여 "그의 가장 거칠고 또 가장 독창성이 풍부한 작품이다" 라고 평했다. 쇼팽은 신중하고 분명한 어조로 "감사합니다, 저 또한 가장 좋아하는 곡 중의 하나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슈만은 이 발라드에 대해 언급한 편지 속에서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영리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천재성이 가장 잘 나타난 곡"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슈톡하우젠 남작에게 헌정되었다. 영화 피아니스트와 영화 샤인에서 ost로 사용 되었습니다. Ballade No.2 in F Major Op.38 제 2번은 1836년에 작곡됐는데, 1839년 쇼팽은 마조르카 섬에서 정양하면서 현재의 프레스톤 콘 푸오코의 부분과 코다의 아지타토 부분을 첨가하였다. 발라드 제 2번의 원형은 1836년에 작곡된 것으로 여겨진다. 러시아의 전설에 나오는 극적인 이야기 시로 된 작품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1839년 1월, 마조르카 섬에 머무르는 동안 다시 손을 가해 오늘날과 같은 곡이 되었다. 이 곡은 슈만에게 헌정되었다. 곡의 구성은 A-B-A-B-코다로 되어 있는데, 처음에 안단티노의 가요적인 목가풍의 간단한 으뜸 선율로 시작된다. 얼마 후 갑자기 프레스토 콘 푸오코의 폭풍과 같은 음향으로 돌변하여 평화스런 기분을 말살 시킨다. 제 2 테마는 그에 선행하는 제 1 테마와 조화를 보이면서 전개된다. 다시 우울한 기분에 폭풍우는 재차 나타나며 트리오를 지나 아지타토와 코다로 들어간다. 얼마 후 테마가 회상되면서 깊은 슬픔의 정경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Ballade No.3 in A Flat Major Op.47 1840년부터 1841년의 여름에 걸쳐 작곡된 것인데, 미키에비치의 시 <물의 요정>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되었다고 한다. 이 곡은 프랑스풍의 세련되고 고귀하며 쾌활하고 화려한 귀족적 정취를 느끼게 하기 때문에 그 무렵 프랑스 귀족 사회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처음에 질문과 응답식의 주제가 나타난 다음 정서가 풍부한 멜로디가 전개된다. 무지개 같은 아름다운 베일에 싸인 즐겁고 정감있는 곡이다. 제 1번과 함께 대중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곡이다. 나머지 3곡보다 훨씬 경쾌하고 화려하고 평안한 기분이 충만한 곡으로, 파리 사교계의 응접실을 명확하게 떠올리게 한다. 따라서 슈만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발라드는 그 형식과 특징에 있어서 그의 초기 작품과는 확실히 다르며, 가장 독창성이 풍부한 창작에 속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곡에서 우리는 프랑스 수도의 귀족적인 환경에 순응한, 세련되고 지적인 폴란드인을 분명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곡은 미츠키에비치의 시 "물의 요정" 에서 착상되었다고도 하지만, 앞서 작곡된 2곡과 마찬가지로 표제 음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작곡은 1840~41년 가을, 출판은 1841(프랑스판), 1842(독일, 영국판), 폴린드 누아유에게 헌정되었다. 처음에 질문과 응답식의 주제가 나타난 다음 정서가 풍부한 멜로디가 전개된다. 무지재 같은 아름다운 베일에 싸인 즐겁고 정감있는 곡이다. Ballade No.4 in f minor Op.52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 론도 형식 등의 요소를 포함한 작품이다. 발전부에서는 그의 독특한 기법을 절묘하게 구사하였다. 발라드 4번은 1842년에 작곡되었다. 이 해는 바르샤바 시절의 스승 지브니와 친구인 마투시니스키가 사망하는 등 쇼팽에게 정신적 타격이 컸던 해였다. 이 발라드 4번에서 보이는 환상적이기까지 한 내면적 서정성은 그런 정신 상태의 반영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발라드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는데 그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 하네커이다. "이 곡은 너무나도 명상적이다. 더구나 정서가 충만한 시기의 쇼팽이다. 자기 도취와 억눌린 감정(정말 슬라브풍이다, 이 수줍음은!), 그리고 쇼팽으로서는 보기 드문 집중력과 정열이 넘치는 리듬이 곡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작곡은 1842년, 출판은 1843년, 샤를로트 드 로스차일드 남작 부인에게 헌정되었다.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 론도 형식 등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발전부에서는 그의 독특한 기법을 절묘하게 구사하였다.
Sviatoslav Richter(1915-1997)
전설...이라는 말로 기억되는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 현재 우크라이나에 속해있는 지역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독일혈통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도 '리히테르'가 아니라 '리히터' 로 읽혀야 된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다 음악가였지만, 아버지에게는 피아노의 기초만 배운 듯 하고, 거의 독학으로 피아노를 익혔다고 한다. 훗날 나타나는 그의 강렬하고 개성적인 곡 해석은 음악가로서의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를 완전한 독학으로 지냈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10대 중반에 리스트의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테크닉을 익히고 있었고, 대부분의 곡을 초견으로 연주해 낼 수 있었다고 한다. 22세 때 당시 러시아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네이가우스(H.Neuhaus) 문하에 들어갔다. 네이가우스가 처음 리히터의 연주를 듣고 "내 인생을 통틀어 기다렸던 학생이며 내가 보기에 저 친구는 틀림없는 천재 음악가야" 라고 회고했다. 네이가우스는 리히터에게 가르칠 것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그는 많은 것을 배웠다. 리히터의 기량에 경탄한 프로코피에프는 자신의 6번 소나타를 리히터에게 초연을 의뢰하게 되고 리히터는 26세에 늦은 데뷔연주를 하게 된다. 오늘날까지도 모든 피아노곡 중에서 가장 난해한 기교를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곡을 리히터는 완벽하게 연주해 냈고, 청중들도 이 낯선 피아니스트의 연주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전해진다. 프로코피에프는 "리히터의 연주를 듣고서야 내 소나타가 얼마나 대단한 곡인지를 알 수 있었다" 라고 감탄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후에 프로코피에프는 자신의 7,8,9번 소나타도 리히터로 하여금 초연하도록 부탁하였고, 9번 소나타는 프로코피에프가 리히터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말년에 리히터는 마지막 순간에 독주회를 취소한다던지, 충분한 예고 없이 급히 알려서 연주를 한곤 했는데, 사실상 리히터는 언제나 거의 음악적 영감에 따라 행동했으며 남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방식으로 생활해야만 했다. 청중들은 연주회 곡 목록을 연주회장에 가서야 알 수 있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의 음악은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집중력이 높으며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리스트를 비롯한 여러 기교적이고 데모니시한 음악들에 특히 강하기는 했지만, 바하의 평균율 전곡 녹음이나 슈베르트와 하이든의 소나타 녹음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많은 연구를 통한 음악에의 이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각각의 작품, 작곡가마다 서로 다르게 접근하였고 그의 기교는 몇 년에 걸쳐 변화되었다. 따라서 이것이 리히터가 호로비츠나 길렐스 같은 명인보다 더 높게 평가를 받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