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반, 명연주 이야기
루마니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리파티는 백혈병으로 요절한 천재로 그가 활동한 시기는 불과 5년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리파티의 녹음 기록은 비록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연주한 쇼팽의 <왈츠> 연주는 절대적인 연주로 칭송받고 있다.
물론 쇼팽 <왈츠>의 연주로는 쇼팽 전문가인 루빈스타인과 프랑수아(Samson Francois, 1924~1970, 프랑스)의 연주가 있기는 하나, 리파티의 연주는 모노 녹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놓칠 수 없는 가장 감동적인 연주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는 최후 연주회인 1950년 9월 브장송(Besancon) 리사이틀에서도 쇼팽 <왈츠> 연주를 남기고 있다. 이것은 죽기 2개월 전의 극적인 마지막 연주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채 꺼져 가는 한 천재의 예술혼을 불사른 눈물겨운 기념비적 연주이다.
하지만 전곡이 아니며 연주 자체에 있어서 여기 1950년 스튜디오 녹음이 더욱 높은 음악적 완성도를 자랑한다. 물론 놓치기 힘든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연주는 원전판에 따른 전14곡을 수록하고 있는데, 그 배열이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자유로운 배열을 하고 있어 전체를 하나의 큰 흐름으로 보는 독보적인 음악적 식견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정상적인 배열의 연주보다 곡의 분위기가 더욱 살아나는 것이라 음악적 의미가 깊다 할 것이다.
그 배열은 4, 5, 6, 7, 11, 10, 14, 3, 8, 12, 13, 1, 2번이다.
또한
브장송 실황에서는 병마로 인해 2번을 연주하지 못하고 조금 다른 배열인 5, 6, 7, 11, 10, 14, 3, 4, 12, 13, 8, 1번을 취하기도 하였으나, 연주회의 상황에 따른 것으로 전체적 구성에는 큰 변화는 없다.
리파티의 쇼팽 연주는 천재의 해맑은 감성이 번뜩이는 천상적이라 할 시적인 아름다움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특히 왈츠의 시정을 청순하고도 풍부하게 드러내고 있고, 값싼 서정의 표출이 아닌 아련하고 텁텁한 터치 속에 묻어나는 자연스런 아름다움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더욱이 단조의 곡에 풍기는 슬픔이 잔잔한 여운으로 남는 뛰어난 연주이다.
불치병으로 인한 요절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그의 소리에는 정말로 무언지 모를 슬픔이 맺혀 있다. 특히 단조인 10, 3, 12번의 우아한 애수가 왜 그리도 슬프게만 들리는지 모르겠다.
곡 자체가 왈츠라는 무곡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대중적인 왈츠가 아닌 쇼팽만이 감수성이 깊게 배인 고담스런 것이라 할 것이다. 바로 이런 곡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리파티는 왈츠의 다채로운 표정을 아름답게 들려주어 여러 가지 감흥을 불러일으키며, 동시에 왈츠의 화려함에 감추어진 내면의 비애와 슬픔을 그의 짧고 덧없는 생에 투영시키고 있기에 고답적(高踏的)인 크나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리파티는 쇼팽 <왈츠>를 통해 상처받는 영혼의 고독한 한(恨)을 애처롭고도 청초하게 재현해 내고 있는 것이다.
출처 : 불후의 클래식(허 재, 책과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