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별연주 이야기
1950년 9월 16일 브장송 페스티벌이 열리던 오후. 이미 백혈병의 말기에 이르러 창백해진 안색의 디누 리파티가 무대에 오르자 청중들은 안타까움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청중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며 고집을 꺾지 않다가 기절하여, 주사제를 몇 대나 맞고 기운을 차린지 세 시간 남짓 후였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무대 계단을 올라 겨우 피아노 앞에 앉던 그가 바흐의 파르티타 제1번과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제8번 A단조, 슈베르트의 즉흥곡 제3번과 제2번을 연주했다는 것은 차라리 기적이었다.
그리고 쇼팽의 왈츠…. 리파티는 이 작품을 완전히 연주하지 못한 채 제2번에서 건반 위에 올려져 있던 두 손을 내려놓고 만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연주회였다. 이 해 12월 2일,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그의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리파티는 짧은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다.
디누 리파티
그가 녹음한 음악을 들으면서, 아니 이젠 그 이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란 것을 느끼곤 합니다. 흔히들 그를 요절한 천재 피아니스트라고들 합니다. 그의 마지막 연주회 실황인 브장송 실황 연주를 듣노라면 피아노 소리가 이렇게도 시리도록 맑아서, 너무 영롱하여 슬프기까지 한, 이런 음악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연주한 브장송 연주회를 고별연주회라고 합니다. 정말 고별이지요.
모든 것을 남기고 떠나는...
그의 바하는 너무 깨끗합니다. 피아노 위에, 새벽에 내린 조그만 이슬방울들이 이리저리 튀어 가는 듯합니다. 흘러나오는 곡은 Partita No.1 BWV 825의 여섯 곡이 차례로 연주 됩니다.
브장송은 프랑스 서북쪽에 있는 자그마한 도시입니다.
1950년 9월 16일 이 조그만 도시에서는 이제 33살이 된 아주 젊은, 그러나 위대한 예술가의 연주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두 달 전에도 제네바에서도 비슷한 곡들을 갖고 연주회를 했습니다. 그는 다시 브장송에서의 연주회를 계획하였고, 최선을 다한 연주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마지막 한 곡은 연주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의 건강은 최악의 상태였고, 마지막 곡으로 연주되어야 할 쇼팽의 왈츠 2번은 연주되지 못하고, 그는 비틀거리면 일어났습니다. 얼떨결에 터져 나온 박수소리......
마지막 곡이 연주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던 청중은 의아해 했겠지만...
그는 몇 년 전부터 심하게 앓아오고 있었습니다. 요즘이면 어쩌면 쉽게 고칠 수도 있을 류마치스와 합병증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 날도 연주회 전에 겨우 브장송에 도착할 정도였고, 그의 주치의가 연주회를 직전까지도 포기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그는
"나는 약속을 하였다. 나는 쳐야만 한다..." 라고 되풀이만 하였습니다.
물론 그의 부인인 마드렌느도 분명 말렸겠지만 그는 그를 사랑하는 청중들과의 약속을 위하여 연주회를 강행하였습니다. 모든 것, 그리고 생명까지 다하는 연주를 시작한 것입니다.
다시 모짜르트의 소나타가 흘러 나오기 시작하는군요...
이날 연주순서의 두 번째 곡입니다. W. A. Mozart / Piano Sonata No. 8 in a minor / KV 310 왜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는 이렇게 슬픔을 가득 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맑고 투명하고 슬픈 것. - 글쎄요... 리파티의 이 브장송 연주회 실황을 들으면서 이렇게 나이에 걸맞지 않게 자꾸 여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음악의 힘이겠지요. 오십 년 전의 녹음이라 스테레오도 아닌 모노 녹음에다가 음질은 뭔가 스피커와 나 사이에 두꺼운 휘장을 쳐 놓은 듯한 형편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두꺼운 휘장을 뚫고 나오는 아주 섬세한 피아노 음색, 그리고 다양한 음악적 표정은 더 이상 음악이 아닙니다. 그저 다가오는 아름다운 감동만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다룰 줄 하는 악기가 없어서 연주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음악 연주에 있어서 해석의 이전에, 또한 수없이 연주를 하여 몸과 손에 완전히 묻어있는 기량보다 그 앞에는 연주하는 사람의 마음이, 그 시간의 마음이 음악에 묻어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주 조그만 곡을 치더라도 마음의 표정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지금 리파티의 마음을 들여 다 본다면, 그가 보는 세상은 더 이상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깨끗할 수 없습니다.
이제 다시 세 번째 연주곡이 흘러나옵니다. Franz Schubert "Impromptu in G flat major D 899 No.3" "Impromptu in G flat major D 899 No.2" 아마도 이 브장송에서의 디누 리파티의 연주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면 이 곡을 그냥 넘길 수 없습니다.
이 두곡이 연주되는 동안 약9분간 나는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이 연주회에서 기력이 다 할 때까지 연주하였고 그리고 그는 두 달 후에 결국은 영면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 연주회를 시작하면서 아마도 다가오는 죽음을 예상하였을 겁니다. 생의 마지막 불꽃까지 다한 연주.
그의 음반들을 보면 , 50년에 많은 곡들을 녹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지병이 가장 심했던 이 마지막 해를 그는 약으로 생을 연명하였습니다. 지금 들리고 있는 저 피아노 소리도 아마 약의 기운으로 그가 연주하고 있던 것이겠지요.
다시 쇼팽의 왈츠가 연주되기 시작합니다. 쇼팽 왈츠 전곡 14곡이 흘러나옵니다. 그가 연주하는 이 14곡의 연주 순서는 아주 특이합니다. 1번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그만 갖고 있는, 그의 세계에 존재하는 쇼팽의 이 곡들을 교묘하게 연결하여 - 작은 소품을 모아서 큰 작품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 브장송 연주에서도 그랬고, 그 앞의 연주회에서도 그는 자기만의 순서대로 연주하였습니다. (제네바의 연주회에서와 브장송에서의 연주는 그 순서가 단 한 곡만이 다릅니다.)
불과 5년의 짧은 활동을 한 후 33세로 세상을 떠난 디누 리파티. 이 브장송 고별 콘서트는 음악사상 유래가 없는 미완성 음반이었고 그의 짧은 연주 인생 중 그야말로 마지막 연주였습니다.
1950년 9월 16일 그가 브장송 음악제에 나갔을 때 그의 몸은 백혈병으로 이미 죽음의 문턱까지 가 있었고 가족들과 주치의는 연주를 극구 말리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의 아내이며 피아니스트였던 마들레느 리파티는 가슴 아프게 그 때를 회상합니다.
그분은 아주 쇠약해져서 우려할 만한 상태로 연주회 날 저녁 브장송에 도착했으므로 피아노 연습을 하기 위해 연주회장인 '살 뒤 빨르라망'에 가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였습니다. 호텔에 돌아오자 그분의 충실한 벗인 주치의가 연주회를 중단해야겠다고 만류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리파티는 완강하게 '나는 약속했다. 나는 연주를 해야만 해'라고만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그분은 기운을 차리기 위해 주사를 연거푸 몇 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는 자동인형처럼 옷을 갈아입고 홀로 데려다 줄 자동차가 있는 데까지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계단을 오르는 일이 그분에게는 정말 칼베르(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로 향하는 발걸음과 같았습니다. 숨이 막혀 실신하지 않을까 하고 염려될 정도였습니다.
폭발적인 갈채가 홀에 도착한 그분을 맞이했습니다. 각처에서 모여든 청중은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청중은 죽어가고 있는 -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 이 젊은 천재의 마지막 연주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손가락은 자꾸만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고 수많은 미스 터치를 범하다가 결국 쇼팽의 14곡의 왈츠 중 마지막 한 곡을 연주하지 못하고 끝내 무대를 내려와야 했고 두 달 후에 영원히 세상을 등지고 맙니다. 그 후 이 연주는 라이브 녹음으로 음반사상 유일한 미완성 연주로 우리 곁에 남게 되었습니다.
리파티의 연주 대부분을 녹음했던 명 프로듀서 월터 레그는 그의 최후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죽기 30분 전에 베토벤의 'F단조 현악 4중주곡'레코드를 듣고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이봐요. 위대한 작곡가가 된다는 것 만으론 충분치 않아요. 저런 음악을 작곡하려면 당신은 하느님이 선택하신 악기가 되어야 해요."
리파티에게도 갈증은 있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의 음악에서 분명히 그의 갈증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동시에 그러한 갈증 위에서 아름답게 꽃피었지요.
그처럼 갈증 위에서 아름답게 꽃필 수 있을지... 신이 선택한 악기가 되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지.... 제게도 과연 그런 자격이 있을지 생각해봅니다.
출처 : https://www.wangho.net/blog/arch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