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샤프란(Daniil Shafran, 첼로 1923~1997 )
샤프란이라는 이름은 상대적으로 로스트로포비치에 비해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공산혁명 후 이념적인 문제로 소련을 떠나 서방에서 활동한 로스트로포비치와는 달리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러시아 등 동구권을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만큼 서방세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공산권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폐쇄적인 태도들까지 겹쳐서 결과적으로는 아주 고고(孤高)한 존재인 것처럼 서방세계에 인식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세련미가 대단하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서정성과 아름다움이 그의 연주에서 느껴진다.
로스트로포비치가 스케일이 크고 열정적이고 외형적으로 화려한 연주를 했던 반면, 샤프란은 소박하고 따스하고 내면적으로 깊은 사색에 잠긴 연주를 들려주었다.
따뜻한 음향을 좋아한 과거 LP 수집가들에게 샤프란의 음반이 중요한 수집 목표가 되었던 것은 바로 이런 매력 때문이었다. 외향적이고 박력 있는 연주를 들려주는 로스트로포비치에 비해서 샤프란은 비교적 악보에서 자유로운, 낭만적이고 주관적인 연주를 들려준다는 평가를 들었다.
샤프란은 깊은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진지한 연주자의 길을 걸은 철학적인 연주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새삼스레 그의 예술을 높이 평가하는 많은 매니아들이 생겨나고 있고, 심지어는 첼로의 황제인 카잘스에게 비교될 수 있는 유일한 첼리스트라는 과격한 표현을 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
물론 다닐 샤프란은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첼리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그에 대한 정보가 빈약한 관계로 여전히 사실보다는 훨씬 과대포장된 상태로 '신비의 첼리스트'로 남아 있다. 언젠가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는
“만약 당신이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에 감동을 받았다면 샤프란의 연주를 들을 때까지 기다리시오”라고 하면서 진가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첼리스트가 러시아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도 했었다.
샤프란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참고해야 할 음반은 바흐의 6곡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다.
그것은 이 작품이 첼리스트의 정신과 기교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된다는 이유도 있겠고, 모든 연주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도전하는 곡이라는 측면도 있겠지만, 역시 샤프란의 깊은 내면 세계가 이상적으로 발현되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다닐 샤프란이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연주에 본격적으로 어프로치하게 된 것은 1950년대 후반으로 그의 나이 30대 중반을 지났을 때의 일이다. 연주가로서의 경험이나 정신적 깊이가 어느 정도의 단계에 이르면서 이 심오한 음악에 자신만의 특별한 영혼을 불어넣고 싶은 욕구가 있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1997년 74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연주자로서의 그의 삶에 있어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지고의 예술적 이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샤프란은 끊임없이 청중들 앞에서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하며 서서히 이 작품해석의 완성을 향해 나아갔다. 그 결과 젊은 시절의 열정과 경외감에 삶의 무게를 실어 깊고 웅혼한, 그야말로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세계를 구현하는데 성공했다.
샤프란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그의 40대인1969-1974년 사이에 소련의 국영 레이블인 멜로디아에서 녹음 발매했던 전곡녹음으로 LP시대에는 전설적인 명반으로 여겨졌던 유명한 연주이다.
샤프란은 대단히 열정적인 성격이면서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심한 낯가림을 할만큼 부끄러움을 타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레슨도 꼭 자기 집이나 제자의 집에서 했다. 학교에서 레슨을 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무대에서 연주할 때, 그가 사용하는 의자는 아주 높았고, 항상 의자의 맨끝 부분에 걸터앉듯이 앉아 연주했다고 한다.
출처 : 박근수의 음악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