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샤프란(Daniil Shafran, 첼로 1923~1997 )
샤프란은 1923년 1월 13일 페트로그라드(Petrograd, 후에 Leningrad로 개명됐다가 다시 옛이름 St.Petersburg로 돌아간다)에서 태어나, 6살 때부터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첼로 수석이었던 아버지 보리스로부터 첼로를 배우기 시작하여, 2년 뒤부터는 어린이를 위한 특수 음악학교에서 알렉산더 쉬트리머(Alexander Shtrimer, 1888 - 1961)에게 사사했다.
이듬해,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입학이 허가되고 그 해에 음악원에서 "물레젓는 노래"등 2곡을 연주했다. 샤프란이 대중들 앞에서 한 첫연주였다. 이어서 1933년(10세)에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변주곡"을 연주했다.
14세 때(1937년) 전(全)소련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콩쿠르 요강에 따르면 샤프란의 나이가 응모자격이 없었지만 콩쿠르 운영위원회가 특별히 응모를 허가했던 결과였다. 이때 부상으로 받은 1630년도에 제작된 아마티를 받아 그 이후 평생 사용한다.
레닌그라드 음악원을 졸업하고 1943년에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솔로이스트로 임명되고, 그때부터 샤프란의 본격적인 연주경력이 쌓이기 시작한다.
1946년엔 에네스쿠와 루마니아에 가서 연주회를 갖고 바흐, 하이든, 베토벤의 작품들을 연주했다. 부다페스트의 "평화우호축제 콩쿠르"(1949년), "프라하의 봄 국제 콩쿠르"(1950년)에서 로스트로포비치와 공동 우승했고, 그 후 런던에 데뷔하고, 1960년에는 카네기홀 데뷔 리사이틀을 가져 미국에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1971년에는 소련에서 수여하는 인민 예술가 상을 받았다. 1974년 6월, 연주가로서는 대단한 명예였던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의 첼로 부문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54년, 카발레프스키(Dmitry Kabalevsky)의 첼로 협주곡 제1번을 녹음한 음반이 발표됐다.
이 음반의 반응이 성공적으로 나타나자 작곡자는 제2번 협주곡을 써서 샤프란에게 헌정했다.
1959년엔 로마의 '국제 예술아카데미'의 명예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샤프란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전곡 연주에 몰입하기에 이른다. 1960년에 뉴욕 카네기 홀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변주곡"과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소나타 등을 연주하고, 이들 레퍼토리를 RCA 레이블로 녹음하기도 했다. 샤프란 최초의 스테레오 녹음으로 기록되는 음반이다.
1962년엔 하차투리안의 첼로 협주곡을 모스크바 음악원강당에서 연주했고, 1965년엔 자기에게 헌정된 카발레프스키의 협주곡 제2번을 협연했고, 처음으로 일본에 가서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제2번을 도쿄 심포니와 협연하고 리사이틀도 가졌다. 프로코피에프, 슈베르트, 쇼스타코비치의 작품들을 연주했는데 이때를 계기로 일본에서 샤프란 신드롬이라고 할만한 대단한 바람이 일어났다.
이무렵의 일본 미디어들도 샤프란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는데, 이를 접한 국내의 일부 매니아들에 의해서 샤프란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해졌다. 그러나 상당한 부분은 심하게 과장되기도 했고, 지나치게 이 연주자를 미화하거나 신비로운 존재로 부각시키도 했다. 그무렵 우리나라엔 소련 연주가들의 음반수입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더더욱 이 연주가에 대한 정보가 부풀려지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다.
샤프란은 1974년과 1976년에 다시 일본에 가서 드보르작의 협주곡과 카발레프스키의 협주곡 제2번, 생상스의 협주곡 제2번을 NHK 심포니 등과 협연하고 독주회도 가지면서 또다시 샤프란 바람을 일본에 일으켰고, 그 바람이 역시 한국 매니어들에게도 분다. 여전히 그의 음반은 수입이 금지된 상태였고, 그래서 샤프란은 점점 더 신비로운 존재로 부각된다.
1995년과 1996년에는 피아니스트 긴스버그(Anton Ginsburg)와 런던의 위그모어 홀에서 몇 차례 연주회를 갖고 쇼스타코비치와 프랭크, 벤자민 브리튼의 작품을 연주했다.
1997년 2월 7일 러시아에서 74세라는 생애를 마감했다.
출처 : 박근수의 음악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