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와 아르페지오네

누구에게나 거의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이겠지만 기교나 유명세와는 거의 상관없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연주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객관적으로 납득할만한 명쾌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는 그런 연주, 지금보다 많이 푸르런 젊음이었을 때 가슴을 파고들어 들뜨게 했던 첫 사랑의 열병과도 같은 신선함이 살아있는 연주……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 한 구석엔 누구나 그런 연주 한 두 개 정도는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정도의 낭만도 허락되지 않는다면 정말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정내미 떨어지는 곳이 될른지도 모릅니다.

슈베르트는 사실 어지간히 들어서는 어필하기 어려운 작곡가입니다.
사람을 확 끄는 화려함도 웅장함도 엄숙미도 적고 중.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모차르트, 베토벤과 함께 삼총사로 등장해서 울궈먹을 만큼 울궈먹었고 해서 뭔가 좀 새로운 것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존재라고 말하긴 힘듭니다.

작곡분야도 넓지 않아 음악사에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는 교향곡들과(미완성 교향곡이 유명하긴 합니다만.) 피아노 음악과 현악 4중주를 중심으로 한 약간의 실내악들, 그리고 유일하게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받는 가곡들이 그의 작품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도 과장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슈베르트의 보석 같은 작품 하나가 있습니다.
옛날에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간 아르페지오네(Arpeggione)라는 6현 악기를 위해 썼다는 소나타(D.821)가 그것입니다. 음악을 좀 듣는다는 사람치고 이 곡을 듣지 않는 사람을 아직 못 봤습니다. 이를테면 베스트셀러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러면서도 음반은 의외로 적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지금 이 음반과 로스트로포비치/브리톤(Decca), 슈쿠 이와사키 라는 일본인 반주자와 함께한 야노스 쉬타커의 실황반(서울음반), 푸르니에/위보(EMI),그리고 오케스트레이션 해 놓은 가스파르 카사도(Vox)정도가 고작입니다. 첼로의 역사를 주름잡아온 기라성 같은 첼리스트들…. 파블로 카잘스를 비롯해서 그레고리 피아티고르스키, 엠마누엘 포이어만, 쟈클린 뒤 프레까지도 아르페지오네를 녹음했다는 이야긴 아직까지 못 들어봤으니 이 거장들이 이 곡에 관심이 없었던지 아니면 다른 곡들을 녹음 하느라 그냥 스쳐 갔던지 둘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선율은 슈베르트답게 달콤하게 아름답고 마음이 시릴 만큼 슬픈 빛을 띄지만 뭔가 빼먹은 듯한 느낌이 드는걸 느낍니다. 알쏭달쏭한 그것의 형태를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해 왔지만 알 수가 없었습니다.
도무지 설명할 순 없는 느낌이지만 웬지 이게 전부가 아닐 것이라는 느낌, 뭔가를 남겨두었는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늘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마이스키의 나긋나긋하지만 무엇을 열심히 정말 한눈 팔지 않고 진지하게 말하려는 태도와 아르헤리치의 한걸음 반 뒤에서 천천히 산책길을 따르는 듯한 정겨운 반주는 말할 수 없는 앙상블을 만들어내며 ‘아르페지오네는 이 정도는 되어야지!’하는 뿌듯한 긍지와 포근함을 듣는 이로 하여금 느끼게 충분하지만 그래도 허전한 부분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봐야 별 수 없으니까 살아가다 보면 깨닫는 날도 오겠지.…. 속 편하게 생각하고 느긋하게 드러누워 등허리로 방바닥 닦아가며 천장으로 피어 올린 담배연기로 벽지를 누렇게 탈색시키며 10여 년간 이 연주를 질리지도 않고 들어왔습니다.

가끔 듣다가 지겨워지면 Francoise Hardy의 ‘Comment te dire adieu’ 같은 곡이나 황병기의 섬뜩한 ‘미궁(홍신자의 목소리는 압권입니다)’ 같은 걸 듣고 나면 그런대로 견딜 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뭔가 빠져 있는 느낌은 슈베르트의 반 토막짜리 삶이 지니는 한계 때문이라고……물론 오래 산다고 해서 뭔가 깊어진다고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인생의 양(Quantity)과 질(Quality)은 무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반론이 사람 잡는다고 무얼 어떻게 딱 규정해 놓게 되면 시시각각으로 변증법의 날개 아래 태어나고 소멸되는 그 많은 변수를 설명해 낼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만사는 ‘Case by Case’가 제일인 법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슈베르트의 경우 그의 허락된 삶이 너무 짧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슈베르트의 작품 중에서 남들 다 높이 평가하는 그 향기 그윽한 예술가곡들도 교향곡들도 현악 4중주들도 전부 다 즐겨 듣지 않습니다. 그저 구색 맞추는 정도로 몇 장씩 가지고 있는 게 전부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가끔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피아노 소나타들의 아름다움은 탁월한 데가 있습니다.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이 나고 부드럽고 사람을 한 20여 년 전의 기억으로 쉽게 이끌어 갑니다. 또 하나….아르페지오네도 마찬가지 입니다.
솔직히 첼로는 별로 즐겨 듣는 악기가 아니었습니다.
중얼거리는 것도 같고 변명하는 것 같기도 한 음색도 별로였고 살 찐 바이올린 같은 모양도 마음에 들지 않는 악기였습니다. 남들은 무반주 첼로 조곡의 위대성을 이야기 하지만 제가 그걸 깨닫는 데는 적어도 10종류 이상의 음반과 15여 년의 세월을 필요로 했고 그 전에는 눈이 아플 때 틀어놓고 잠을 청하면 그렇게 잠이 잘 올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카잘스의 연주는 적당히 낡은 음질이 주는 흑백 영화 보는 것 같은 느낌과 나직한 소리로 인해 낮잠의 훌륭한 동반자였으니 이 조곡을 오래된 선반 위에서 꺼내 갈고 닦아 환갑이 넘어서야 비로소 음반에 옮긴 거장에게는 참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취향이 그런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앞의 리뷰에서도 한 말 같은데 이 음반도 명반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못 봤습니다.
그러나 첼로도 흐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 준 것만으로도 이 음반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요즘 같은 겨울의 약속 없고 식구들도 다 계 모임이나 집들이 가고 조용한 쉬는 토요일 저녁에 향 좋은 스리랑카 산 홍차 두번째로 울궈내 가지고 손에 쥐고 앉으면 오디오에 걸어볼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 Web
글쓴이 : 미상